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Asia Safe Abortion Partnership x 셰어 Youth Advocacy Institute(YAI)가 열렸습니다!
아시아지역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파트너십(이하 ASAP)는 청소년/청년을 위한 역량강화 프로그램(이하 YAI)을 각 지역별, 각 국가별 파트너들과 지속적으로 열고있는데요, 한국에서는 셰어와 함께 6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개최하였습니다. 후기를 통해서 프로그램 내용과 의미를 공유하고 열기 가득했던 시간과 참가자들의 소감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아래의 3가지로 설명할 수 있어요.
1. 젠더, 성, 재생산권리, 그리고 인권 문제로서의 의료 접근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갖춘 훈련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권리 옹호자 커뮤니티를 구축합니다.
2. 역량 강화 및 지속적인 멘토링을 통해 권리 옹호자들이 소셜 미디어 및 기타 지역 사회 차원의 네트워킹과 소통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3. 의료적 임신 중절을 포함한 의료 서비스 접근성 향상을 위한 효과적인 옹호 활동을 위해, 권리 옹호자들이 지역 사회 내외에서 지속적으로 참여하도록 지원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수료생들은 지역, 국가 및 지역 차원에서 이러한 담론에 대해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공동체에 참여하고, 온라인 네트워크와 관련 회의 참여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참여하도록 지원받습니다.
해외에서도 한국에서 열리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원하는 이가 있었는데 비자 발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성사되지 못했고, 한국에 거주하는 유학생 이주민을 포함해 총 15명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ASAP의 코디네이터인 수치트라, 난디니와 셰어의 사무국은 ASAP 가 그간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지금 한국사회에서 유효하고 적실한 논의를 조화롭게 배치하기 위해서 머리를 모았습니다. 그 결과 3일동안 오전 10시부터 6시까지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이 만들어졌지만 모든 참여자들이 열정적으로, 주체적으로 참여하였고 중요한 토론과 참여자들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 길어져서 매일 프로그램을 조정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이 정말 참여자들과 생생하게 이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고 있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게 했어요.

3일간의 간략한 프로그램을 소개합니다.
첫번째 날, 환영인사와 기대나누기를 하면서 서로가 가진 경험과 고민을 이해하는 중요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치트라는 산부인과 의사이고 20년간 사회정의 운동에 참여해왔습니다. 15년 전에 안전한 임신중지를 논의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의료인들을 교육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국가에서 여전히 임신중지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룰 수 없고, 각각의 사회가 가진 금기들이 함께 작용하고 있기때문에 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러한 현지 프로그램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임신중지는 사회정의와 포괄되어야 하는 이슈이고 기후정의, 퀴어, 자율성, 민주주의와도 모두 연결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난디니는 인도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17년간 성과 젠더에 대해서 연구하며, 청소년, 성노동자, 퀴어들과 함께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운영해왔습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맞서기 위해서 일상적인 삶과 투쟁을 연결하고, 포용적 운동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사회적 약자와 함께 만들어나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난디니는 재생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퀴어, 이주민 등의 복합적인 정체성과 위치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참여자들도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어떤 이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가 아시아와 한국의 페미니즘을 연결하고 싶어서 참여했고, 어떤 이는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가 되기 위해서 언어를 공부하는 중에 참여했습니다. 분만실 등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현장에서 가진 고민과 질문을 풀어내며 퀴어 재생산에 대해서 알아가기 위해서 참여한 이도 있었고, 목사이자 상담사로 활동하면서 성과 재생산 이슈에 무지한 교회를 변화시키고 이와 관련한 고민을 가진 이들과 잘 만나기 위해서 참여한 이도 있었어요. 여성학을 전공하면서 성재생산 영역의 연구활동을 지속하는 이들도 여러명이 참여했고, 청소년 성/노동을 다루는 부라자라는 단체 활동가들도 두명이나 참여해서 중요한 경험과 질문을 나눠줬습니다. 사회학을 공부하고 홈리스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 레즈비언을 위한 단체에서 상담활동을 하는 심리학 전공자, 청소년 단체에서 활동하는 논바이너리 트랜스 활동가와 교육현장에서 일하면서 일하면서 본인의 임신중지 경험을 돌아보고 있는 이, 문화예술계에서 미투 운동을 경험한 이후 청소년성교육 활동가로 일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요약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위치와 경험, 고민을 가진 이들이 모였기에 함께 경험한 프로그램이 더욱 현실적이고, 깊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프로그램은 한국어와 영어가 사용되었는데요, 멋진 통역자들분 한나, 화, 휸님이 함께 했습니다. 통역 접근성을 마련하는 것은 소외되는 이가 없이 모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토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감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통역자의 노동이 소외되지 않는 것과도 연결되고, 통역자들이 이곳에서 나누는 지식과 실천의 지향에 공감하고 함께 하고자 할때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도 체감했습니다.



첫날엔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 이슈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 어떻게 구조적인 모순과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고, 가부장제를 인식하고 경험한 최초의 기억들을 참여자들과 나누면서 정말 깊은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실은 이런 시간을 미리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참여자가 공개적으로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바로 그 증언을 듣는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눈물과 한숨이 함께 했지만 안전한 공간에서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나눌 수 있어서 서로에게 감사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하고 다음 프로그램으로 이어갔습니다.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인권규범과 인권운동의 방법을 이해하기 위한 인식론적 접근법에 대해서 제안했습니다. 필요한 사람이 자신의 피해에 기반해서 증명하고 요구할때 시혜적으로 베푸는 방식이 아니라 권리에 기반해서 모두에게 보장되는 방식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권리가 부정되는 것은 부정의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국가에게 있고, 권리보장은 자격, 능력, 피해유무,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어서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해서 조별로 토론하면서 정의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이를 위해서 무엇을 보장되어야 하는지, 지금 누가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동의를 실질화하는 것, 장애인과 성노동자의 경험이 반영되는 것, 정보접근성과 서비스 이용권,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범죄화되지 않을 권리에서 차별받는 이들이 누군지를 살펴보면서 이러한 문제들이 건강과 권리에 얼마나 긴밀한지 느낄 수 있었어요.


첫날 마지막 프로그램으로는 특권걷기를 했습니다. 각자는 자신에게 부여된 위치가 담긴 종이를 받아들었습니다. 나이, 계급, 학력, 가족상황, 장애유무, 이주/난민 등 다양한 위치가 부여되었는데 이 상황에서 진행자가 던지는 질문을 듣고 자신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지 판단해서 한 걸음씩 나오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성행위와 피임에 대한 정보가 있는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파트너에게 요구할 수 있는지, 필요한 공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임신중지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지 등을 질문했을때 단 한걸음도 나오지 못한 이들과 모든 질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이동한 사람들을 서로가 확인할 수 있었어요. 난디니는 이 프로그램 이름이 특권걷기이긴 하지만 맨 앞으로 나온 사람 개인이 특권을 소유했다고 하기만은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를 특권으로 만든 구조를 문제삼아야만 한다는 것이 핵심인데요, 더 질문해야 할 것은 자신이 한걸음씩 걸어나올 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을 느끼고 있었는지, 뒤돌아보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특권은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닐 수 있지만, 내 위치를 인식하면서 뒤에 남겨진 이들과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실천이자 책무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함께 바꾸어야 할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계속 질문하면서 남은 시간들을 보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두번째 날 다시 만났습니다.
어제를 돌아가면서 회고했고 각자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후기를 적기도 했고, 저녁에 만난 친구와 파트너에게 배운 것을 전하면서 토론을 이어가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습니다.
둘째날은 각자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관을 그려보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성별을 정의하는 각자의 방식, 생식기관을 상상하는 각자의 방식이 잘 드러난 작업이었어요. 자신의 외부 성기를 관찰한 적이 없는 사람, 자궁과 난소 등 해부학적인 지식이 강한 기억으로 남은 사람, 자신과 다른 성별의 생식 기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본적이 없는 사람 등 다양했습니다. 수치트라는 임신중지권리를 옹호하는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지식, 해부학적 지식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비판적인 관점까지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지식은 정확한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고, 비/반과학적인 주장을 하는 정치인과 관료를 상대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수치트라는 생식기관이 하반신에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뇌를 잊지 말자고 제안했습니다. 뇌에서 보내는 신호, 호르몬의 작용이 몸 전체와 함께 작동하는 것이죠. 월경의 메커니즘, 임신과 출산, 피임의 다양한 방법과 과정, 임신을 원하는 이유와 원치 않는 이유, 임신중지를 위한 다양한 방법과 과정에 대해서 의학적인 지식을 갖추어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점심식사 후에는 열띤 토론이 이어졌는데요 각자에게 가치를 질문하고, 왜 그런 가치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를 나누면서 입장의 변화가 있는지, 서로를 설득할 수 있는지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때리더라도 남편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남편과 함께 있어야 한다.
