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보고[후기] 재생산정의X팔레스타인 세미나

2024-09-04


팔레스타인과 재생산 정의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는 재생산 정의 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기 위해 2021년부터 내부적으로 ‘재생산 정의X평화 세미나’를 진행해왔다. 작년 말 이스라엘 정부가 하마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뒤로,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한 제노사이드와 끔찍한 폭력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게 됐고, 동시에 운동 사회 내부의 팔레스타인 예외주의와 핑크워싱과 마주해야 했다. 한국의 낙태죄 폐지 운동에도 많은 참고가 되었던 미국의 재생산 정의 운동 단체 시스터송(Sistersong)이 팔레스타인 이슈로 내홍을 겪고,[ref]2024년 2월 26일, Poppy Liu와 Coya Artichoker를 포함한 활동가 3인은 팔레스타인 이슈에 대한 시스터송의 침묵을 비판하며 시스터송의 이사진에서 공개적으로 사임했다. 이들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성명서를 통해서,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자행되는 일들은 재생산 정의 이슈임에도, 그와 같은 폭력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내자는 자신들의 제안이 지속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개 사임 3일 뒤인 2월 29일, 시스터송은 운동사회 내부의 비판을 수용하며 가자에서의 즉각적 종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ref] 제25회 서울퀴어문화축제의 미국, 영국, 독일 대사관 부스 선정을 둘러싸고 논쟁이 이는 것을 보면서,[ref]“[후기]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팔레스타인 학살 지원 국가들과 초국적 제약회사의 핑크워싱을 규탄하며 함께한 저항의 행진,” 셰어 활동소식, 2024.06.02. https://srhr.kr/announcements/?idx=25637513&bmode=view [/ref] 다음 회차의 ‘재생산 정의X평화 세미나’는 팔레스타인을 주제로 열어야 겠다고 마음 먹게 됐다. 제국주의적 폭력에 공모하지 않기 위해, 더 나아가 탈식민주의적 평화와 정의의 전망을 그려내기 위해, 우리의 운동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셰어는 2022년 미라클 세미나에서 팔레스타인 장애 이론가 Jasbir Puar의 책을 읽었고, 2024년 3월 이슈페이퍼에서 팔레스타인에서의 재생산 정의에 관해 다뤘다. ([2024년 3월 이슈페이퍼] 팔레스타인에서의 재생산정의 - 점령과 학살의 끝에 내몰린 생존의 조건 속에서) 이번 세미나에서는 그때 공유한 문제의식을 더 정교화하고 진전시켜보기로 했다.


2024년 7월 27일, 제4회 ‘재생산 정의X평화 세미나’에는 셰어 기획운영위원들 뿐 아니라 미라클 세미나 등을 통해 셰어와 연결되었던 연구자들이 함께 모였다. 셰어 사무실에 모인 모두가 SNS나 단편적인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 폭력적 장면들에 분노하는 것을 넘어, 해당 지역의 역사와 맥락에 기반하여 팔레스타인에서의 제노사이드와 폭력을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세미나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초점을 두면서도, 두 가지 문제의식을 분명히 가져가고자 했다. 첫째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억압을 손쉽게 한국이 경험했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등치시켜 이해하는 방식은 지양하자는 것이었다. 일본제국의 한반도 식민지배는 영토적 식민주의(territorial colonialism)이었기에 팔레스타인에서의 정착민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의 특징을 포착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무엇보다 차이를 지우는 폭력적인 연대가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 기업이 이스라엘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같은 피해자’라는 말은 자칫 가해에의 공모를 가리는 효과를 낼 수도 있다.


