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임신중지 가이드북 「곁에, 함께」 후기

박슬기(언니들의병원놀이/산부인과 전문의)

‘낙태죄 없는’ 2021년이 정말로 왔다. 새해맞이, 아니 낙태죄 폐지 카운트다운을 하며 그 어느 때보다 마음 소란하게 새해를 맞았다. SHARE에서 발간한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임신중지 가이드북’ <곁에, 함께>를 다시 펼쳤을 때, ‘임신중지는 법적으로 보장되는 권리’라는 문장이 새삼 사무치게 눈에 들어온다.

거듭 말해 온 것처럼, 임신중지는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한 여성이 살아가는 서사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종류의 피임을 했거나 하지 못했는지, 임신유지 여부에 대한 결정은 누가 어떻게 왜 내렸는지, 모든 이야기는 연결되어 있고 앞으로의 삶과도 연결될 것이다. <곁에, 함께>를 곰곰 읽으며 이를 다시 곱씹는다. 임신중지라는 경험은 분절된 사건이 아닌 한 사람의 연속된 삶에서 존재하며, 상담자와 의료인 역시 임신중지의 의료적 조치 뿐만 아니라 삶의 권리를 보장하고 회복하기 위한 포괄적 지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낙태죄 폐지 운동은 임상 의사인 내게 트라우마와 같은 경험이었다. 여성들의 삶이 촘촘히 얽혀서 선명히 드러나 있는 전선으로서의 낙태죄가 여실히 드러남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작 의사로서 시술을 요청받을 때는 근무하는 병원의 방침상 응할 수가 없었다. 약물적 임신중지를 설명하고 ‘위민온웹’ 등의 단체를 통해 받을 수 있는 지원을 안내해 오던 것조차, 약품이 세관에서 압류당했다는 문의를 받은 이후로는 아예 할 수 없게 되었다. 메일로, SNS 메세지로, 도움을 구하는 절박한 문의들이 도착할 때마다 그 여성들의 삶 전체가 내게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어떤 삶도 내가 감히 책임질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답변을 되풀이할 때마다, 무거운 닻이 나를 세상 저 끝까지 가라앉히는 느낌이었다.

<곁에, 함께>를 읽는 것은 이런 내 경험들을 되짚어 보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힘들었고, 내내 감사했다. 2020년까지의 한국에서 임신중지가 필요한 상황을 만난 그 어떤 상담자라도, 어쩌면 나와 같은 경험을 했을지 모른다. (아마도 2021년이라 해서 쉽게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저 가라앉지 않고, 그런 경험을 딛고, 나누고, 다시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단단하게 다져온 마음들이 보였다. ‘곁에, 함께’ 있겠다는 제목처럼.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엇보다 현실적인 지침들이 힘이 되었다. 특히 의료현장은 상담원칙이나 방식에 대한 수퍼비전, 훈련 등이 전무하다시피하며 의료인 개개인의 특성 혹은 ‘친절함’ 등으로 퉁쳐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진료실에서 상담할 때마다 고심하여 말을 고르면서도, 내가 잘 하고 있는 건가 싶은 막연한 불안감이 들곤 했다. 가이드북에서는 상담원칙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문장의 예시를 들어 어떻게 묻고, 어떤 말을 사용하면 좋을지에 대해 제시하고 있는 점이 도움이 되었다. 한 예로, 그동안 나는 임신중지를 결정한 당사자에게 ‘왜’냐고 묻는 것 자체가 상처가 될까봐, 혹여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의도로 느껴지지 않을까 우려해서 질문하기를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임신중지를 강요당할 수도 있고, 스스로의 결정에 확신이 없을 수도 있고, 임신중지 이외에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기에 중립적인 언어로 ‘이유’를 물어야 한다는 부분에서 끄덕여졌다. 또한 그 결정에 열린 태도를 취하는 것과 별개로, 스스로 내린 결정을 신뢰하고 존중하도록 북돋는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 역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내담자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당부와, 재방문을 ‘실패’가 아닌 신뢰의 신호로 해석하라는 부분에서도 오래 멈추어 곱씹었다.