HIV에 감염된 여성은 아이를 가져서는 안된다.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은 생명을 끝내는 것이다.
자녀의 성별을 선택하는 것은 재생산 권리다.
총 네가지의 가치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1번과 2번은 참여자 모두가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토론하면서 이 가치에 동의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어떤 논리로 설득할 수 있을지 논의했는데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정확한 정보와 통계도 필요했고, 당장 반대파를 완전히 설득할 수 없다면 어떤 지점부터 타협하면서 긴급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고려도 필요했어요.
3번과 4번은 참여자들간의 의견이 갈렸고, 토론도 팽팽했습니다. 저 명제 자체에 판단이 들어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 저 명제는 중립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달랐고 이 명제가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맥락과 개인에게 당면한 문제로 놓여졌을때 고민하게 되는 지평이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을 권리로 호명할 것인지, 국가가 무엇을 규제하고 범죄화하는 논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질문하는 것이 매우 핵심적이라는 것에는 뜻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저 명제가 중립적일 수 있다면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를 고민하는 당사자에게 낙인과 판단을 제거하고 어떤 조력과 지원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권리로 규정하고, 무엇을 공공성에서 담보하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논쟁하고 확장하는 작업 또한 필요하다는 점을 공감했습니다.
두번째날 마지막 프로그램은 “한국의 임신중지에 관한 현재의 상황과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우리의 요구”라는 제목으로 혜원 사무국장의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마침 당일에 긴급히 청소년 임신중지를 지원해야 하는 일이 있어 병원에 동행 지원을 다녀오기도 했는데요, 셰어에서는 지금 청소년, 이주민/난민 임신중지 기금 지원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관련된 상담과 동행, 정보제공, 비용 지불, 또다른 사회적 자원 연결 등의 활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혜원 사무국장은 임신중지 상담과 지원을 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임신중지 당사자의 고민과 경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전혀 동일할 수 없고, 한 사람 안에서도 수없이 고민하고 바뀌는 과정을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조력자의 감정과 경험 또한 요동친다는 것을 전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아기’라는 표현이 부적절하지만, 어떤 이는 그 단어를 적극적으로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생명’과 같은 개념을 각자가 정의하고 경험하는 방식 또한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도 짚었습니다. 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임신중지 당사자는 안전하고 건강하게 이 과정을 마칠 수 있어야 합니다. 후반부에는 임신중지가 2021년 1월 1일부터 비범죄화되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체감하는지 참여자에게 질문했습니다. 임신중지를 그 전에, 그 이후에 경험한 사람은 확연히 차이가 체감된다는 점을 이야기했고, 의료현장에 있는 참여자도 점차 임신중지 경험이 이전과 달리 의료서비스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전했습니다. 유산유도제가 도입되지 않아서 발생하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참여자들은 다양한 문제를 짚었습니다. 특히 이 문제가 취약성을 가진 사회구성원에게 특별히 나쁜 영향을 준다는 점을 공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형적인 케이스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본인에게도 있었던 임신중지 당사자에 대한 이미지가 실제로 상담과 조력을 하면서 깨어나가는 것을 경험하면서 각자가 가진 사회적 위치와 관계,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이 교차하는 경험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임신중지 경험 또한 이후의 삶에 교차적인 요소 중 하나로서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주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 밝았습니다.
어제와 같이 둘째날을 회고하는 시간으로 시작했습니다. 참여자들은 어제 있었던 토론의 경험,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바꾸었던 나름의 힘들었던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와 정의를 새롭게 고민하는 시간이라는 이야기들을 전했습니다. 앞으로 다른 입장을 만났을때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까지 연결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여럿이었습니다. “임신중지 권리 옹호자로서 활동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가치 판단을 수정하고 갱신하고 번복하는 과정을 계속 하면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와 권리에 대한 중심을 잡아나가는 활동”이라고 정리해준 이도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변화되는 자신을 느끼는 것을 통해 잠재력을 느낀다고 전해준 이도 있었고 토론과 강의를 통해서 단순하지 않은 복잡한 결을 이해하고, 그 복잡함을 안고 갈 수 있게 되어서 소중하다는 말도 전해주었습니다. 수치트라는 정서적, 감정적으로 안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에게도 의식적으로 그런 존재가 되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조력하는데 에너지를 쓰는 만큼 스스로에게도 그것을 제공하고, 그것을 위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주었어요.

그 다음으로는 에브리바디 플레져랩 타리 팀장이 HIV감염인, 이주민, 성노동자와 임신중지 범죄화 사이의 연관성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한국에서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되어 있지만 사회에 반한다고 여겨지는 어떤 속성으로 인해서 범죄화되는 억압을 경험하는 이들은 전반적인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가 침해될 수밖에 없는 연결성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HIV감염인, 이주민, 성노동자를 범죄화하는 국가의 시각은 위생, 정조, 사회정화, 사회보호라는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매개로 형성되어 왔고 의료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에 기반한 정책을 펼치기 보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들을 통제하고 단속하는 방식으로 통치를 해왔습니다. 성노동자를 처벌하고, 군형법을 통해서 동성간의 성행위를 범죄화하고, 전파매개행위죄를 통해서 HIV감염인에게 성적낙인과 사회적 처벌을 만들어내는 법들을 살펴보면서 성풍속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 안에 간통죄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성적 권리와 임신중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고민해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임신중지로 실제로 처벌받은 사람은 가족질서와 성규범을 위반한다고 여겨진 사람들과 겹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점심식사를 하고 난디니의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범죄와 법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임신중지 범죄화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었는데요, 앞선 강의와 흐름이 이어지면서 깊이를 더할 수 있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실정법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지배질서 논리를 담고있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사법정의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질문들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북미의 노예제 폐지 투쟁이 교도소 폐지 투쟁으로 이어지는 흐름, 당연히 범죄였던 것이 비범죄화 되기 위해서 했던 많은 인권 투쟁들을 짚었습니다. 감금과 통제의 방식은 한 국가 안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통치하는 방식이었고 이것이 제도적인 탈식민화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점, 종교가 정치와 분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가지 굴절을 만들어낸다는 점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국경을 당연시하는 것도 최근의 일이라는 점, 신분제도가 남아있는 인도의 사례를 들면서 구체적으로 얼마나 범죄화가 차등적으로 적용되는지 예시를 들어주었고 한국사회를 분석하기 위한 틀을 우리 스스로 고민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감옥과 경찰을 사랑하는 페미니스트란 모순이라는 점을 타리와 난디니 모두 지적하며, 권리와 ‘보호’를 통제와 관리가 아닌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페미니즘의 과업이라는 점도 제안했습니다.



마지막 토론은 3조로 나눠서 각 조별로 나라의 정부 혹은 위원회를 담당합니다. 이들은 몇시간 안에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할 사람 3명만을 골라내야 하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과업을 받았습니다. 의회가 “성비감소로 인해 의회는 모든 임신중지를 불법화하는 법안을 제정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위원회는 각각의 사정을 읽고 긴급성 등의 기준을 정해서 결과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각 조에서는 어렵지만 책임감을 가지고 우선순위를 정하고자 애썼습니다. 어떤 조는 폭력 여부를 보았고, 지속적인 돌봄이 가능한지, 명예살인의 우려가 있는지를 판단했고 다른 조는 당사자의 명확한 의사를 가장 우선에 두었습니다. 또다른 조는 당사자의 적극적인 의지를 보고, 사회적인 조건이 열악한지를 판단했습니다. 모두 우선순위를 정하거나 한 명만 지원 대상으로 정하기가 어려워 매우 괴로워하면서 토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는 함정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지원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쉽게 동의할 수 없음에도 해야할 것 같은 과업이 주어졌을 때 그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보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수치트라는 각 조별 토론 내용과 이유를 모두 경청한 후, 애초에 의회가 임신중지를 불법화하는 법안을 제시하는 이유가 부당한데 그에 대한 개입을 하기보다 주어진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 지점에 대해서 지적했고, 다들 탄식했습니다. 좁은 선택지 중에서 사람들의 사정을 판단할때 권리기반이 아니라 필요기반으로 판단하게 된다는 점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자신이 권력에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경험하는 의도였다는 점을 설명했는데요, 자신에게 권력과 권한, 책임이 주어졌을때 어떻게 그것을 수행하려고 하는가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누군가를 대신해서 결정해야 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을 때 오늘의 상황을 기억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권력을 의심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내가 동의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요. 참여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해악을 최소화하는 결정을 내리려고 애썼고, 내상을 입기도 했지만 강렬한 기억을 남긴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정말 마지막 프로그램은 각자가 30분간 각자가 말하고 싶은 바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영상, 그림, 글을 통해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컨텐츠를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충격의 에너지를 생산적인 활동으로 전환시켜볼 수 있었어요. 밈을 차용해서 임신중지를 알린 사람, 집단 활동을 통해서 대안적인 기도문을 작성한 조, 자신의 운동이 시작된 계기와 현재를 담은 포스터를 제작하고 발표하면서 눈물짓게 한 사람, 단체 활동을 알리는 영상을 만든 사람, 네컷짜리 만화를 만들어낸 사람, 임신중지를 지원하는 부모모임이라는 가상 모임을 만들어 홈페이지까지 제작한 사람, 정확한 임신중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카드뉴스를 만든 사람 등 모두가 엄청난 결과물을 만들어주었어요. 사진으로 확인해보세요!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수료증을 전달하면서 3일간의 여정을 자축했습니다. 진행자, 통역자, 참여자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며, 진심으로 앞으로의 활동을 응원하고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나가자고 약속했습니다. 앞으로 이 분들의 활약을 기대해주세요!



