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이풀 인터뷰는 한 달에 한 번 셰어 활동가와 조이(후원회원)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곳곳에서 멋진 삶을 짓고 있는 조이를 소개하며 우리의 연결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갑니다. 조이의 이야기를 통해 셰어의 활동은 확장되고, 조이의 일상과 셰어가 연결될수록 셰어의 활동은 풍요로워질 거예요. 조이라면 누구나 조이풀 인터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셰어는 조이 여러분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15화] 김일란 조이님 인터뷰 :
20년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셰어를 만난 김일란 조이님의 이야기!
사진: 연분홍치마 사무실에서 지내는 고양이 쿠로를 안고 커텐앞에서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해준 김일란 조이님
셰어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도 공력이 만만치 않은 조이님을 모셨습니다.🙂
일란 다큐멘터리랑 인권활동과 페미니즘 운동을 20년째 하고 있는 (더 되긴 한 것 같지만) 올해가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20주년이에요. 김일란입니다. 반갑습니다.
용주골과 용산, <마마상>과 <두개의 문>, <공동정범>, 그리고 다시…
셰어 단체 설립 20주년을 맞이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어떠신가요? 연분홍치마는 페미니즘, 인권의 관점에서 영상작업을 통해서 사회운동을 해나가는 독특한 단체죠. 독자여러분들도 연분홍치마 홈페이지에서 작업 이력을 보면 어떤 현장과 함께 활동해왔는지 아실 수 있을거에요! https://pinks.or.kr/
일란 최근에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는데요. 다큐를 2004년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2005년에 <마마상 : 리멤버 미 디스 웨이>를 만들었어요.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고 나서 2006년도까지 여성운동 안에서 성매매와 성노동 담론과 현장에서 엄청난 논쟁이 있었잖아요. 의도하지 않게 그 한복판에서 <마마상> 작업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정체를 묻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때는 성노동 개념하에 운동하고 지지하고 연대한다는 입장을 낸다는 게 겁이 나는 마음이 있었어요. 상대가 논리로 물어보면 논리는 없는데(웃음) 나의 마음에 이끌림이 있을 뿐... 명확하게 저의 입장을 설명하진 못했지만 <마마상>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일생을 다루면서 성매매 근절이 아닌, 하지만 분명하게 비범죄화를 주장하진 못하는 어정쩡한 관점으로 영화를 만들었어요. 이게 내내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민성노련과 연대를 했고, 2006년 성노동자의 날 기록 촬영도 했었는데.
2009년 용산참사가 일어나고 그 현장에서 활동을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성노동 이슈는 조금 저에게 잊혀지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용산에 가서 전철연 동지를 만났는데 민성노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평택역 앞 집회도 이야기하고. 어떻게 아시냐고 했더니 그때 성노동자들과 철거 투쟁하면서 같이 집회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첫번째 성노동자의 날 집회 때 본인들도 있었다고. 신기하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때도 더 고민을 이어가진 못했는데 최근에 성노동, 재개발, 트랜스젠더 경험을 키워드로 하는 동료들을 만나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됐어요. 끊어졌던 다리가 다시 이어지는 느낌으로 그때 고민을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20년만에요. 순환의 느낌과 반복의 느낌인데 그때와는 또 다른. 뭐랄까 시간이 20년이 지나서 다시 그 이슈를 마주했을 땐 비슷한 것도, 굉장히 다른 것도 있었어요. 어떤 부분은 내가 고민해서 논리가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간 활동해온 이들의 궤적을 통해서 깨닫는 게 있고요. 그때 미처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네 하면서 다시 돌아온 느낌이에요. 그때와 비슷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그렇지만 조금 더 단단해진 느낌이에요. 뭔가 인생이 한 바퀴 도는 느낌을 느끼고 있어요.
셰어 최근 집결지 강제 폐쇄가 일어나고 있는 파주 용주골과도 인연이 있었다고요.