둘째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 생태 등과 맞물려 작동하는 방식에 주목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전쟁, 식민주의, 제국주의를 한참 논의하다보면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 생태 등이 어느새 후경화되어 버리는 건 꽤나 익숙한 곤경이다. 셰어는 재생산 정의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그렇지 않은 방식의 탈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담론을 형성해보려고 시도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학살과 착취의 문제였던 것만큼이나 언제나 인구와 재생산의 문제이기도 했음을 고려하면, 인종화되고 젠더화된 몸에 대한 통제에 주목해야만 한다. 이 세미나에서는 이스라엘의 재생산 통제 정책을 자세히 검토하고, 이를 통해 정착민 식민주의와 제노사이드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안하고자 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 고민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인의 절멸을 목표로 재생산 통제 정책을 펴고 있으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출산이 저항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유대인의 에스니시티(ethnicity)


본격적으로 팔레스타인과 재생산 정의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이 세미나는 유대인(Jewish)을 민족/인종적 범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짚으며 시작되었다. 반유대주의의 영어식 표현인 “anti-semitism”은 이 점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반유대주의를 유대교라는 신앙이 아닌 semitic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에 대한 혐오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반유대주의가 극명하게 표출된 사건으로서의 홀로코스트 또는 쇼아(Shoah)와, 그와 맞물린 시오니즘(Zionism)의 발흥으로, 유대인은 민족/인종적 범주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걸 개인의 신앙이나 유대교의 교리와 관련된 종교적 범주라고 보면, 왜 유대인의 나라라는 이스라엘에서 30세 미만 국민의 40%가 스스로 무신론자로 정체화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유대인의 숫자가 제일 많은 나라 1위가 미국이라고들 하는데(이스라엘은 2위), 미국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종교적이라기보다 세속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또 알아두어야 할 점은,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긴 역사로 인해 유대인 내부에도 피부색, 외양, 언어적 특성이 구분되는 서로 다른 민족/인종적 그룹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범주화와 명명에 얽힌 복잡한 논쟁을 생략하고 대략적으로 소개하자면, 남유럽 등지에 주로 살던 그룹을 세파르딤(Sephardim), 독일 등 서유럽에 살던 그룹을 아슈케나짐(Ashkenazim), 중동의 아랍권 나라들에 살던 그룹을 미즈라힘(Mizrahim)이라고 부르곤 하며, 그 외에도 북아프리카, 네팔 등 많은 지역에 유대인 디아스포라 그룹이 존재한다. 유대인에 대한 핍박이 스페인에서 벌어지자 세파르딤이, 히틀러의 학살이 시작되고는 아슈케나짐이 그걸 피해 이동해야만 했고, 북미, 그 중에서도 미국으로의 망명이 많았기 때문에 현재 미국의 유대인 인구가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룹 간의 인종적 위계는 미국 내에서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내에서도 작동한다. 아슈케나짐으로 대표되는 백인 유대인들에 비해, 다른 인종적 특징을 지닌 유대인들은 차별에 노출된다. 예를 들어, 미즈라힘들 중에서는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주변 중동의 국가들과 전쟁을 거치며 긴장이 고조됐기 때문에 오랫동안 살던 삶의 터전을 떠나 이스라엘로 이동해야 했던 경우도 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가 유대인의 보편적 경험으로 자리매김된 것과 달리, 시오니즘에 의해 촉발된 반목으로 인한 이들의 경험은 이스라엘이 만들어내는 집합기억에서 배제된다. 이들은 이스라엘로 이주한 이후, 유사한 외양, 언어, 문화적 요소로 인해 전쟁중 적국과 연통하는 게 아닌지 의심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더더욱 시오니즘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는 미즈라힘 그룹들도 있다.) 다른 예로는,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살던 흑인 유대인들의 경험을 꼽을 수 있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시민권을 획득하고자 한 에티오피아의 유대인들에게 고지되지도 동의받지도 않은 피임시술을 행한 바 있다.


