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보고[후기] 2024년 ARJC(임신중지 및 재생산정의 컨퍼런스)에 다녀왔습니다!

2024-03-12

지난 2월 15일부터 18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임신중지와 재생산정의 컨퍼런스 Abortion and Reproductive Justice Conference가 열렸습니다. 올해로 네번째를 맞이한 이번 컨퍼런스는 아시아 안전한 임신중지 파트너십(ASAP, Asia Safe Abortion Partnership https://asap-asia.org/ )이 주최를 맡아 총 63개국에서 300명 이상의 참가자가 모였습니다. 셰어에서는 ASAP의 운영위원이자 이번 대회의 글로벌 자문위원 역할을 맡은 나영 대표를 포함해 공혜원 사무국장, 타리/나영정 에브리바디 플레져랩 팀장, 김선혜, 윤정원 기획운영위원이 함께 참석해서 발표와 세션 진행, 워크샵 참여, 부스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왔습니다. 이번 행사는 특히 임신중지와 재생산정의에 관한 거의 모든 주제가 다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광범위하고 다양한 의제를 담으면서도, 각 국가와 지역, 당사자에 따른 구체적인 맥락과 전략도 공유할 수 있어 서로 많은 것을 배우고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자리였어요. 행사장 곳곳에서는 전시와 책 교환, 각 단체 참가자들이 가지고 온 굿즈 판매, 영화 상영, 자기돌봄 공간 등도 마련되어 다양한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2월 15일 사전 컨퍼런스


컨퍼런스 전체 일정의 시작에 앞서 15일에는 사전 컨퍼런스가 진행되었습니다. 사전 컨퍼런스는 서로 편한 분위기에서 경험과 토론을 나누고, 실습도 해볼 수 있는 다양한 워크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셰어의 나영 대표와  공혜원 사무국장은 수동진공흡입기 실습 워크샵과 유산유도제 지원 전략에 대한 워크샵을 참석했고, 타리 팀장은 임신중지가 불법인 상황에서 위험을 감소하기 위한 임신중지 지원 전략을 나누는 워크샵에 참석한 후, 김선혜 기획운영위원과 함께 <장애와 임신중지, 산전검사에 관한 나이로비선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워크샵에 참석했습니다. 

말레이시아 재생산 권리 옹호 연합 RRAAM, Reproductive Rights Advocacy Alliance Malaysia https://www.rraam.org/ )이 준비한 수동진공흡입기(MVA, Manual Vacuum Asperation) 실습 워크샵에서는 세계보건기구의 2022년 임신중지 가이드를 기준으로 임신중지 이전 상담부터 필요한 도구와 공간의 준비, 임신중지 방법, 임신중지 이후 상담까지의 전체 과정을 소개하고 직접 흡입기를 사용해보는 실습을 진행했습니다. 수동진공흡입기는 임신초기(임신 9주~10주 이전 시기)에 플라스틱 관의 진공을 이용하여 임신중지를 하는 데에 사용됩니다. 실제 수술 시의 출혈양이나 자궁의 크기와 위치, 모양, 배출된 임신 산물의 실제 크기와 모습 등을 알 수 있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들이 얼마나 크게 과장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었어요. 실습 때는 빨간색 과육을 지닌 용과에 직접 다이레이터와 흡입기를 넣어 흡입과 배출과정을 진행해 해보고, 자궁 모형을 이용해서도 전체 과정을 실습해 보았습니다. 

MVA 워크샵은 주로 의료인을 대상으로 하는 워크샵이지만 막상 참여해보니 의료인 뿐만 아니라 임신중지에 관한 상담과 활동을 하는 상담사와 활동가에게도 꼭 필요한 내용이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정보와 권리를 알 수 있도록 널리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워크샵이었습니다. 올해는 셰어에서도 꼭 이런 워크샵을 해보고자 합니다. 



<임신중지, 산전검사, 장애에 관한 나이로비 원칙>을 주제로 한 워크샵에서도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임신중지, 산전검사, 장애에 관한 나이로비 원칙>은 2018년 10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성과재생산권리 분야 전문가들, 장애인운동 및 여성운동 활동가들이 함께 임신중지 권리에 중점을 두고 장애인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를 교차하는 문제의식을 담아 주요 원칙을 발표한 것입니다. (장애여성공감에서 번역한 전문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https://bit.ly/49zkyad ) CREA https://creaworld.org/ 에서 주관한 이 워크샵에서는 나이로비 원칙의 의미를 공유하고 각국의 상황과 실질적인 고민들을 나누었습니다. 나이로비 원칙은 장애인의 삶과 생명에 대한 논의가 임신중지 권리 보장에 반대하는 데에 동원되는 것을 명백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국에서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에 대응하기 위해 합법적 임신중지의 조건으로 태아나 부모의 장애를 기준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고민이 이어져 왔습니다. 참석자들은 나이로비 원칙을 함께 읽고 주요 원칙들에 대해서 토론을 나누었고, 인도, 케냐, 한국, 파키스탄, 아르헨티나의 상황과 운동의 맥락을 통해 다양한 참조점을 공유했습니다. 나이로비 원칙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와 함께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의 모든 영역에서 권리를 보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많은 장애여성이 경험하고 있는 동의없는 불임 시술, 강압적인 피임이나 임신중지에 대해 함께 드러내고 장애여성의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강화해 나가는 일, 장애정의와 재생산정의의 영역들을 교차하며 넓혀나가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2월 16일 컨퍼런스 1일차