일란 2006년도에 성매매특별법 시행된 이후에 현장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집결지가 가장 타격이 크다고 알려졌는데 그때 실제로 종사자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무작정 용주골에 가게 되었고, 어슬렁 거렸어요. 한 업소의 마담 언니가 “누구에요? 못보던 얼굴들인데?” 하다가 업소에 들어오라고. 이런저런 계기로 친해져서 “자주 와서 인터뷰 좀 해도 될까요?” 여쭸는데 아무 때나 오라고 했어요. 매주 월요일 새벽 6시에 2달 동안 인터뷰를 했어요. 이번에 용주골 상황이 벌어지면서 그때 기록을 찾았는데 이사 다니고 하면서 없어졌더라고요. 그때 사진 찍은 것 몇 장정도 남아있어요.
셰어 아이고 기록이 없어졌더니 안타까워요. 이번에 다시 가보니 어떻던가요?
일란 한번밖에 못 갔지만 여전히 예전 업소들도 있고. 이모들과 대화해봤더니 그 업소들을 알더라고요. 마담이라고 부르던 곳은 별로 없었어서 저기였다 이렇게 가르키더라고요. 예전에 마담언니랑 종사자분들이랑 같이 밥 먹고 이불 덮고 귤 까먹으면서 얘기도 하고 그랬어요. 7~8번 만나서 2시간씩 인터뷰를 했는데. 그 당시에 한국에 집결지의 실제 구조와 생활, 이동하는 상황이나 선불금의 문제 등에 대해서 알게 됐죠.
성병 관련 검사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게 됐어요. 근처 정해진 병원에만 다니는데 다른 병원에 가면 마음이 불편하고 눈치보이는데 그 병원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안전하다는 느낌이 집창촌에 있었다고 하셨던 부분이 인상적으로 남았어요. 삼촌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계속 왔다갔다 하는 게 진상 손님으로부터 보호가 되고, 비상벨이 있어서 바로 연락이 되도록 하고 등등. 20년만에 그 현장을 다시 마주하니 혼자 감회에 젖기도 했어요.
셰어 서두에 인생을 한바퀴 돌아서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좀 더 듣고 싶어요.
일란 20년의 소회는 잘 모르겠고. 이제는 나이가 드니까. 사회적인 이슈도 중요한데 내 인생이 더 중요해진 느낌이에요. 어쨌든 몸의 변화나 노화라고 하는 것이 예전에는 크게 영향을 안미쳤는데, 이제는 엄청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내 몸이 반응하는 것에 활동을 하게 되어요.
40대 후반쯤 되었을 때 이게 아마 갱년기의 느낌이기도 했는데 엄청 허무한 거예요. 내 안에서 의미가 잘 안만들어지는 느낌이었어요. 왜 나는 활동을 했지?라는 질문을 하고, 왜 여전히 이렇게 위험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견디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 둘 데 없는 시간을 한참 보낸 것 같아요. 그런데 <에디와 앨리스> 작업을 하면서 마음을 좀 잡을 수 있었어요. 나한테 영화란? 활동이란? 퀴어란?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영화를 통해 새로운 서사 만들기를 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표현 전략을 통해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어요. 트랜스여성들의 서사를 매체적인 감각을 경유하면 더욱 확장되지 않을까? 다양한 트랜스 서사가 있고 표현하는 방식도 굉장히 다양하다. 그걸 내가 입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다시 시도 하게 되었어요.
여기 앞에 있는 타리가 두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지난 활동에 대해서 허무해하고 허탈해 할 때 “일란이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읊어줄까?”가 있었고, 또 한 가지는 몇년 전에 “활동가는 40세가 기점인 것 같다. 계속 같이 활동하고 싶은 사람과 안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같이 활동하고 싶은 사람이 되자라고 마음을 먹고(웃음). “새삼 읊어줄까?” 라는 동료가 있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떤 순간들은 많은 걸 같이 했고, 또 따로 각자 한 것도 있지만 친분을 넘어 활동을 함께 현장에 있었음을 증언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묘하게 다가왔어요.