정착민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


정착민 식민주의란 말 그대로 식민지배자들이 정착해서 그곳에 살기 위한 목적으로 행하는 식민지배의 형태를 말한다. 정착민(settler)이 인구의 과반이면 정착민 식민주의, 그렇지 않으면 영토적 식민주의(territorial colonialism)이라는 구분법도 봤는데, 각각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정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세미나에서는 재생산이라는 렌즈가 두 가지의 차이를 잘 포착하게  해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이 경험한 영토적 식민주의 하에서는 일본제국이 본국의 인구를 늘리자고 출생증강책을 펴면 식민지 조선에서도 출생증강이, 산아제한을 할 때는 같이 산아제한이 요구됐다. 물론 식민지 차별로 인해 구체적 경험들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일본제국의 재생산 정책은 본국에서와 식민지에서 인구의 증감에 대해 동일한 방향성을 지녔던 것이다. 식민지인들을 자원이자 군사/노동력으로 보는 방식의 식민지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정착민 식민지배 하의 재생산 정책은 언제나 선주민 인구의 감소를 꾀하게 된다. 식민지배자들이 그 땅의 적법한 주인이 되는 데에 선주민의 존재가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유대인은 땅 없는 사람들, 팔레스타인은 사람 없는 땅”이라는 널리 알려진 구문이 이러한 정착민 식민주의의 멘탈리티를 선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오랫동안 떠돌던 유대인들이 신의 선물과도 같이 나타난 사람 없는 땅에 정착했다는 서사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에 살아왔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라져야 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들이 팔레스타인 인구의 완전한 근절, 제거, 박멸을 목표로 얼마나 노골적인 폭력까지 동원할 수 있는지를 숨김 없이 보여왔다. 같은 목표를 위해서, 산아제한이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팔레스타인 여성의 가임력을 안보 위협으로 구성하는 방식의 억압이 가해지게 된다.


정착할 땅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까지 없애야 하기 때문에, 정착민 식민주의는 에코사이드(ecocide)를 동반할 수밖에 없으며 생태주의적 문제제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Sari Hanafi는 팔레스타인에서 관찰되는 지형을 변화시킬 정도의 융단폭격이나 지상의 모든 것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등의 극단적인 양태들을 spatiocide라고 개념화하기도 했다.[ref]Sari Hanafi, Spatio-cide: Colonial politics, invisibility and rezoning in Palestinian territory, Contemporary Arab Affairs 2(1), 2009.[/ref] 이러한 논의의 지층 위에서 Povinelli는 후기 자유주의 정착민 식민주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통치 방식을 geontopower라고 이론화했는데, 이는 생명(Life)과 생명 아닌 것(Nonlife)을 정의하고 구분하는 권력을 뜻한다. 생명권력(biopower)이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의 구분이 자명하다고 전제하는 것과 달리, 그 구분선은 정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인간들 사이의 부정의가 투영된다. geontopower의 주요한 두 가지 타입 중 ‘사막(Desert)’은 생명이 없이 메말랐지만 적절한 지식, 기술, 자원이 투여되면 생명이 될 수도 있는 것을 대표한다. ‘바이러스(Virus)’는 생명과 생명 아닌 것 둘 중 어느 하나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통치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것, 적대적인 것,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것이다.[ref]Elizabeth Povinelli, Geontologies: A Requiem to Late Liberalism (Duke University Press, 2016).[/ref]


Ruba Salih와 Olaf Corry는 팔레스타인에 가해져온 geontopower의 폭력을 분석하면서, 시오니스트 프로젝트가 팔레스타인은 사막화된 버려진 땅이었으며 유대인 정착민들이 당도해 자연을 길들임으로써 ‘사막의 개화(desert bloom)’가 일어났다는 서사를 생산, 유통했음을 지적한다.[ref]Ruba Salih, Olaf Corry, Displacing the Anthropocene: Colonisation, extinction and the unruliness of nature in Palestine, Nature and Space 5(1), 2022.[/ref] 이 서사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인의 축출, 팔레스타인 마을들의 사막화, 정착민 주도의 녹화 사업 등이 전개되었다. 지금 살아있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이 자연과 얽히며 삶을 영위하는 방식은 화석화된 것, 이미 멸종된 것으로 표상된다. Salih와 Corry의 논문은 ‘바이러스’에는 그다지 분량을 할애하지 않았는데, 팔레스타인 여성의 자궁에 대한 악마화를 이해하는 데에 유용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악마화는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출산을 통해 미래의 테러리스트들을 무한정 증식시킬 것이라는 공포가 투영된 것이고, 사실상 정착민 식민주의 권력이 선주민의 존재와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분열증적 멘탈리티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재생산 통제 정책


이스라엘의 재생산 통제 정책으로 인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구체적 경험은 어떠할까. 팔레스타인인이 균일하게 아랍-무슬림으로 상상되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더 다양하다.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 외에도 기독교인, 유대인 등이 있고, 아랍인이 아닌 피부색과 외양을 지닌 이들도 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 내부적인 차이들에 있어서는, 인종과 종교보다는 체류자격과 거주지역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스라엘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가진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다르고, 요르단이나 레바논 등지의 난민 캠프 거주자와 자치권이 인정된 서안 지구(West Bank)와 가자(Gaza) 거주자, 그리고 1967년 이래로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동예루살렘(occupied East Jerusalem, oEJ) 거주자의 경험이 달라지는 것이다.