참여자들의 후기
김민솔 님
ASAP와 셰어가 함께한 이 프로그램은 참여자들이 임신중지 권리 지원과 옹호자로서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두고 운동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향점을 알려주었습니다. “임신 중지를 한 여성은 생명을 끝내는 것이다.” , “(태아의)성별을 선택하는 것은 여성의 재생산 권리이다.” 라는 문장을 제시받고, 사람들은 해당 문장이 가진 뜻이 ‘동의하는지’에 관해 몇 시간을 내리 토론했습니다. 나의 언어가 미숙할 수 있음에도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용기 내어 말했습니다. 이 공간이 안전하다는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가 노력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소나무처럼 대쪽 같은 취향에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입니다. 토론에서 저는 제 입장을 한 다섯 번은 변경한 것 같습니다. 본인의 편견을 마주하고 바꾸는 것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느꼈을 것입니다. 예컨대 저는 처음에 ‘임신 중지는 생명을 끝내는 행위가 아니다’라는 입장이었으나, 모든 인간과 동물은 매일매일 다른 생명을 끝내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을 끝내는 것임에도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도달하기까지 참 힘들었습니다. 토론장 바깥에서 타인의 편견을 마주하는 일은 더욱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기에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임신 중지를 넘어, 운동(exercise 아닌 movement)의 가치와 전략에 대한 고찰은 괴로우면서 새로웠고,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현재 시점의 제게 좋은 참조점이 되었습니다. 수용시설과 이주민, 트랜스, 성노동자에 관한 의제 또한 간밤에 미국에서 일어난 구금과 팔레스타인과 활동가들이 쓰고 있던 케피예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왕관흠 님
저는 최근 ASAP 안전한 임신중지 워크숍에 참가하였습니다. 이번 워크숍은 제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경험 많은 성숙한 사회운동가들과 함께 참여한 체계적인 활동이었기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회운동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중국에서는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지만, 그 수준은 천차만별이었고 직면하는 문제들도 복잡하여 오랜 시간 동안 혼란과 막막함을 느꼈습니다.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길 바랐지만, 동료들을 어떻게 모아야 할지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추천으로 Share를 알게 되었고, 이전부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주로 행사 후기만 접했을 뿐 실제로 참여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번에 영어 통역이 제공되고 신청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알게 되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번 워크숍에 참여하게 되어 한국의 상황을 직접 접할 수 있었습니다. 각 참가자들은 오랜 활동 경험을 가진 활동가로서 다양한 경험을 공유해 주었고, 한국의 사회적 맥락 또한 중국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부적인 내용들을 통역 선생님의 도움을 통해 즉시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언어 장벽으로 인해 실시간으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많은 소통의 기회를 놓친 경험이 많았기에 이번 경험은 더욱 값졌습니다.
휴식 시간 동안 다른 참가자들과 한국의 사회운동 경험과 상황에 대해 대화한 것도 저에게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ASAP 선생님들의 교육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중국의 사회운동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단순한 홍보와 교육, 정적인 활동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영향력을 확장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결과와 효과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사회 현실을 이해하고 소규모의 연결을 형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보다 광범위하고 견고한 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워크숍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중국에서 여성 권리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조직할 계획입니다. 또한 앞으로 보다 넓은 페미니즘 사회운동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길 희망합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반복적인 활동을 거쳐 보다 넓고 강력한 연대의 힘을 만들어 나가고자 합니다.
김가현 님
ASAP 프로그램은 3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제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밀도 높은 시간이었습니다. 가부장제와 인권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시작으로, ‘특권 걷기’를 통해 제가 가진 위치와 조건을 돌아보았고, 태아의 성별 선택과 임신중지를 둘러싼 정치적·윤리적 쟁점, HIV, 성매매, 재생산권의 교차성 등 다양한 주제들을 깊이 있게 탐구했습니다.
특히, 국가가 ‘성적 일탈’로 간주해온 존재들을 어떻게 규율하고 통제해왔는지, 그 통제가 재생산의 장에서는 어떻게 작동해왔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은 인상 깊었습니다. 이를 통해 재생산권이 단순한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의료와 법 제도, 사회문화적 규범 등 삶을 둘러싼 구조적 맥락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참가자들과 함께 임신중지 콘텐츠를 기획하며 이를 입체적으로 탐색할 수 있었던 경험 또한 매우 의미 있었습니다.
ASAP 프로그램은 저의 간호사로서의 임상 경험과도 깊이 교차되었습니다. 분만실에서 근무할 당시, 임신중지는 '되도록 피하고 싶은 일'로 여겨졌고, 막연한 불쾌감과 죄책감을 동반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임신중지를 둘러싼 사회적 낙인과 도덕적·문화적 기준의 혼재가 만들어낸,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껄끄러운 감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ASAP 프로그램을 통해, 임신중지는 개인의 삶에 밀접하게 연결된 중요한 권리이며 그 선택이 온전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다시금 분명히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ASAP 프로그램을 통해 저는 한국의 의료 현실을 되돌아보기도 하였습니다. 2020년 낙태죄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중지는 여전히 비급여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안전한 시술이나 정확한 정보에 대한 접근성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의료 현장에서는 성적 낙인으로 인해 시술을 아예 받지 못하거나,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라 과도한 비용 부담이 발생하는 일이 잦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재생산 건강에 대한 공적 책임의 부재와 맞물려, 많은 이들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제약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재생산권에 대한 성찰은 저로 하여금 ‘안전하게 출산할 권리’ 또한 되새기게 했습니다. 최근 전공의 파업으로 인해 위급한 산모가 분만 병원을 찾지 못해 헬기로 이송되거나, 구급차 안에서 출산하는 사례들, 그리고 제가 몸담았던 병원에서도 고위험 산모의 전원 요청을 반복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임신중지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재생산권 전반이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저는 그 무엇보다 ASAP 프로그램을 통해, 단일한 권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권리는 서로 교차하고 맞물리는 지점에서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복잡한 감정과 생각들, 그리고 끊임없이 되새기게 된 질문들은 ASAP 프로그램에서 만난 참여자들과 나눈 고민들과 맞물리며, 앞으로 저의 연구와 실천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참조점이 될 것입니다.
저는 임상 현장이든, 연구든, 혹은 정책 논의가 이루어지는 장이든, 임신중지를 둘러싼 담론과 제도적 흐름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요구하고 개입하는 활동을 통해 제 자리에서 가능한 실천을 지속적으로 모색해 나갈 계획입니다. 재생산 정의를 위한 옹호 활동 또한 멈추지 않고 이어가겠습니다.
ASAP, 그리고 SHARE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예진 님
멋진 다양한 여성들과 사람들과... 엄청났다..... 구성이 천재적으로 알찼습니다. (거의 집단 테라피 + 워크숍 + 강연 + 깨닫기 + 토론 등 + 끈끈한 동료애까지) 모두가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신 통역 선생님들, 그리고 퍼실리테이트 해 주신 셰어 선생님들, 각종 간식과 비건 식사에 감사합니다. 여성의 몸과 건강부터 재생산정의까지, 모르고 있던 많은 걸 실질적으로 압축적으로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유익했습니다. 여기서 이번에 제가 배운 것들을 앞으로 다양한 곳에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배워나가고 계속 부당한 구조에 맞서 싸우고 목소리 내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영어로 들었더니 왠지 번역체처럼 쓰게 되네요..^^;) 다들 사랑해요.
