[논평] 권리를 말할 수 없는 곳에서 n번방은 지속된다.

일명 ‘박사방’의 가해자들이 구속되었다. 경찰은 지난 20일까지 운영자 조 씨를 포함하여 공범 124명을 검거하고 이 중 18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간 ‘박사방’, ‘n번방’ 등에 접속하여 피해자 신상정보를 확보하고, 이를 빌미로 한 협박, 지시, 강요, 촬영에 가담하거나 유포와 공유 등의 행위에 가담한 이들을 포함하면 그 숫자가 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절대 운영자와 주동자 몇 명에 대한 처벌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부와 국회, 사법당국이 모두 이 사건을 심각한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지하고 가담자 전원에 대한 처벌은 물론,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이 문제는 강력한 처벌과 사법조치만으로는 근절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법적 처벌은 가해자 개인을 벌할 수 있을 뿐 이와 같은 범죄 행위가 반복되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온전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찰과 검찰 등 사법당국과 정부는 강력한 단속과 처벌 의지를 밝히는 데 그치지 말고 지금까지 이러한 구조를 유지시키는 데에 일조해 온 책임 또한 통감하고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과제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향후 대책을 마련하는 데 있어 다음과 같은 지점들을 반드시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 음란의 문제가 아니고 폭력의 문제다.

n번방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일이 아니다. 그간 몇 명의 피해 여성들은 신상 공개에 대한 협박을 받으면서도 두려움을 무릅쓰고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신고한 바 있다. 그러나 경찰은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n번방 사건으로 검거된 한 가해자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엔 경찰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대수롭지 않게 다뤄 이후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는 진술을 하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불법촬영물을 거래하면서 동시에 촬영물 삭제로 다시 돈을 버는 카르텔이 성장하고, 유명 연예인들조차 이와 같은 행위에 가담했지만 사법기관들은 가해자들에게 쉽게 면죄부를 주었으며 국회에서는 이를 개인적인 유희 내지는 흔한 일탈행위 정도로 취급했다.
이미 매우 심각한 수준의 폭력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디지털 성폭력을 전문적으로 파헤쳐 온 여러 단체와 전문가들이 수차례 구체적으로 고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 문제가 이렇게 가볍게 취급되어 온 이유는 국회와 사법당국조차 이 문제를 폭력의 문제가 아닌 음란물의 문제로만 인식해왔기 때문이다.
국회 국민동의청원으로 올라온 일명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의 법사위 논의 기록을 보면 이 같은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n번방 관련 청원 요구사항인 국제 공조수사, 디지털성범죄전담부서 신설, 양형기준 재조정 등은 제대로 논의되지도 않았고 의원들은 주로 딥페이크 영상물에 관한 논의로 넘어가면서 이 문제를 음란물의 제조와 유포에 관한 처벌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관해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처음부터 논의의 틀이 잘못 짜여진 것이다. 딥페이크 영상물을 포함하여 디지털 성범죄 촬영물은 음란의 문제가 아닌 폭력의 문제로 다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제작자와 소비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이 타인의 신체와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영상물을 만들어 제작부터 유통, 판매, 공유까지 직접 개입하고 서로를 독려하며 확산시켜가고 있는 것이 디지털 성폭력의 특징이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가 폭력이 아니라 음란물의 제작과 향유라는 인식은 오히려 행위에 가담하는 이들의 죄의식을 경감시키고 적극적인 참여 동기로서 작동한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영상물의 규제는 표현의 자유에서의 쟁점도 아니다. 음란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폭력의 문제를 보아야 쟁점이 제대로 드러난다. 표현물의 노출 수위나 제3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촬영, 유포, 판매 등의 과정에서 당사자의 동의가 있었는지, 여기 개입된 협박, 갈취, 신체적•정신적 폭력 행위 등이 있었는지의 문제가 쟁점이 되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향후 이 문제를 음란물이나 표현물의 규제 영역에서 다룰 것이 아니라 폭력의 문제로서 다룰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둘째, 아동•청소년만을 피해자로 전제하지 말라.