Nadera Shalhoub-Kevorkian은 동예루살렘의 사례들에 대한 심층면접과 설문지 조사를 통해서 정착민 식민주의와 군사 점령 하의 출산의 정치학이 팔레스타인 여성에게 가하는 체계적이고 행정적인 폭력에 대해 분석했다.[ref] Nadera Shalhoub-Kevorkian, The Politics of Birth and the Intimacies of Violence against Palestinian Women in Occupied East Jerusalem, British Journal of Criminology 55, 2015.[/ref] 이 논문을 통해서 임신한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예루살렘의 병원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검문소, 이스라엘 군인들의 방해, 최루가스가 살포된 거리 상황, 동행을 매우 제한하는 정책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때로는 여성과 태아의 생명과 건강에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위법적인 폭력이나 배제도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어떤 사례들은 출산하는 몸에 대한 식민지 권력이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Shalhoub-Kevorkian은 이를 군사 점령지의 일상화된 폭력들과 이스라엘의 시민권 제도[ref]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시민권이 아닌 영주권만을 부여받을 수 있고, 이는 자녀에게 대물림되지 않는다. 많은 임신한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자신의 아이가 예루살렘 영주권을 부여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의 병원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하고 있다.[/ref] 뿐 아니라, 정착민 식민주의의 인구 통제가 중첩된 이슈로서 분석한다. 유대인의 인구학적 우위를 유지하려는 이스라엘의 생명정치적 관심이 팔레스타인 여성의 출산하는 몸을 ‘바람직하지 않은 인구’를 생산해내는 안보 위협으로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미나에서는 이러한 재생산 통제를 제노사이드로 볼 수 있을지, 그렇다면 무엇이 새롭게 보이게 되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국제인권법 상의 제노사이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은 제2조의 (d)에서 국적, 민족, 인종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전부 혹은 일부를 파괴할 목적으로 그 집단의 출산을 막기 위한 조치들을 부과하는 것이 제노사이드를 구성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제기구와 국제인권 담론의 제국주의적 속성이 이토록 전면에 드러난 사안을 다루면서 국제인권법의 조문을 검토하는 게 맞는 것일까 마음이 걸리기도 했지만, 제도화된 국제법 조문의 권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이 조문들을 포함시키도록 목소리 내온 선주민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문제의식을 길어올리는 길을 고민하게 되었다. 북미의 선주민 페미니스트들은 정착민 식민주의에 재생산이 얼마나 핵심적인지 강조해왔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선주민의 인구를 감소시키기 위한 식민지배의 통치 전략에는 선주민 여성들이 정착자의 아이를 가지면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지만 그 아이의 선주민성을 부인하는 방식, 선주민의 아이를 강제로 기숙학교로 보내어 선주민 고유의 방식으로 양육할 수 없도록 하는 방식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정착자의 아이를 출산한 선주민 여성들에게 부역자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물론, 전쟁과 제노사이드를 논할 때 여성과 아동의 경험이 부차화되는 것에 경종을 울린다.


교전 상황을 전제함으로써 식민지 폭력에 적용하기 어려운 국제인도법(혹은 전쟁법)과는 달리, 제노사이드 협약과 같은 국제인권법은 무력충돌시와 평화시에 모두 적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평화시에도 제노사이드가 성립된다는 사실로부터 곧바로 식민지성에 대한 조명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선주민 페미니스트들의 문제제기를 따라 재생산에 초점을 맞추면, 제노사이드를 규탄함으로써 정착민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이스라엘의 재생산 통제 정책은 2023년 10월 이스라엘 정부가 하마스와의 전쟁을 선포하기 훨씬 전부터 이루어졌는데, 그렇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제노사이드 역시 훨씬 이른 시기부터 자행되었으며, 종전이 아니라 탈식민이 되었을 때 비로소 멈추게 되는 것이라 보아야 하지 않을까.