강의영 님
후기에 어떤 내용을 남길까 고민하다가, 기억나는 두세 개의 순간들을 적어봅니다. 가장 먼저, 첫날 첫 시간에 임신중지에 관한 사전지식을 묻는 설문에 답했던 게 생각납니다. 나름 스스로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지낸 기간이 꽤 길고, 또 임신중지 권리보장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 쉽게 문제를 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질문에 답하기가 어려워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임신중지는 여성의 권리인지 등, 가치와 관련된 질문에는 거침없이 답할 수 있었는데 소파술은 안전한지, 진공흡입술이 무엇인지와 같은 실질적인 지식이 필요한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워크숍을 시작하기도 전에 내가 임신중지를 정말 나와 내 친구들, 동료 여성들의 시급하고 절실한 고민으로 여긴 적이 있던지 자문했습니다. 임신중지에 대해 정치적 의제로서는 추상적으로 고민을 해 보았어도, 실제 임신중지가 필요한 상황일 때 어떤 여성이 어떤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지, 어떻게 안전한 상황에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을 안 해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스스로 와 너무 별로다..ㅎㅎ라고 생각하면서 워크숍 기간동안 새롭고 다양한 지식, 상황, 고민들을 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3일 간의 기간을 통해 그런 기회를 셰어와 ASAP 덕에 얻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둘째 날, 임신중지와 관련된 여러 명제들에 대해 서로 동의/비동의를 표하고 활발히 의견을 나눴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첫째 날 상당한 양의 페미니스트 토크를 하면서 거의 모든 의제에 대해 참여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는데, 둘째 날 이 활동을 하면서 사실 우리가 조금씩 다른 맥락과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특히 ‘태아의 성별이나 장애 상태를 확인하고 임신중지를 결정한 경우도 여성의 권리 행사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많이 갈렸는데, 어떤 의견이 더 타당한지 아닌지를 떠나 이 질문을 두고 각자의 상황에서 다양한 생각을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평가받을 것이라는 걱정 없이 의견을 나눴던 게 오랜만이기도 했고, 또 장애운동, 여성운동, 재생산정의 운동 등 다양한 정치적 견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발생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본 기분이었어요. 저는 장애운동에 관심이 있는 편인데, 그래서인지 장애선별에 대해 그저 나쁜 것, 억압적인 것으로 이해해 왔어요. 여전히 장애선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기는 하지만 만약 어떤 여성이 특정한 맥락 위에서 장애와 관련하여 임신중지를 택할 때, 그리고 그것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연결된 맥락일 때, 나는 페미니스트로서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을 지와 같은 복잡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많은 운동들이 필요에 의해 더 간결하고 강력한 입장을 취하고, 그래서 그 입장이 때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절대적인 기치로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그치만 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도 사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고, 각자의 맥락 위에서 각자의 필요를 갖고 있다는 점, 그래서 여러 맥락들이 교차할 때 복잡다단한 불일치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일치를 섣불리 평가하지 않고 함께 말하고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3일간 다른 참가자분들, 셰어-ASAP 활동가분들과 다양한 경험들을 끊임없이 나눴던 것이 많이 기억에 남습니다. 세션 중 나눈 이야기도, 세션 중간중간 쉬며 나눈 이야기도 일상 중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 같아요. 안전한 공간에서 그간의 삶과 힘듦과 고민과 슬픔과 빡침(?)을 나눠본 것이 저는 처음이었습니다. 워크숍이 끝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는데,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서 많이 기뻐요. 자주 연락하고 놀고 또 다른 활동이 있으면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셰어와 ASAP 활동을 열심히 지켜보며 참여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꼭 다시 참여하겠습니다.
요컨대 3일 간의 워크숍은 ‘임신중지는 여성의 선택’이라는 말 아래에 꽤 복잡하고 어려운, 그러나 고민할 가치가 있는 맥락들이 있다는 걸 깨닫는 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간의 단순했던 저의 이해를 반성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배우고 고민하고 알려야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어요. 의미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도시락이 너무 맛있었어요..S2..
이영희 님
3일 동안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동했던 YAI 프로그램은 한국의 맥락에서, 거기서 나아가 아시아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임신중지 권리 옹호 활동가의 역할과 방향성을 배웠던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달성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럼에도 지켜내야 할 가치와 권리가 무엇인지 새기고, 합법화와 비범죄화는 결코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 존재의 규범을 계속해서 나열하며 범죄화를 멈추지 않는 체제를 균열시키기 위한 나의 역할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러 순간이 기억에 남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워크숍 내내 중요하게 가져간 이슈는 나의 위치성이었다. 워크숍 구성원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각기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대부분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삶 속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시민단체 활동과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지만 ‘미투운동’을 통과하여 여성학을 공부한 나의 위치는 많은 경계들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개념어와 지식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순 있어도 그 지식이 현장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어떤 상황과 존재 앞에서 그 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걸 (또다시) 알아차리는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활동가들과 관계 맺고 교류하는 시간은 나의 좁았던 시야와 세계를 놀라울 정도로 넓혀준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다양한 주제와 이슈를 두고 각자의 위치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며 불일치와 연합을 반복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겼던 우리 안의 차이를 알아차리고, 언제나 의견이 일치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서로의 안녕한 삶을 바라며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을 ASAP의 Suchitra, Nandini와 함께했기에 나의 문제, 나의 세계를 넘어 전 지구적 맥락 안에서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에 대해 사유할 수 있었다. 워크숍은 끝났지만, 우리의 고민과 투쟁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되었음을 느낀다. 삶과 공동체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자원은 누구의 삶을 파괴하면서 ‘특권’이 되는가? 범죄화와 차별을 전제로 하는 체제 안에서 권리 보장은 ‘가치’만을 끈질기게 주장한다고 해서 실현 가능한 것인가? ‘권리’ 개념을 확장하고 넓히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통해 이어진 논의는 워크숍에서 가장 중요했던 내용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거리의 투쟁은 의사결정권자와의 협상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 객관적인 데이터와 사실에 기반한 협상이 수반돼야 한다는 것, 하지만 권리 보장의 대전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허용’과 ‘금기’를 구분하며 권리를 제한하는 체제와 권력에 계속해서 맞서야 한다는 것. ‘협상’과 ‘설득’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과 반발심이 나 또한 있었지만, 공공기관에서 일하면서 가부장적 권력이 집요하게 탐욕스러우면서도 무서우리만치 건조하게 작동하는 방식을 직간접적으로 보아왔기에 더욱 냉정하게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마 평생의 숙제가 아닐까. 재생산은 연구자로서의 주요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내 삶을 더 나은 방식으로 지속해 가기 위한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워크숍은 삶의 방향과 경로를 다시금 다잡을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이자 변곡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 성적 존재이자 재생산하는 존재로서 안온한 삶을 이어갈 수 있기를, 누구에게도 침범당하지 않는 삶과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여 본다.
혜림 님
셰어와 ASAP 권리옹호 과정을 나누며
셰어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은 항상 아주 알차다. 오전시간부터 저녁까지, 꽉 채워 보내는 시간 중에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은 없다. 3일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처음 만나는 참여자들과 아주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소중했다. 어느 공간이든 진실한 의견 나눔의 장은,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때에만 비로소 이루어진다. 내가 이번 세션에 참여하며 가장 좋았던 점을 꼽는다면, 먼저 참여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것. 그리고 내가 가진 편견과 고정관념을 마주할 수 있는 자리였다는 것. 나 역시 내가 깨닫지 못하는 권력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약간의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 쉽게 약자였던 순간을 잊게 되는 것 같다. 여러 고민되는 지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한 개인이 당연히 누려야 마땅한 것으로 옹호하는 것... 어렵지만 또 아주 못 할 상상은 아닌 것 같다. 나의 단단한 벽을 허물 수 있는 이런 시간이 자주 있으면 좋겠다.
[후기] Asia Safe Abortion Partnership x 셰어 Youth Advocacy Institute(YAI)가 열렸습니다!