그런 텀이 지나고 최근에 수엉과 여름님이 성노동, 트랜스, 재개발 이라는 키워드를 들고 함께 작업을 해보자가 저에게 다가왔을 때 뭔가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었어요. 되게 고마웠어요. 이제 내가 한 보따리 경험한 걸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다시 다르게 시작할 수 있겠구나.
사진: 김일란 조이님의 인터뷰 장면. 테이블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른쪽 뒤편에 <3XFTM> 영화 포스터가 있다.
<3XFTM>에서 <에디의 앨리스>까지
셰어 조이풀 인터뷰를 읽는 사람들이 <에디와 앨리스>라는 작품이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해하실 것 같아요.
일란 트랜스젠더 이슈를 접하고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 하게 된 계기는 2006년 민주노동당 최현숙 성소수자위원장의 팩스였어요.(웃음) 당시 성전환자성별변경법제정을 위해서 연대체를 만들자는 제안을 보내주셨죠. 당시에 연분홍치마가 생긴지 얼마 안됐을 때였어요. 어떤 활동들을 해나갈까 고민하던 시기였는데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느꼈어요. 트랜스젠더가 어떤 판사를 만나서 운명이 바뀌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계획하고 정리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연대를 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성전환자 인권실태조사를 함께 하게 됐어요. 당시에는 인터넷 조사가 활발하지 않아서 직접 설문지를 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태원에 여보여보와 같은 트랜스 업소에 무작정 방문하게 된거예요. 지금까지 이루어진 트랜스젠더 조사 중에 업소에서 일하는 트랜스여성의 참여가 가장 높았던 조사라서 각별한 의미가 있어요.
그 작업을 하고 나서 남는 고민들을 가지고 다큐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페미니스트로서 연대하였지만 트랜스젠더가 겪는 몸의 감각을 시각화하거나 감각화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싶었는데 능력이 안됐어요. <3XFTM> 상영할 때 관객 질문 중 하나가 “나는 비성전환자 여성인데 당신이 가슴 수술한 것 때문에 너무 불편하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때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한무지씨가 이렇게 말했죠. “당신의 가슴과 나의 가슴의 의미가 다르다. 이 점을 이해받고 싶다.” 나중에 무지랑 이런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무지가 페루로 떠나기 전에 <3XFTM> 2를 만들자고 얘기해서, "그래 페루 갔다가 돌아오면 만들자" 했는데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려워졌죠.
다시는 트랜스젠더 영화는 안만들어야지 생각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에디가 자기 수술할거고 다큐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한참 망설였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얘기가 있을까? 무지하고의 약속을 이렇게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사실 저를 확 자극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제가 요즘 트랜스여성에 대한 다큐를 해야할까 고민중이에요 했는데. 그 분이 “트랜스젠더 이슈 가지고 더 할 얘기가 있나?” 라고 했고, 갑자기 빈정이 상했어요. 트랜스 서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이제 시작일 뿐인데. 그래서 그 말을 반박하고 싶고,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오기가 생겼어요. 무지에 대한 약속이 20%, 오기가 80%.(웃음) <에디와 앨리스> 작업 시작을 해서 한참 달려왔는데 어려운 작업인 것은 확실하네요.
셰어 어떤 다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일란 두 주인공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자랑하고 싶기도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몸으로 겪는 감각이 상상될 수 있는 힌트들이 많은 다큐이길 바랬어요. 그것을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특성으로 보여주고 싶은데, 아직도 헤매고 있어요.
셰어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일란 조금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는데, 저한테는 여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영화란 무엇인가 이 질문이 비슷해요. 두 가지다 본질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아니라 유효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의미를 갖게 하는 것 같아요. 여성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나와 에디, 엘리스가 같이 만들면 되는구나. 그 경험에 의미를 붙이면 되는 구나, 이게 내가 영화를 인식하는 과정과 같구나. 이게 과정에 되게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트랜스서사라는 걸 지배적인 서사와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은 욕망이 중심에 있어요. 트랜스젠더와 영화의 시간성이 비슷하구나라는 걸 발견하고 있어요. 그걸 잘 드러내면 관객들이 트랜스젠더의 몸과 시간을 이해하면서도 영화를 보는 것이 의미있겠다 싶은 거죠. 영화안에서 일어나는 회고, 반복, 편집, 플래시백, 중첩 같은 시간성이 트랜스젠더가 정체성을 찾아가고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을 느끼는 방식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체화의 과정을 영화적 체험으로 구현하는 것을 계속 시도하는 중이에요.