16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컨퍼런스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습니다. 매일 오전에는 기조연설과 두 개의 전체 세션이 진행되었고, 오후에는 다양한 소그룹 세션을 진행한 후 마무리 전체 세션이 진행되었습니다. 

16일 오전  전체 세션은 임신중지 의료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상황과 제공자로서의 의료인의 상황에 대해 공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행사의 주최 단체인 ASAP에서는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관한 정보를 수어로 만들고 있는 활동을 소개했는데 셰어가 하고 있는 활동과 맞닿는 부분이 많아 반가웠습니다. 레바논에서 The A Project https://www.theaproject.org/ 라는 활동을 하고 있는 Rafi Maesto는 경제 상황의 악화로 인해 보건 예산의 삭감, 의료 인력의 해외 이주 증가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성소수자의 성·재생산  건강과 임신중지 접근성이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퀴어/트랜스 친화적인 의료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현재 하고 있는 섹슈얼리티 핫라인 활동을 소개했습니다.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이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음에도 탈레반의 통치 하에서 실질적으로 찾아갈 수 있는 산부인과 의료진이 없다는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이 공유되었고, 전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의 상황에 대해서는 영상과 대독을 통해 발표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인해 여성들이 마취제도 없이 제왕절개 수술을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전쟁과 식민주의의 영향, 가부장제가 맞물려 복잡한 모순적 상황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 한해 의사 두 명의 확인을 받아야만 임신중지를 할 수 있고, 최대 3년형까지 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임신중지의 현황을 명확히 파악하기도 어려운 한편, 전쟁으로 인한 유독 물질의 영향으로 임신 중 건강도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정부, 사회에서 모두 인구관리를 위한 통제의 대상으로 놓여 있습니다. 참가자들 모두 무거운 마음으로 연대를 다짐했습니다. 



소그룹 세션에서는 임신중지 후 프렙(PrEP, HIV 노출 전 예방요법) 처방을 연계하여 제공하고 있는 케냐의 사례를 들을 수 있었고, 뭄바이 빈민가에서 일하고 있는 성노동자에게 범죄화와 낙인이 미치는 영향과 이에 대응하며 성·재생산 건강 관련 의료 서비스와 정책 제안 활동을 하고 있는 사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편, 조지아에서 HIV 감염인 여성의 임신중지 관련 의료서비스의 접근에 있어서 약물 사용, 성노동, 장애 등에 대한 낙인이 교차적으로 미치고 있는 영향을 연구한 사례도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연구자는 위해감소 전략과 성노동자 인권 보장, 재생산정의 운동이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날 마무리 전체 세션에는 윤정원 기획운영위원이 Global Doctors for Choice https://globaldoctorsforchoice.org/ 의 이사 자격으로 참석하여 한국의 상황을 전하고, 가부장적 의료 시스템의 문제와 임신중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인의 상황, 앞으로 해나가야 할 역할에 대해 토론을 나누었습니다. 



📌2월 17일 컨퍼런스 2일차


둘째날은 오전 전체세션에서는 ‘탈식민주의와 비범죄화’를 주제로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인도, 우간다, 케냐, 페루, 한국의 맥락과 투쟁을 공유했고 나영 대표가 한국의 ‘낙태죄’ 폐지 운동 과정에서 과거 모자보건법과 인구정책에 반영되었던 식민주의와 우생학의 역사를 임신중지 비범죄화, 재생산정의 운동으로 어떻게 연결시켜 투쟁했는지, 비범죄화 이후 현재의 과제와 요구는 무엇인지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소그룹 세션에서는 인도의 Crip Pleasure라는 반가운 단체를 만났습니다. 이 단체는 퀴어-트랜스 장애인의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퀴어-트랜스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접근성을 넓히고 의료서비스 제공자를 훈련하는 활동, 정책 제안 활동 등을 시작했는데 특히 셰어처럼 즐거움을 중심에 두는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편 Women On Web https://abortion.kr/ 은 임신중지 비범죄화 전후 한국에서의 유산유도제 요청 추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분석한 내용을 발표해서 관심있게 들었습니다. 분석 결과, 2019년을 기점으로 한국 여성들이 Women On Web에 유산유도제를 요청한 횟수가 확연하게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발표자는 비범죄화가 확실히 임신중지 관련 접근성을 확대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겠으나 한국 정부가 Women On Web 사이트를 차단하고 있는 상황처럼 임신중지 관련 정보에 대한 접근성에 여전히 제약이 크고, 여전히 유산유도제를 요청하는 여성들도 계속 있어 비범죄화 이후 권리 보장이 충분히 마련된 상황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오후 소그룹 세션 중에는 종교와 영성에 대한 세션도 마련되었습니다. 특히 Andrea Vassell 목사는 SACReD https://www.sacreddignity.org/ 라는 단체의 활동을 소개하며 재생산정의를 위한 종교인의 역할을 소개하여 참가자들이 여러 차례 “아멘!”을 외쳤습니다. 