아시아지역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파트너십(이하 ASAP)는 청소년/청년을 위한 역량강화 프로그램(이하 YAI)을 각 지역별, 각 국가별 파트너들과 지속적으로 열고있는데요, 한국에서는 셰어와 함께 6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개최하였습니다. 후기를 통해서 프로그램 내용과 의미를 공유하고 열기 가득했던 시간과 참가자들의 소감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아래의 3가지로 설명할 수 있어요.
1. 젠더, 성, 재생산권리, 그리고 인권 문제로서의 의료 접근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갖춘 훈련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권리 옹호자 커뮤니티를 구축합니다.
2. 역량 강화 및 지속적인 멘토링을 통해 권리 옹호자들이 소셜 미디어 및 기타 지역 사회 차원의 네트워킹과 소통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3. 의료적 임신 중절을 포함한 의료 서비스 접근성 향상을 위한 효과적인 옹호 활동을 위해, 권리 옹호자들이 지역 사회 내외에서 지속적으로 참여하도록 지원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수료생들은 지역, 국가 및 지역 차원에서 이러한 담론에 대해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공동체에 참여하고, 온라인 네트워크와 관련 회의 참여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참여하도록 지원받습니다.
해외에서도 한국에서 열리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원하는 이가 있었는데 비자 발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성사되지 못했고, 한국에 거주하는 유학생 이주민을 포함해 총 15명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ASAP의 코디네이터인 수치트라, 난디니와 셰어의 사무국은 ASAP 가 그간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쌓아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지금 한국사회에서 유효하고 적실한 논의를 조화롭게 배치하기 위해서 머리를 모았습니다. 그 결과 3일동안 오전 10시부터 6시까지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이 만들어졌지만 모든 참여자들이 열정적으로, 주체적으로 참여하였고 중요한 토론과 참여자들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이 길어져서 매일 프로그램을 조정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이 정말 참여자들과 생생하게 이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고 있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게 했어요.
3일간의 간략한 프로그램을 소개합니다.
첫번째 날, 환영인사와 기대나누기를 하면서 서로가 가진 경험과 고민을 이해하는 중요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치트라는 산부인과 의사이고 20년간 사회정의 운동에 참여해왔습니다. 15년 전에 안전한 임신중지를 논의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의료인들을 교육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국가에서 여전히 임신중지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룰 수 없고, 각각의 사회가 가진 금기들이 함께 작용하고 있기때문에 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러한 현지 프로그램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임신중지는 사회정의와 포괄되어야 하는 이슈이고 기후정의, 퀴어, 자율성, 민주주의와도 모두 연결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난디니는 인도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17년간 성과 젠더에 대해서 연구하며, 청소년, 성노동자, 퀴어들과 함께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운영해왔습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맞서기 위해서 일상적인 삶과 투쟁을 연결하고, 포용적 운동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사회적 약자와 함께 만들어나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난디니는 재생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퀴어, 이주민 등의 복합적인 정체성과 위치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참여자들도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어떤 이는 제주 강정마을에서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가 아시아와 한국의 페미니즘을 연결하고 싶어서 참여했고, 어떤 이는 다양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가 되기 위해서 언어를 공부하는 중에 참여했습니다. 분만실 등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현장에서 가진 고민과 질문을 풀어내며 퀴어 재생산에 대해서 알아가기 위해서 참여한 이도 있었고, 목사이자 상담사로 활동하면서 성과 재생산 이슈에 무지한 교회를 변화시키고 이와 관련한 고민을 가진 이들과 잘 만나기 위해서 참여한 이도 있었어요. 여성학을 전공하면서 성재생산 영역의 연구활동을 지속하는 이들도 여러명이 참여했고, 청소년 성/노동을 다루는 부라자라는 단체 활동가들도 두명이나 참여해서 중요한 경험과 질문을 나눠줬습니다. 사회학을 공부하고 홈리스 현장에서 활동하는 이, 레즈비언을 위한 단체에서 상담활동을 하는 심리학 전공자, 청소년 단체에서 활동하는 논바이너리 트랜스 활동가와 교육현장에서 일하면서 일하면서 본인의 임신중지 경험을 돌아보고 있는 이, 문화예술계에서 미투 운동을 경험한 이후 청소년성교육 활동가로 일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요약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위치와 경험, 고민을 가진 이들이 모였기에 함께 경험한 프로그램이 더욱 현실적이고, 깊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프로그램은 한국어와 영어가 사용되었는데요, 멋진 통역자들분 한나, 화, 휸님이 함께 했습니다. 통역 접근성을 마련하는 것은 소외되는 이가 없이 모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토론에 참여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하는데 필수적이라는 감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통역자의 노동이 소외되지 않는 것과도 연결되고, 통역자들이 이곳에서 나누는 지식과 실천의 지향에 공감하고 함께 하고자 할때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도 체감했습니다.
첫날엔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 이슈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 어떻게 구조적인 모순과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고, 가부장제를 인식하고 경험한 최초의 기억들을 참여자들과 나누면서 정말 깊은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실은 이런 시간을 미리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참여자가 공개적으로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서 바로 그 증언을 듣는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또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눈물과 한숨이 함께 했지만 안전한 공간에서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나눌 수 있어서 서로에게 감사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하고 다음 프로그램으로 이어갔습니다.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인권규범과 인권운동의 방법을 이해하기 위한 인식론적 접근법에 대해서 제안했습니다. 필요한 사람이 자신의 피해에 기반해서 증명하고 요구할때 시혜적으로 베푸는 방식이 아니라 권리에 기반해서 모두에게 보장되는 방식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함께 공유했습니다. 권리가 부정되는 것은 부정의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국가에게 있고, 권리보장은 자격, 능력, 피해유무,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어서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해서 조별로 토론하면서 정의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이를 위해서 무엇을 보장되어야 하는지, 지금 누가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동의를 실질화하는 것, 장애인과 성노동자의 경험이 반영되는 것, 정보접근성과 서비스 이용권,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범죄화되지 않을 권리에서 차별받는 이들이 누군지를 살펴보면서 이러한 문제들이 건강과 권리에 얼마나 긴밀한지 느낄 수 있었어요.
첫날 마지막 프로그램으로는 특권걷기를 했습니다. 각자는 자신에게 부여된 위치가 담긴 종이를 받아들었습니다. 나이, 계급, 학력, 가족상황, 장애유무, 이주/난민 등 다양한 위치가 부여되었는데 이 상황에서 진행자가 던지는 질문을 듣고 자신이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지 판단해서 한 걸음씩 나오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성행위와 피임에 대한 정보가 있는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파트너에게 요구할 수 있는지, 필요한 공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임신중지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지 등을 질문했을때 단 한걸음도 나오지 못한 이들과 모든 질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이동한 사람들을 서로가 확인할 수 있었어요. 난디니는 이 프로그램 이름이 특권걷기이긴 하지만 맨 앞으로 나온 사람 개인이 특권을 소유했다고 하기만은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를 특권으로 만든 구조를 문제삼아야만 한다는 것이 핵심인데요, 더 질문해야 할 것은 자신이 한걸음씩 걸어나올 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을 느끼고 있었는지, 뒤돌아보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가진 특권은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닐 수 있지만, 내 위치를 인식하면서 뒤에 남겨진 이들과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실천이자 책무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함께 바꾸어야 할 구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계속 질문하면서 남은 시간들을 보내자고 이야기했습니다.
두번째 날 다시 만났습니다.
어제를 돌아가면서 회고했고 각자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후기를 적기도 했고, 저녁에 만난 친구와 파트너에게 배운 것을 전하면서 토론을 이어가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었습니다.
둘째날은 각자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관을 그려보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성별을 정의하는 각자의 방식, 생식기관을 상상하는 각자의 방식이 잘 드러난 작업이었어요. 자신의 외부 성기를 관찰한 적이 없는 사람, 자궁과 난소 등 해부학적인 지식이 강한 기억으로 남은 사람, 자신과 다른 성별의 생식 기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본적이 없는 사람 등 다양했습니다. 수치트라는 임신중지권리를 옹호하는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지식, 해부학적 지식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비판적인 관점까지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지식은 정확한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고, 비/반과학적인 주장을 하는 정치인과 관료를 상대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수치트라는 생식기관이 하반신에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뇌를 잊지 말자고 제안했습니다. 뇌에서 보내는 신호, 호르몬의 작용이 몸 전체와 함께 작동하는 것이죠. 월경의 메커니즘, 임신과 출산, 피임의 다양한 방법과 과정, 임신을 원하는 이유와 원치 않는 이유, 임신중지를 위한 다양한 방법과 과정에 대해서 의학적인 지식을 갖추어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점심식사 후에는 열띤 토론이 이어졌는데요 각자에게 가치를 질문하고, 왜 그런 가치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를 나누면서 입장의 변화가 있는지, 서로를 설득할 수 있는지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때리더라도 남편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남편과 함께 있어야 한다.