사진: 연분홍치마 사무실에서는 만식이와 연아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도 함께 지낸다. 책장 위에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외과 수술 이후를 살아가면서 트랜스 몸 경험과 겹쳐지기
셰어 그렇게 시간을 복잡하게 겪어나가는 몸에 대한 감각은 일란님이 암투병을 통과하면서 체감했을 것 같기도 해요.
일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암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고 이게 44세인 거예요. 45세? 그때는 암 자체는 그렇게 두렵진 않았어요. 의사 친구가 얘기를 했는데 한국의 암발병률은 세계적이고 수술도 세계적인데 어지간한 대학병원에서 초기에 암수술은 생존률도 되게 높고 항암과정도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으니까 겁먹지말아라 했고 저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나는 몸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던 거 같아요. 몸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고 촬영의 도구로 느끼거나 게다가 외모와 헷갈리고(웃음). 그런 정도의 낮은 인식이나 존재감이었고 몸의 의미가 뭔지 몰랐어요. 그래서 암에 걸렸을 때 이것을 속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내가 몸을 잘 관리하고 좋게 지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가 저질렀는데 누구 탔을 할거여~' 그런 마음이었어요. 수술 잘 받고 하면 되겠다 했는데 오히려 외과적 수술 이후가 어려웠어요.
위의 상당 부분을 절제하니까 위의 기능을 하는 장기가 없어졌기 때문에 소장의 일부를 위처럼 기능할 수 있게 수술을 했었어요. 그것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컸던 것은 원래 기능을 하는 부분이 없어지니까 다른 부분이 대체해줬는데 적응하고 훈련하고 근육을 키우는 게 중요한 거예요. 수술 직후에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은 처음에 뭘 먹을 때 체하고 불안하고 이동도 어려웠어요. 화장실 가는 것도 무섭고 공포스럽고 그래서 잘 안먹게 되고. 내 몸이 무섭고. 밤에 혼자있을 때 찾아오는 고통도 무섭기도 하고. 여러 책을 읽으면서 위안을 받기도 했지만 복통이나 두드러기, 알 수 없는 고통을 거쳐서 지금은 많이 안정이 됐어요. 하지만 후유증이 계속 있어요. 내 몸이 혈당 관리를 잘 못해요. 당뇨환자랑 비슷하고 혈당 스파이크라고 해서 갑자기 치솟다가 떨어지고. 지금도 아이스크림이나 고혈당의 음식은 안먹고 인스턴트도 잘 안먹고 있어요.
셰어 화장실 공포가 어떤 건지 좀 더 얘기해줄 수 있나요?
일란 갑자기 설사하거나 갑자기 배탈나거나 하는 상황이 발생하니까 외출이나 이동에 공포가 생겼어요. 장이 위치가 바뀌니까 자꾸 꼬이는거예요. 그래서 수술을 한번 더 했어요. 장이 민감하니까 소화를 잘 못 시켜서 꾸룩꾸룩 소리도 많이 나고 식은땀이 날 때도 있고 그러니까요. 이제 많이 줄었긴 했는데 이젠 두려움만 있는 상태에요.