Shalhoub-Kevorkian의 논문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예루살렘에서 출산하는 몸들이 겪어내야 하는 것을 “생명정치적이고 지정학적인 여성 폭력의 미로(biopolitical and geopolitical maze of violence against women)”라고 개념화했다는 점이다. 세미나 중에 누군가가 짚어낸 것처럼, 임신한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의 구체적 모습들은 셰어가 지원하는 일상적인 재생산 접근성 이슈들과 겹쳐보이기도 했다.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고, 병원을 방문하기 어렵고, 의료인들과의 언어적 장벽이라든지, 의료인의 말을 다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법적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고… 겹겹의 차별과 편재한 폭력 안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것이 출산하는 몸에 가해지는 친밀하고 일상화된 억압의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폭력의 미로는 개별여성이 경험하는 재생산 부정의의 더 넓고 큰 맥락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들고, 국가와 권력자들이 불처벌(impunity)에 머무를 수 있게 한다. 앞으로의 과제는 “검문소에서 시간을 끌었어요”와 같은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말을 제대로 들을 줄 알게 되는 것, 즉 그것을 사회적 구조와 역사적 맥락 위에 위치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일거다.


이스라엘이 선진적이라고 홍보하는 자국민에 대한 출산 지원 정책들도 정착민 식민주의라는 맥락 위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싱글 여성도, 성소수자 커플도 지원한다는 출산 클리닉(fertility clinic)은 첨단 보조생식기술과 풍부한 예산 지원으로 이스라엘이 자부심을 가지고서 강조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Gala Rexer가 드러낸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출산 클리닉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모두의 욕망과 필요가 충족되는 의료적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ref]Gala Rexer, Borderlands of reproduction: bodies, borders, and assisted reproductive technologies in Israel/Palestine, in Billy Holzberg & Anouk Madörin & Michelle Pfeifer eds., The Sexual Politics of Border Control (Routledge, 2022)[/ref] 클리닉의 종사자들이 “미래의 테러리스트” 운운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한 차별적 의식을 표출하는데다가, 재생산 의료 전반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접근성은 체계적으로 가로막혀 있다.


게다가 재생산 권리의 평등한 보장보다 인구 정책적 목표가 앞서게 되면, 유토피아라기보단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현상이 나타난다는게 재생산 정의 활동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해온 사항이다. 단적인 예로, 이스라엘 정부는 유가족이 원하는 경우 전사한 이스라엘 방위군(IDF)에게 사후보조생식술(Posthumous Assisted Reproduction, PR or PHR or PAR)을 지원하고 있다. 군인의 몸에서 사후에 정자를 채취하여, 자원을 받아 모집한 여성에게 보조생식술을 통해서 수정, 착상, 출산하도록 하여, 그렇게 태어난 아이의 보육을 이스라엘 정부가 보조하는 정책이다.[ref] “[Opinion] The rush to preserve the sperm of slain soldiers exposes the deep militarism of Israeli society,” Mondoweiss, December 10, 2023 https://mondoweiss.net/2023/12/the-rush-to-preserve-the-sperm-of-slain-soldiers-exposes-the-deep-militarism-of-israeli-society/[/ref] 정착민 식민주의와 군국주의가 종합적으로 빚어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대리모 이슈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시민에 대한 출산 지원책의 초국적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2015년에 네팔에 큰 지진이 났을 때, 이스라엘은 구조 인력을 파견하여 이스라엘인과 대리모 계약을 맺은 네팔 여성들은 그대로 둔 채 출산된 아이들만 본국으로 안전 송환시킨 바 있다.[ref]“Israel Evacuates Surrogate Babies From Nepal but Leaves the Mothers Behind,” Time, April 28, 2015 https://time.com/3838319/israel-nepal-surrogates/ [/ref]