HIV에 감염된 여성은 아이를 가져서는 안된다.
임신중지를 하는 여성은 생명을 끝내는 것이다.
자녀의 성별을 선택하는 것은 재생산 권리다.
총 네가지의 가치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1번과 2번은 참여자 모두가 동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토론하면서 이 가치에 동의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어떤 논리로 설득할 수 있을지 논의했는데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정확한 정보와 통계도 필요했고, 당장 반대파를 완전히 설득할 수 없다면 어떤 지점부터 타협하면서 긴급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고려도 필요했어요.
3번과 4번은 참여자들간의 의견이 갈렸고, 토론도 팽팽했습니다. 저 명제 자체에 판단이 들어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 저 명제는 중립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달랐고 이 명제가 사회적으로 유통되는 맥락과 개인에게 당면한 문제로 놓여졌을때 고민하게 되는 지평이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을 권리로 호명할 것인지, 국가가 무엇을 규제하고 범죄화하는 논리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질문하는 것이 매우 핵심적이라는 것에는 뜻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저 명제가 중립적일 수 있다면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를 고민하는 당사자에게 낙인과 판단을 제거하고 어떤 조력과 지원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권리로 규정하고, 무엇을 공공성에서 담보하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논쟁하고 확장하는 작업 또한 필요하다는 점을 공감했습니다.
두번째날 마지막 프로그램은 “한국의 임신중지에 관한 현재의 상황과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우리의 요구”라는 제목으로 혜원 사무국장의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마침 당일에 긴급히 청소년 임신중지를 지원해야 하는 일이 있어 병원에 동행 지원을 다녀오기도 했는데요, 셰어에서는 지금 청소년, 이주민/난민 임신중지 기금 지원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관련된 상담과 동행, 정보제공, 비용 지불, 또다른 사회적 자원 연결 등의 활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혜원 사무국장은 임신중지 상담과 지원을 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임신중지 당사자의 고민과 경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전혀 동일할 수 없고, 한 사람 안에서도 수없이 고민하고 바뀌는 과정을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조력자의 감정과 경험 또한 요동친다는 것을 전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아기’라는 표현이 부적절하지만, 어떤 이는 그 단어를 적극적으로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생명’과 같은 개념을 각자가 정의하고 경험하는 방식 또한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도 짚었습니다. 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임신중지 당사자는 안전하고 건강하게 이 과정을 마칠 수 있어야 합니다. 후반부에는 임신중지가 2021년 1월 1일부터 비범죄화되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체감하는지 참여자에게 질문했습니다. 임신중지를 그 전에, 그 이후에 경험한 사람은 확연히 차이가 체감된다는 점을 이야기했고, 의료현장에 있는 참여자도 점차 임신중지 경험이 이전과 달리 의료서비스의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전했습니다. 유산유도제가 도입되지 않아서 발생하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참여자들은 다양한 문제를 짚었습니다. 특히 이 문제가 취약성을 가진 사회구성원에게 특별히 나쁜 영향을 준다는 점을 공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형적인 케이스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본인에게도 있었던 임신중지 당사자에 대한 이미지가 실제로 상담과 조력을 하면서 깨어나가는 것을 경험하면서 각자가 가진 사회적 위치와 관계,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이 교차하는 경험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를, 임신중지 경험 또한 이후의 삶에 교차적인 요소 중 하나로서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주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 밝았습니다.
어제와 같이 둘째날을 회고하는 시간으로 시작했습니다. 참여자들은 어제 있었던 토론의 경험,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바꾸었던 나름의 힘들었던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치와 정의를 새롭게 고민하는 시간이라는 이야기들을 전했습니다. 앞으로 다른 입장을 만났을때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까지 연결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여럿이었습니다. “임신중지 권리 옹호자로서 활동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가치 판단을 수정하고 갱신하고 번복하는 과정을 계속 하면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와 권리에 대한 중심을 잡아나가는 활동”이라고 정리해준 이도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변화되는 자신을 느끼는 것을 통해 잠재력을 느낀다고 전해준 이도 있었고 토론과 강의를 통해서 단순하지 않은 복잡한 결을 이해하고, 그 복잡함을 안고 갈 수 있게 되어서 소중하다는 말도 전해주었습니다. 수치트라는 정서적, 감정적으로 안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에게도 의식적으로 그런 존재가 되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짚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조력하는데 에너지를 쓰는 만큼 스스로에게도 그것을 제공하고, 그것을 위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주었어요.
그 다음으로는 에브리바디 플레져랩 타리 팀장이 HIV감염인, 이주민, 성노동자와 임신중지 범죄화 사이의 연관성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한국에서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되어 있지만 사회에 반한다고 여겨지는 어떤 속성으로 인해서 범죄화되는 억압을 경험하는 이들은 전반적인 성과 재생산 건강과 권리가 침해될 수밖에 없는 연결성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HIV감염인, 이주민, 성노동자를 범죄화하는 국가의 시각은 위생, 정조, 사회정화, 사회보호라는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매개로 형성되어 왔고 의료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에 기반한 정책을 펼치기 보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들을 통제하고 단속하는 방식으로 통치를 해왔습니다. 성노동자를 처벌하고, 군형법을 통해서 동성간의 성행위를 범죄화하고, 전파매개행위죄를 통해서 HIV감염인에게 성적낙인과 사회적 처벌을 만들어내는 법들을 살펴보면서 성풍속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 안에 간통죄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성적 권리와 임신중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고민해볼 것을 제안했습니다. 임신중지로 실제로 처벌받은 사람은 가족질서와 성규범을 위반한다고 여겨진 사람들과 겹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점심식사를 하고 난디니의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범죄와 법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임신중지 범죄화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었는데요, 앞선 강의와 흐름이 이어지면서 깊이를 더할 수 있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실정법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지배질서 논리를 담고있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사법정의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질문들을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북미의 노예제 폐지 투쟁이 교도소 폐지 투쟁으로 이어지는 흐름, 당연히 범죄였던 것이 비범죄화 되기 위해서 했던 많은 인권 투쟁들을 짚었습니다. 감금과 통제의 방식은 한 국가 안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통치하는 방식이었고 이것이 제도적인 탈식민화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점, 종교가 정치와 분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가지 굴절을 만들어낸다는 점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국경을 당연시하는 것도 최근의 일이라는 점, 신분제도가 남아있는 인도의 사례를 들면서 구체적으로 얼마나 범죄화가 차등적으로 적용되는지 예시를 들어주었고 한국사회를 분석하기 위한 틀을 우리 스스로 고민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감옥과 경찰을 사랑하는 페미니스트란 모순이라는 점을 타리와 난디니 모두 지적하며, 권리와 ‘보호’를 통제와 관리가 아닌 방식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페미니즘의 과업이라는 점도 제안했습니다.