이 경험이 에디랑 되게 비슷했어요. 에디의 경우에도 대장으로 질을 만들고 나서 다이레이션을 하는 게 장기가 훈련하는 과정이죠. 놀라운 건 새롭게 자리 잡으면 그 역할을 하더라고요. 완벽한 대체물은 아니더라도 그 기능을 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직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가기도 했어요. 조직이 하나의 유기체라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빠지면 다른 사람이 그 업무를 수행할 수 있고 자기 만의 색깔로 수행할 수 있다 이런 생각. 본래 그 사람만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조직은 건강하지 않다. 나중에 듣고 보니까 고통을 이미지화 하는 게 고통을 잊는 방식이라고도 하더라고요. 고통을 시각화하고 이해하면서 실제로 고통이 줄어요. 아 내가 스스로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그런 생각을 했구나 했어요.
한나 아렌트가 스토리텔링이 치유라고 이야기하면서 ‘고통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와 경험이 있으면 잊을 수 있다.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인과성을 발견하거나 설명할 수 있으면 고통이 줄어든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제가 에디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니까 다이레이션을 하면서 느낀 고통을 완화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대요. 다른 다이레이션 한 언니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안해주는 데 저의 수술 경험을 공유하면서 서로 지지를 했던 것 같아요.
사진: 인터뷰하고 있는 김일란 조이님. 테이블위에 두팔을 올려놓고 앞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낡아빠진 것을 새롭게 만드는 힘을 가진 셰어
셰어 셰어가 설립되고 반가우셨나요? 퀴서비스 출연 제안도 해주셨어요. (보러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_Et7Vzjk5rQ)
일란 물론이죠. 낙태죄 폐지와 관련한 운동이 저에겐 굉장히 놀라웠어요. 낡아빠지고 아무도 건드리고 싶지 않은 이런 이슈를 어떻게 새로운 운동으로 해석하고 현재의 운동으로 만드는 전환의 과정이 특히나 놀라웠어요. 물론 셰어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셰어가 단체 설립을 하면서 그 운동을 이후에 계속 이어나가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중요한것 같아요.
최근에 에로영화 관련해서 토론을 했는데 답답한 상황이에요. 에로영화의 문제는 2000년대 초반 표현의 자유 프레임에서 멈춰있어요. 여성적 포르노, 쾌락에 대한 이야기들도 나왔지만 이제는 너무 낡았고, 누구도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이슈가 되어버렸어요. 하지만 여전히 에로영화는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고 소비자 중에서 상당 부분이 여성으로 추정돼요.
제가 토론을 하다가 셰어의 활동을 봐라 이런 말을 했어요.(웃음) 성재생산 권리 운동은 예전부터 제자리 걸음이거나 잊혀진 이슈들을 현재화하는 과정을 해냈고, 여전히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안에서 몸의 문제, 임신중지와 더불어서 몸의 쾌락과 이런 부분들에 다른 언어를 만들어간다는 점이 너무 좋았어요. 낡고 낙후된, 지루하고 지겹다고 생각하는 이슈를 다른 프레임으로 전환하는 거라서요.
제로섬 같은 공회전을 하던 이슈에 이것을 국가에 책임을 묻는 방식을 가져온 것도 중요했죠. 세월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왜 이것이 국가 책임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려웠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셰어에게 그런 전환의 활동을 기대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시 에로영화를 예로 든다면, 낡아빠진 에로영화의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고 그걸 제작하는 과정은 어때야 하는지 질문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의 실제 사회적 조건이 어떤지 드러내고, 꽉 막힌 성 담론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면서 사회정의와 연결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죠. 기회가 된다면 당연히 함께 하고 싶고요.
셰어 셰어도 일란 조이님과 다양한 활동들을 함께 이어나가면 좋겠어요! 그리고 연분홍치마의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해 셰어도 함께하겠습니다💜 (연분홍치마 정기후원 가입하기)
* 조이풀 인터뷰는 한 달에 한 번 셰어 활동가와 조이(후원회원)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곳곳에서 멋진 삶을 짓고 있는 조이를 소개하며 우리의 연결고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갑니다. 조이의 이야기를 통해 셰어의 활동은 확장되고, 조이의 일상과 셰어가 연결될수록 셰어의 활동은 풍요로워질 거예요. 조이라면 누구나 조이풀 인터뷰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셰어는 조이 여러분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15화] 김일란 조이님 인터뷰 :
20년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셰어를 만난 김일란 조이님의 이야기!