📌2월 18일 컨퍼런스 3일차


셋째날 오전 전체세션에서는 ‘인생 :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라는 주제로 생명을 둘러싼 담론과 기술의 발전이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한 흥미로운 토론이 진행되었고, 이어서 인구정책과 기후변화가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 중국, 태국, 피지, 스리랑카, 솔로몬 아일랜드 패널의 발표가 진행되었습니다. 피지와 솔로몬 아일랜드는 현재 갈수록 심각해지는 해수면의 상승, 화산 활동, 사이클론 등의 영향으로 인해 생존과 재생산건강이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패널과 참가자들 모두 기후정의와 재생산정의를 연결하는 운동이 시급하다는 점에 대해 공유했지만 시간상 좀 더 깊이 있는 토론이 이어지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오후 소그룹 세션에서는 1970년대부터 유산유도제를 이용한 임신중지에 관한 담론과 운동의 변화를 추적한 이탈리아 패널의 발표와 네팔에서의 임신중지 관련 법 정책의 변화에 대한 발표, 코로나 팬데믹 으로 국경이 폐쇄된 이후 직접 유산유도제를 지원한 부탄에서의 활동 사례가 소개되었습니다. 특히 주로 가까운 인도에서 유산유도제를 비롯한 필수 의료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펜데믹으로 인해 국경이 폐쇄된 후 부탄 안팎의 소규모 개인 활동가 그룹이 모여서 122명의 사람들에게 유산유도제를 구해주고 임신중지를 지원한 활동 사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셰어의 나영 대표는 둘째날 오전 전체 세션에서의 발표 맥락을 이어 한국의 인구정책과 임신중지의 범죄화가 우생학적 인구 관리와 섹슈얼리티 통제에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었는지를 짚고, 임신중지 비범죄화 이후 재생산정의 운동의 방향에서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난민, HIV감염인, 성노동자, 성소수자, 홈리스, 비혼모 등 여러 영역의 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이러한 역사를 어떻게 바꿔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는지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셰어에서 진행했던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 마련,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임신중지 가이드북 발간, 성적권리에 관한 다양한 활동과 소수자를 중심에 둔 포괄적 성교육 워크숍, 접근성 확대를 위한 활동 등을 소개했습니다.  



<컨퍼런스에서 돌아와서>


사전 컨퍼런스를 포함해 4일 동안 뉴스나 연구자료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다양한 맥락과 활동을 접할 수 있었고 셰어의 활동가들도 곳곳에서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임신중지에 대한 법·제도적 상황은 다양하지만 법과 제도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는 더디고, 심지어 수십 년에 걸쳐 진전시켜 온 변화가 한 순간에 크게 후퇴하기도 하지만 운동은 계속해서 가능성을 찾아 틈새를 만들고 길을 만들어 왔습니다. 임신중지의 접근성을 높여나가는 운동은 이제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차원을 넘어 과도한 의료화와 의료권력의 통제를 문제삼고, 임신중지를 필요로 하는 당사자와 커뮤니티의 자율적 역량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임신중지의 권리와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재생산정의를 위한 운동에는 기후위기, 기술, 국경, 인종, 우생학, 범죄화, 시설화, 식민주의, 종교 근본주의 등 많은  문제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의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컨퍼런스를 계기로 셰어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더욱 확장하고 변화를 연결해내기 위한 국제 연대를 활성화하고자 합니다. 특히 아시아 지역 국가들과의 네트워크와 정보, 자원 교류를 활성화하는 한편, 컨퍼런스에서 만난 Crip Pleasure, CREA 와 같은 단체들과 함께 장애-섹슈얼리티-재생산정의에 관한 논의와 교류를 구축해 나갈 예정입니다. 

2026년에는 MAMA (Mobilizing Activists around Medical Abortion https://mamanetwork.org/ ) 의 주관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 다섯번째 컨퍼런스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다음 컨퍼런스에서는 더 많은 승리의 소식과 변화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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