마지막 토론은 3조로 나눠서 각 조별로 나라의 정부 혹은 위원회를 담당합니다. 이들은 몇시간 안에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할 사람 3명만을 골라내야 하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과업을 받았습니다. 의회가 “성비감소로 인해 의회는 모든 임신중지를 불법화하는 법안을 제정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위원회는 각각의 사정을 읽고 긴급성 등의 기준을 정해서 결과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각 조에서는 어렵지만 책임감을 가지고 우선순위를 정하고자 애썼습니다. 어떤 조는 폭력 여부를 보았고, 지속적인 돌봄이 가능한지, 명예살인의 우려가 있는지를 판단했고 다른 조는 당사자의 명확한 의사를 가장 우선에 두었습니다. 또다른 조는 당사자의 적극적인 의지를 보고, 사회적인 조건이 열악한지를 판단했습니다. 모두 우선순위를 정하거나 한 명만 지원 대상으로 정하기가 어려워 매우 괴로워하면서 토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는 함정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지원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쉽게 동의할 수 없음에도 해야할 것 같은 과업이 주어졌을 때 그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보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수치트라는 각 조별 토론 내용과 이유를 모두 경청한 후, 애초에 의회가 임신중지를 불법화하는 법안을 제시하는 이유가 부당한데 그에 대한 개입을 하기보다 주어진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 지점에 대해서 지적했고, 다들 탄식했습니다. 좁은 선택지 중에서 사람들의 사정을 판단할때 권리기반이 아니라 필요기반으로 판단하게 된다는 점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자신이 권력에 어떻게 반응하는 가를 경험하는 의도였다는 점을 설명했는데요, 자신에게 권력과 권한, 책임이 주어졌을때 어떻게 그것을 수행하려고 하는가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누군가를 대신해서 결정해야 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을 때 오늘의 상황을 기억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권력을 의심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내가 동의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요. 참여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해악을 최소화하는 결정을 내리려고 애썼고, 내상을 입기도 했지만 강렬한 기억을 남긴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정말 마지막 프로그램은 각자가 30분간 각자가 말하고 싶은 바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영상, 그림, 글을 통해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컨텐츠를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충격의 에너지를 생산적인 활동으로 전환시켜볼 수 있었어요. 밈을 차용해서 임신중지를 알린 사람, 집단 활동을 통해서 대안적인 기도문을 작성한 조, 자신의 운동이 시작된 계기와 현재를 담은 포스터를 제작하고 발표하면서 눈물짓게 한 사람, 단체 활동을 알리는 영상을 만든 사람, 네컷짜리 만화를 만들어낸 사람, 임신중지를 지원하는 부모모임이라는 가상 모임을 만들어 홈페이지까지 제작한 사람, 정확한 임신중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카드뉴스를 만든 사람 등 모두가 엄청난 결과물을 만들어주었어요. 사진으로 확인해보세요!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수료증을 전달하면서 3일간의 여정을 자축했습니다. 진행자, 통역자, 참여자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며, 진심으로 앞으로의 활동을 응원하고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나가자고 약속했습니다. 앞으로 이 분들의 활약을 기대해주세요!
참여자들의 후기
김민솔 님
ASAP와 셰어가 함께한 이 프로그램은 참여자들이 임신중지 권리 지원과 옹호자로서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두고 운동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향점을 알려주었습니다. “임신 중지를 한 여성은 생명을 끝내는 것이다.” , “(태아의)성별을 선택하는 것은 여성의 재생산 권리이다.” 라는 문장을 제시받고, 사람들은 해당 문장이 가진 뜻이 ‘동의하는지’에 관해 몇 시간을 내리 토론했습니다. 나의 언어가 미숙할 수 있음에도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용기 내어 말했습니다. 이 공간이 안전하다는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가 노력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소나무처럼 대쪽 같은 취향에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 사람입니다. 토론에서 저는 제 입장을 한 다섯 번은 변경한 것 같습니다. 본인의 편견을 마주하고 바꾸는 것의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느꼈을 것입니다. 예컨대 저는 처음에 ‘임신 중지는 생명을 끝내는 행위가 아니다’라는 입장이었으나, 모든 인간과 동물은 매일매일 다른 생명을 끝내며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을 끝내는 것임에도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도달하기까지 참 힘들었습니다. 토론장 바깥에서 타인의 편견을 마주하는 일은 더욱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기에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임신 중지를 넘어, 운동(exercise 아닌 movement)의 가치와 전략에 대한 고찰은 괴로우면서 새로웠고,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현재 시점의 제게 좋은 참조점이 되었습니다. 수용시설과 이주민, 트랜스, 성노동자에 관한 의제 또한 간밤에 미국에서 일어난 구금과 팔레스타인과 활동가들이 쓰고 있던 케피예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왕관흠 님
저는 최근 ASAP 안전한 임신중지 워크숍에 참가하였습니다. 이번 워크숍은 제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경험 많은 성숙한 사회운동가들과 함께 참여한 체계적인 활동이었기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사회운동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중국에서는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해 본 경험이 있지만, 그 수준은 천차만별이었고 직면하는 문제들도 복잡하여 오랜 시간 동안 혼란과 막막함을 느꼈습니다.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길 바랐지만, 동료들을 어떻게 모아야 할지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추천으로 Share를 알게 되었고, 이전부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주로 행사 후기만 접했을 뿐 실제로 참여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번에 영어 통역이 제공되고 신청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알게 되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번 워크숍에 참여하게 되어 한국의 상황을 직접 접할 수 있었습니다. 각 참가자들은 오랜 활동 경험을 가진 활동가로서 다양한 경험을 공유해 주었고, 한국의 사회적 맥락 또한 중국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부적인 내용들을 통역 선생님의 도움을 통해 즉시 이해할 수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언어 장벽으로 인해 실시간으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많은 소통의 기회를 놓친 경험이 많았기에 이번 경험은 더욱 값졌습니다.
휴식 시간 동안 다른 참가자들과 한국의 사회운동 경험과 상황에 대해 대화한 것도 저에게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ASAP 선생님들의 교육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중국의 사회운동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단순한 홍보와 교육, 정적인 활동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영향력을 확장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결과와 효과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사회 현실을 이해하고 소규모의 연결을 형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보다 광범위하고 견고한 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워크숍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중국에서 여성 권리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조직할 계획입니다. 또한 앞으로 보다 넓은 페미니즘 사회운동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길 희망합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반복적인 활동을 거쳐 보다 넓고 강력한 연대의 힘을 만들어 나가고자 합니다.
김가현 님
ASAP 프로그램은 3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제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밀도 높은 시간이었습니다. 가부장제와 인권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시작으로, ‘특권 걷기’를 통해 제가 가진 위치와 조건을 돌아보았고, 태아의 성별 선택과 임신중지를 둘러싼 정치적·윤리적 쟁점, HIV, 성매매, 재생산권의 교차성 등 다양한 주제들을 깊이 있게 탐구했습니다.
특히, 국가가 ‘성적 일탈’로 간주해온 존재들을 어떻게 규율하고 통제해왔는지, 그 통제가 재생산의 장에서는 어떻게 작동해왔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은 인상 깊었습니다. 이를 통해 재생산권이 단순한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의료와 법 제도, 사회문화적 규범 등 삶을 둘러싼 구조적 맥락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참가자들과 함께 임신중지 콘텐츠를 기획하며 이를 입체적으로 탐색할 수 있었던 경험 또한 매우 의미 있었습니다.
ASAP 프로그램은 저의 간호사로서의 임상 경험과도 깊이 교차되었습니다. 분만실에서 근무할 당시, 임신중지는 '되도록 피하고 싶은 일'로 여겨졌고, 막연한 불쾌감과 죄책감을 동반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임신중지를 둘러싼 사회적 낙인과 도덕적·문화적 기준의 혼재가 만들어낸,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껄끄러운 감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ASAP 프로그램을 통해, 임신중지는 개인의 삶에 밀접하게 연결된 중요한 권리이며 그 선택이 온전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다시금 분명히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ASAP 프로그램을 통해 저는 한국의 의료 현실을 되돌아보기도 하였습니다. 2020년 낙태죄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중지는 여전히 비급여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안전한 시술이나 정확한 정보에 대한 접근성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의료 현장에서는 성적 낙인으로 인해 시술을 아예 받지 못하거나,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라 과도한 비용 부담이 발생하는 일이 잦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재생산 건강에 대한 공적 책임의 부재와 맞물려, 많은 이들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제약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재생산권에 대한 성찰은 저로 하여금 ‘안전하게 출산할 권리’ 또한 되새기게 했습니다. 최근 전공의 파업으로 인해 위급한 산모가 분만 병원을 찾지 못해 헬기로 이송되거나, 구급차 안에서 출산하는 사례들, 그리고 제가 몸담았던 병원에서도 고위험 산모의 전원 요청을 반복적으로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임신중지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재생산권 전반이 얼마나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저는 그 무엇보다 ASAP 프로그램을 통해, 단일한 권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권리는 서로 교차하고 맞물리는 지점에서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복잡한 감정과 생각들, 그리고 끊임없이 되새기게 된 질문들은 ASAP 프로그램에서 만난 참여자들과 나눈 고민들과 맞물리며, 앞으로 저의 연구와 실천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참조점이 될 것입니다.
저는 임상 현장이든, 연구든, 혹은 정책 논의가 이루어지는 장이든, 임신중지를 둘러싼 담론과 제도적 흐름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요구하고 개입하는 활동을 통해 제 자리에서 가능한 실천을 지속적으로 모색해 나갈 계획입니다. 재생산 정의를 위한 옹호 활동 또한 멈추지 않고 이어가겠습니다.