현재 텔레그램을 이용한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관심은 주로 아동•청소년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알려졌다시피 이 범죄의 피해자가 아동•청소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동과 청소년 피해자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면 가해 사실보다 피해자의 유형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중요한 전제는 피해자가 누구이든, 어떤 성적 욕망을 표현했든 간에 당사자의 자율적인 합의와 그에 대한 존중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위는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아동과 청소년은 이 과정에서 더욱 취약한 위치에 있지만 나이가 많다고 해서 그 역량이나 자원이 모두 충분하거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아동•청소년도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인이면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성폭력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며 피해자를 선별하고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게 만드는 한편, 아동•청소년과 장애인에게는 보호를 내세워 권리를 제약해 왔다. n번방을 만들고 참여해왔던 자들은 이러한 차별적 구조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이 초기에 무엇을 선택하거나 오인했다고 해서 가해자들의 죄가 결코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언론 또한 아동•청소년 피해자를 강조하고 성폭력의 구조를 가리는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성이 필요하다. 규제되어야 할 것은 개인의 성적 표현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침해와 폭력이다. ‘순수한 피해자’ 상을 전제하지 말고 폭력 행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셋째, 피해자들이 어떠한 낙인이나 처벌, 피해사실 공개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신고와 상담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불법촬영과 디지털 성범죄는 촬영물이나 신상정보의 유포를 이용한 협박을 통해 지속되고 확산되었다. 이와 같은 협박이 피해자에게 두려움을 심고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게 만들었던 사회적 조건 자체가 범죄의 토양이 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문제들, 즉 우리 사회가 개인의 자율적인 성적 행위와 폭력을 구분짓지 않고, 폭력이 아니라 음란을 단속하며, 피해자의 순수성을 문제삼아 온 사회이기에 가능했다.
지금 검거되거나 구속된 이들이 모두 처벌을 받고 이번 사건으로 연루된 이들이 모조리 처벌받는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협박이 유효한 사회가 지속된다면 또다른 n번방은 어디서든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이 언제라도 낙인이나 처벌, 피해사실 공개에 대한 두려움 없이 상담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현재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탁틴내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디지털성폭력피해자지원센터 등에서 피해자 상담과 지원을 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폭넓게 알릴 필요가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부모나 다른 지인에게 상담 사실이 알려지지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알려져야 한다. 당장 지원기관에 연락을 하거나 찾아가기 힘든 사람들이라면 가까운 지인에게라도 먼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자살 기사의 말미에 자살예방상담번호를 제공하는 것처럼, 모든 n번방 기사의 말미에 이와 같은 정보를 공유하자. 사회 전반적으로 인식을 바꿔나가는 일 또한 이 중요하다. 학교와 공공기관에서부터 교육과 캠페인을 벌여나갈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나서기를 촉구한다.

넷째, 성적 권리에 대한 인식과 자원의 기반을 기초부터 새롭게 다져야 한다.

한국 사회의 성담론은 아주 오랫동안 검열과 단속을 중심으로 작동하거나, 권리와 자원은 없이 개인의 자유만이 강조되는 양극단 속에 놓여 있었다. 성적 권리가 무엇인지, 이러한 권리를 활성화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과 보장이 무엇인지는 논의되지 않았다. 성을 금기의 대상으로만 삼는 검열과 단속의 정치와, 성적 자원의 거래만을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 논리 사이에서 폭력적인 성적 자원의 거래와 경제가 형성된다. 그 결과 한쪽에서는 검열과 단속을 피해 폭력적인 성적 자원의 거래와 경제가 성장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사회경제적 자원이 취약한 이들이 이 거래의 대상이 되거나 생계를 의존하게 되었다. 때문에 욕망의 대가 또한 불평등하다. 음란을 단속하는 방식은 이 구조를 더욱 성장시킬 뿐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성에 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일이다. 개인의 삶과 생존, 사회경제적 자원과 권력의 문제로부터 따로 떨어진 성의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 주거, 연애, 결혼, 가족구성,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 양육, 돌봄과 성의 문제는 모두 사회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인식이 성교육에서부터 국가 정책과 법 체계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심각한 성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온 사회가 들끓도록 분노하고 강력한 처벌이 요구되었지만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리 절차가 끝나고 나면 모든 일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절대로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피해자 지원에서 멈춰서는 안된다. 성에 대한 인식과 자원의 기반을 근본부터 재편해 나갈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금기가 아니라 권리에 대해 말하고, 음란이 아니라 폭력을 문제삼으라. 피해자에 대한 낙인이 아니라 정확한 정보와 사회경제적 자원, 평등한 관계를 제공하고 지원하라.

우리는 이와 같은 과정이 실현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요구하고 그 기반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2020년 3월 23일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