이는 이스라엘 내부의 인종적 위계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민족국가적 정체성에 부합하는 백인 유대인이나 군인들이 전폭적인 출산 지원을 받는 동안, 네타냐후가 “이스라엘의 유대인성을 약화”시킨다고 치부한 바 있는 에피오피아의 유대인 여성들은 이스라엘로 이주하기 위한 캠프(transit camp)에서 (그리고 일부는 이스라엘로 이주한 이후에도) Depo-Provera라는 장기간의 피임 효과가 있는 약물을 주사받았다. 이들은 그에 대해 설명을 듣거나 동의를 한 적이 없었다며 부당함에 대해 목소리 내고 있다.[ref]“Israel gave birth control to Ethiopian Jews without their consent,” Independent, January 27, 2013 https://www.independent.co.uk/news/world/middle-east/israel-gave-birth-control-to-ethiopian-jews-without-their-consent-8468800.html [/ref]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


출산 클리닉에 대한 이스라엘의 선전을 비판하기 위해,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곤 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 행위가 있으니 소위 ‘정자 밀반출(sperm smuggling)’이다. 이스라엘은 자의적 체포, 억압적인 법률, 팔레스타인인은 군사법원에서 재판받도록 하는 차별적 사법 시스템 등을 통해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있고, 감옥에서도 추가적인 제재를 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종신형을 선고받은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에게는 동일 형량의 다른 수감자들과는 달리 부부 면회를 허용하지 않기에, 수감자의 가족이 면회를 할 수 없거나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둔 면회만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자 밀반출은 수감되어 있는 팔레스타인 남편의 정자를 모종의 방법으로 감옥 밖으로 운반해서, 아내가 그것을 이용해 임신하고 출산하는 행위이다. 정자 밀반출 사실이 알려지면 수감자가 독방으로 보내지거나 수감기간이 연장되는 등 보복이 뒤따르기 때문에 정확한 현황 파악이 어렵지만, 2012년 무렵부터 100 여 명의 아이가 정자 밀반출을 통해 태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스포트라이트는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대표적인 것이 팔레스타인의 가부장적 내셔널리즘이라는 비판이다. 일견 수긍이 되는 문제제기인데, ‘대의’를 위해 여성의 재생산을 그에 복속시키려고 하는 건 흑인해방운동이나 제3세계 저항 민족주의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Frances S. Hasso의 글은 출산이 저항일 수 있다는 말을, 여성에게는 애 낳는 것이 애국이고 민족해방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읽어낼 수 있는 관점을 열어주었다.


우선, Hasso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재생산 욕망과 행위가 이스라엘 유대인들과의 인구적 경쟁에 의해 틀 지어지고 있다는 널리 퍼진 관념을 반박한다. 인구적 경쟁에 대한 프레임이 시오니스트와 서구의 관점이 투사된 것일 뿐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심지어 팔레스타인 내셔널리스트들이 생산한 자료들에서도, 전통적 가족적 가치에 대한 강조가 드러날 뿐 인구적 경쟁을 위해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는 레토릭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출산율 보고서들의 인터뷰 속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아이를 잃은 상실감을 새로운 아이로 이겨내고 싶은 마음, 아이가 가져다주는 강한 가족적 유대감에 대한 기대, 혹은 반대로 또 아이를 잃게 되면 이번에는 견딜 수 없을까봐 임신을 주저하는 마음, 아이를 키울 여력이 되지 않는 환경적 요인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건 어쩌면 새 생명을 이 땅에 데려오는 일은 언제나 매우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의 일이며, 그 누구도 애국과 같은 추상적 가치를 위해 애를 낳거나 낳지 않는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의 확인인지도 모른다.