ASAP, 그리고 SHARE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예진 님
멋진 다양한 여성들과 사람들과... 엄청났다..... 구성이 천재적으로 알찼습니다. (거의 집단 테라피 + 워크숍 + 강연 + 깨닫기 + 토론 등 + 끈끈한 동료애까지) 모두가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신 통역 선생님들, 그리고 퍼실리테이트 해 주신 셰어 선생님들, 각종 간식과 비건 식사에 감사합니다. 여성의 몸과 건강부터 재생산정의까지, 모르고 있던 많은 걸 실질적으로 압축적으로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유익했습니다. 여기서 이번에 제가 배운 것들을 앞으로 다양한 곳에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배워나가고 계속 부당한 구조에 맞서 싸우고 목소리 내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영어로 들었더니 왠지 번역체처럼 쓰게 되네요..^^;) 다들 사랑해요.
강의영 님
후기에 어떤 내용을 남길까 고민하다가, 기억나는 두세 개의 순간들을 적어봅니다. 가장 먼저, 첫날 첫 시간에 임신중지에 관한 사전지식을 묻는 설문에 답했던 게 생각납니다. 나름 스스로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지낸 기간이 꽤 길고, 또 임신중지 권리보장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 쉽게 문제를 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질문에 답하기가 어려워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임신중지는 여성의 권리인지 등, 가치와 관련된 질문에는 거침없이 답할 수 있었는데 소파술은 안전한지, 진공흡입술이 무엇인지와 같은 실질적인 지식이 필요한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워크숍을 시작하기도 전에 내가 임신중지를 정말 나와 내 친구들, 동료 여성들의 시급하고 절실한 고민으로 여긴 적이 있던지 자문했습니다. 임신중지에 대해 정치적 의제로서는 추상적으로 고민을 해 보았어도, 실제 임신중지가 필요한 상황일 때 어떤 여성이 어떤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지, 어떻게 안전한 상황에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을 안 해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스스로 와 너무 별로다..ㅎㅎ라고 생각하면서 워크숍 기간동안 새롭고 다양한 지식, 상황, 고민들을 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3일 간의 기간을 통해 그런 기회를 셰어와 ASAP 덕에 얻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둘째 날, 임신중지와 관련된 여러 명제들에 대해 서로 동의/비동의를 표하고 활발히 의견을 나눴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첫째 날 상당한 양의 페미니스트 토크를 하면서 거의 모든 의제에 대해 참여자들의 의견이 일치했는데, 둘째 날 이 활동을 하면서 사실 우리가 조금씩 다른 맥락과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드러났던 것 같습니다. 특히 ‘태아의 성별이나 장애 상태를 확인하고 임신중지를 결정한 경우도 여성의 권리 행사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많이 갈렸는데, 어떤 의견이 더 타당한지 아닌지를 떠나 이 질문을 두고 각자의 상황에서 다양한 생각을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평가받을 것이라는 걱정 없이 의견을 나눴던 게 오랜만이기도 했고, 또 장애운동, 여성운동, 재생산정의 운동 등 다양한 정치적 견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발생하는지를 압축적으로 본 기분이었어요. 저는 장애운동에 관심이 있는 편인데, 그래서인지 장애선별에 대해 그저 나쁜 것, 억압적인 것으로 이해해 왔어요. 여전히 장애선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기는 하지만 만약 어떤 여성이 특정한 맥락 위에서 장애와 관련하여 임신중지를 택할 때, 그리고 그것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연결된 맥락일 때, 나는 페미니스트로서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을 지와 같은 복잡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많은 운동들이 필요에 의해 더 간결하고 강력한 입장을 취하고, 그래서 그 입장이 때론 무엇보다도 중요한, 절대적인 기치로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그치만 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도 사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고, 각자의 맥락 위에서 각자의 필요를 갖고 있다는 점, 그래서 여러 맥락들이 교차할 때 복잡다단한 불일치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일치를 섣불리 평가하지 않고 함께 말하고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3일간 다른 참가자분들, 셰어-ASAP 활동가분들과 다양한 경험들을 끊임없이 나눴던 것이 많이 기억에 남습니다. 세션 중 나눈 이야기도, 세션 중간중간 쉬며 나눈 이야기도 일상 중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 같아요. 안전한 공간에서 그간의 삶과 힘듦과 고민과 슬픔과 빡침(?)을 나눠본 것이 저는 처음이었습니다. 워크숍이 끝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는데,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서 많이 기뻐요. 자주 연락하고 놀고 또 다른 활동이 있으면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셰어와 ASAP 활동을 열심히 지켜보며 참여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꼭 다시 참여하겠습니다.
요컨대 3일 간의 워크숍은 ‘임신중지는 여성의 선택’이라는 말 아래에 꽤 복잡하고 어려운, 그러나 고민할 가치가 있는 맥락들이 있다는 걸 깨닫는 기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간의 단순했던 저의 이해를 반성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배우고 고민하고 알려야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어요. 의미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도시락이 너무 맛있었어요..S2..
이영희 님
3일 동안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동했던 YAI 프로그램은 한국의 맥락에서, 거기서 나아가 아시아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임신중지 권리 옹호 활동가의 역할과 방향성을 배웠던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달성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럼에도 지켜내야 할 가치와 권리가 무엇인지 새기고, 합법화와 비범죄화는 결코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 존재의 규범을 계속해서 나열하며 범죄화를 멈추지 않는 체제를 균열시키기 위한 나의 역할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러 순간이 기억에 남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워크숍 내내 중요하게 가져간 이슈는 나의 위치성이었다. 워크숍 구성원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각기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대부분 시민단체 활동가로서 삶 속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시민단체 활동과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지만 ‘미투운동’을 통과하여 여성학을 공부한 나의 위치는 많은 경계들 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개념어와 지식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순 있어도 그 지식이 현장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어떤 상황과 존재 앞에서 그 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걸 (또다시) 알아차리는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활동가들과 관계 맺고 교류하는 시간은 나의 좁았던 시야와 세계를 놀라울 정도로 넓혀준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다양한 주제와 이슈를 두고 각자의 위치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며 불일치와 연합을 반복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겼던 우리 안의 차이를 알아차리고, 언제나 의견이 일치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서로의 안녕한 삶을 바라며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을 ASAP의 Suchitra, Nandini와 함께했기에 나의 문제, 나의 세계를 넘어 전 지구적 맥락 안에서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에 대해 사유할 수 있었다. 워크숍은 끝났지만, 우리의 고민과 투쟁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되었음을 느낀다. 삶과 공동체를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자원은 누구의 삶을 파괴하면서 ‘특권’이 되는가? 범죄화와 차별을 전제로 하는 체제 안에서 권리 보장은 ‘가치’만을 끈질기게 주장한다고 해서 실현 가능한 것인가? ‘권리’ 개념을 확장하고 넓히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통해 이어진 논의는 워크숍에서 가장 중요했던 내용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거리의 투쟁은 의사결정권자와의 협상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 객관적인 데이터와 사실에 기반한 협상이 수반돼야 한다는 것, 하지만 권리 보장의 대전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허용’과 ‘금기’를 구분하며 권리를 제한하는 체제와 권력에 계속해서 맞서야 한다는 것. ‘협상’과 ‘설득’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과 반발심이 나 또한 있었지만, 공공기관에서 일하면서 가부장적 권력이 집요하게 탐욕스러우면서도 무서우리만치 건조하게 작동하는 방식을 직간접적으로 보아왔기에 더욱 냉정하게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마 평생의 숙제가 아닐까. 재생산은 연구자로서의 주요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내 삶을 더 나은 방식으로 지속해 가기 위한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워크숍은 삶의 방향과 경로를 다시금 다잡을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이자 변곡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 성적 존재이자 재생산하는 존재로서 안온한 삶을 이어갈 수 있기를, 누구에게도 침범당하지 않는 삶과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여 본다.
혜림 님
셰어와 ASAP 권리옹호 과정을 나누며
셰어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은 항상 아주 알차다. 오전시간부터 저녁까지, 꽉 채워 보내는 시간 중에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은 없다. 3일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처음 만나는 참여자들과 아주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소중했다. 어느 공간이든 진실한 의견 나눔의 장은,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때에만 비로소 이루어진다. 내가 이번 세션에 참여하며 가장 좋았던 점을 꼽는다면, 먼저 참여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것. 그리고 내가 가진 편견과 고정관념을 마주할 수 있는 자리였다는 것. 나 역시 내가 깨닫지 못하는 권력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약간의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 쉽게 약자였던 순간을 잊게 되는 것 같다. 여러 고민되는 지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를 한 개인이 당연히 누려야 마땅한 것으로 옹호하는 것... 어렵지만 또 아주 못 할 상상은 아닌 것 같다. 나의 단단한 벽을 허물 수 있는 이런 시간이 자주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