‘별도의 지원과 고려가 필요한 경우의 상담’에서는 섬세하게 언급된 문장들 사이마다 고민의 깊이가 느껴졌다. 또한 그만큼 가이드북 지침과 진료현장 사이의 간극이 드러나는 경험들이 떠올라, 안전과 신뢰를 바탕으로 충분히 상담하기 어려운 진료환경의 요인들에 마음이 무거웠다. 특히 청소년 여성의 경우,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친권자가 진료실에 함께 들어와 모든 상담과 진료내용을 감독하고 결정권을 행사하고자 하며 분리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이주여성과 장애여성 역시 진료현장에서 ‘보호자’라는 존재에 의해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당사자와의 소통이 가로막힌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욱이 임신중지와 관련한 상황에서, 당사자와의 비밀유지가 가능한 안전한 상담과 의료적 지원을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을 나누고 싶었다.

세심하게 검토를 거듭했을 [의료가이드]를 읽으면서는, 무엇보다 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임신중지 교육이 시급함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단지 낙태죄 폐지로 임신중지가 처벌받지 않음을 넘어, ‘국제적인 수준에서 권고되는’, ‘양질의’ 의료지원을 받을 마땅한 권리가 있음이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껏 불법이라는 이유로 임신중지에 대한 어떤 정규교육도 받아온 적 없는 국내 의료인들은, 여전히 국제적으로 권고하지 ‘않는’ 방법인 D&C(자궁경부확장 소파술)을 대부분 사용하고 있다. 약물적 임신중지 역시 교육받은 바가 없기에 거부감이 클 뿐만 아니라 임상적인 지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낙태죄 폐지가 가시화되자 산부인과학회는 의사교육은 커녕 ‘임신 10주 미만에만 시행하겠다’, ‘선별적 거부하겠다’, ‘의사의 거부권을 명시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 지경이다. 이러한 의사들의 거부권 요구 이면에는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상황에 대한 두려움 또한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약물적 임신중지, D&C 외에 권고되는 수술적 방법, 그리고 임신중지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대처하는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 안전하고 양질의 의료지원을 담보하는 것은 물론 의료인들의 두려움으로 인한 거부감도 줄어들 수 있을 텐데. 임신중지 약물인 미페프리스톤 국내 도입 및 의료인 교육과 훈련까지, 지금 이 시간에도 임신중지가 필요한 여성들을 위해 시급히 이뤄내야 할 숙제임을 되새긴다.

단지 임신중지라는 의료적 조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의 권리에 대한 ‘포괄적 지원’을 목표로 하는 가이드북의 내용들을 곰곰 읽으면서, 어느 한 분야의 상담으로 가능한 것이 아닌 상시적인 네트워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부록에 수록된 [상담, 지원 기관과 정보 안내]에는 주로 수도권 중심의 단체들만 안내되어 있어서 다소 아쉬웠다. 우리 지역에서 사례마다 필요한 내용을 전문적으로 상담받을 수 있도록 서로 연계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임신중지와 관련해 상담자도 의료인도 더 많은 경험들을 나누며 더욱 단단한 지지가 되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하고 바라본다.

단어마다, 문장마다, 자료를 찾고 모으고 내용을 세우고 말을 고르고 다듬어냈을 고민과 노고의 시간을 헤아려 본다. 꾸준히 수정, 보완될 예정이라는 문구와 함께 1st edition이라는 글자가 단단한 책임감으로 읽힌다. 학회에도 의사회에도 없는 한국의 단 하나의 ‘임신중지 가이드북’. 이걸 또 해내다니 이 대단한 사람들. 감사할 뿐이다. 이 가이드북을 통해 현장에서 만나는 여성들 ‘곁에’서 힘이 될 수 있기를, 많은 경험들이 모이고 공유되어 고민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부디 널리 널리 퍼지길.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를 발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