Hasso는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에서의 결정들에도 언제나 젠더적 차원이 작동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정자 밀반출을 통한 출산이 내셔널리즘적 출산증강책의 일환이 아니라 피부로 마주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부당한 감금 시스템과 그로 인해 끊긴 가족적 유대에 대한 저항 행위인것처럼,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낳지 않는 것이 저항이 되는 구체적 조건들도 얼마든지 있음을 짚는다.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의 퀴어 활동가, 예술가, 학자들이 낳지 않음의 저항성에 의미부여하는 방식이었다. 아래 인용한 Hasso의 글 일부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은 내셔널리즘적 탈식민주의와 서구적인 퀴어운동 사이에서 중용을 취하거나 타협점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이성애정상성과 정착민 식민주의가 불가분이며, 이성애정상성에 도전하지 않는 한 진정한 탈식민적 해방의 전망이라고 볼 수 없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공모하면서 퀴어 해방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리학자 Walaa Alqaisiya (2018)는 alQaws for Sexual and Gender Diversity in Palaestinian Society의 액티비즘과 지적 작업에 대한 그녀의 “탈식민적(decolonial) 퀴어” 분석에서, 팔레스타인의 반-재생산 욕구에 대한 논의를 한 단계 진전시킨다. [...] 탈식민적 퀴어링은 정치적이고 성적으로 변형된 팔레스타인 미래성을 목표한다. 이는 “반내셔널리즘 스탠스”를 취하지는 않으면서도, 영웅적 남성성을 전경화하고 동성애, 혼외 섹슈얼리티, 성노동을 이스라엘 및 불명예와 영합하는 원천으로서 비난하고 거부하는 “팔레스타인의 이성애정상적 재생산”에 도전한다(36, 37). 탈식민적 퀴어링은 시오니스트 LGBTQ 프레임이 요구하는 퀴어 동화주의와 “팔레스타인의 내셔널리즘적 사고에 새겨진 지배적인 젠더 패러다임에 동일시하지 않는 젠더적이고 섹슈얼한 행위를 위한 공간을 제공”한다(38, 35). 이는 “퀴어와 선주민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내셔널리즘적 침묵에 도전하고,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주의의 체제가 “이성애정상적 구조”이며 “해방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상상” 속에서 재생산됨을 인식할 것을 주장한다. 팔레스타인 탈식민적 퀴어 미래성은 그러한 “종속”의 시스템이 세팅한 용어에 기반한 해방을 거부한다.” (Hasso, 2022: 241-242)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죽음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상황에서, 억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모든 과정에 걸쳐있을 수밖에 없다. Hasso는 실제로 팔레스타인의 문학 작품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져온 것은 아이를 많이 가지는 것과 같은 생물학적인 재생산 행위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살아내는 과정임을 짚는다. 따라서 정자 밀반출에 스포트라이트를 쏘는 것은 그것이 저항 행위가 아니라거나 성차별적인 저항 행위라서가 아니라, 낳거나 낳지 않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폭넓고 창의적인 저항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에 문제다. 이 세미나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임신, 임신중지, 출산 행위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과 죽음 전체가 재생산 정의의 이슈임을 다시금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생명의 위계 속에서 삶 전체가 차별받게 되는 존재들이 있고, 그 자리에는 셰어가 낙태죄 폐지 운동과 그 이후의 재생산 정의 운동을 통해서 조명했던 장애인과 성소수자와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서있기 때문이다.


Hasso는 같은 자리에 있던 존재들—특히 흑인 페미니스트들과 유색인종 퀴어 이론가들—의 미래성(futurity) 논의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을 읽어내고자 시도한다. 아프로퓨쳐리즘과 아프로페시미즘, 미래 없음을 퀴어의 자리로 지정하는 Lee Edelman의 논의와 그에 대한 Jennifer Doyle과 James Bliss의 비판, José Esteban Muñoz의 퀴어 유토피아 등. 세미나 한 번을 통해서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등이 뒤얽힌, 탄생과 죽음의 시간성에 대한 복잡한 논의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서로 도우며 (스페셜 땡스 투 윤목) 함께 더듬어 나아가면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참여자들은 Justin Louis Mann의 비관적 미래주의를 읽으면서, 재생산 정의 운동의 핵심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조건 하에서 일어나는 재생산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누고서 머리가 맑아졌다고 했다. 삶은 선택이나 결정이라는 말로는 포착할 수 없는 복잡성 위에서 영위되며, 소수자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팔레스타인이 우리를 해방시킬 것이다”라는 말을 세미나에서 여러 차례 되새겼다. 미래성에 대한 치열하고 때로는 대립적인 논쟁들은 결국,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계를 새롭게 상상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였다. 명확한 이분법적 구분에 기반한 양자택일이 한계가 분명한 것 만큼이나, 중간지대를 찾으려는 노력은 무용하다. 거기엔 모든 억압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현재의 체제의 근간에 가장 급진적으로 도전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때의 미래성은 과거와 현재에 상응하는 것으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간성을 의미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고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해방의 급진적 전망이 실현될 때, 우리 모두가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세미나 후기는 시월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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