사진: 연분홍치마 사무실에서 지내는 고양이 쿠로를 안고 커텐앞에서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해준 김일란 조이님
셰어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도 공력이 만만치 않은 조이님을 모셨습니다.🙂
일란 다큐멘터리랑 인권활동과 페미니즘 운동을 20년째 하고 있는 (더 되긴 한 것 같지만) 올해가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20주년이에요. 김일란입니다. 반갑습니다.
용주골과 용산, <마마상>과 <두개의 문>, <공동정범>, 그리고 다시…
셰어 단체 설립 20주년을 맞이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어떠신가요? 연분홍치마는 페미니즘, 인권의 관점에서 영상작업을 통해서 사회운동을 해나가는 독특한 단체죠. 독자여러분들도 연분홍치마 홈페이지에서 작업 이력을 보면 어떤 현장과 함께 활동해왔는지 아실 수 있을거에요! https://pinks.or.kr/
일란 최근에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는데요. 다큐를 2004년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2005년에 <마마상 : 리멤버 미 디스 웨이>를 만들었어요.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고 나서 2006년도까지 여성운동 안에서 성매매와 성노동 담론과 현장에서 엄청난 논쟁이 있었잖아요. 의도하지 않게 그 한복판에서 <마마상> 작업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정체를 묻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때는 성노동 개념하에 운동하고 지지하고 연대한다는 입장을 낸다는 게 겁이 나는 마음이 있었어요. 상대가 논리로 물어보면 논리는 없는데(웃음) 나의 마음에 이끌림이 있을 뿐... 명확하게 저의 입장을 설명하진 못했지만 <마마상>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일생을 다루면서 성매매 근절이 아닌, 하지만 분명하게 비범죄화를 주장하진 못하는 어정쩡한 관점으로 영화를 만들었어요. 이게 내내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민성노련과 연대를 했고, 2006년 성노동자의 날 기록 촬영도 했었는데.
2009년 용산참사가 일어나고 그 현장에서 활동을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성노동 이슈는 조금 저에게 잊혀지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용산에 가서 전철연 동지를 만났는데 민성노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평택역 앞 집회도 이야기하고. 어떻게 아시냐고 했더니 그때 성노동자들과 철거 투쟁하면서 같이 집회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첫번째 성노동자의 날 집회 때 본인들도 있었다고. 신기하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때도 더 고민을 이어가진 못했는데 최근에 성노동, 재개발, 트랜스젠더 경험을 키워드로 하는 동료들을 만나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됐어요. 끊어졌던 다리가 다시 이어지는 느낌으로 그때 고민을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20년만에요. 순환의 느낌과 반복의 느낌인데 그때와는 또 다른. 뭐랄까 시간이 20년이 지나서 다시 그 이슈를 마주했을 땐 비슷한 것도, 굉장히 다른 것도 있었어요. 어떤 부분은 내가 고민해서 논리가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간 활동해온 이들의 궤적을 통해서 깨닫는 게 있고요. 그때 미처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네 하면서 다시 돌아온 느낌이에요. 그때와 비슷하지만 그때와는 다른. 그렇지만 조금 더 단단해진 느낌이에요. 뭔가 인생이 한 바퀴 도는 느낌을 느끼고 있어요.
셰어 최근 집결지 강제 폐쇄가 일어나고 있는 파주 용주골과도 인연이 있었다고요.
일란 2006년도에 성매매특별법 시행된 이후에 현장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집결지가 가장 타격이 크다고 알려졌는데 그때 실제로 종사자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무작정 용주골에 가게 되었고, 어슬렁 거렸어요. 한 업소의 마담 언니가 “누구에요? 못보던 얼굴들인데?” 하다가 업소에 들어오라고. 이런저런 계기로 친해져서 “자주 와서 인터뷰 좀 해도 될까요?” 여쭸는데 아무 때나 오라고 했어요. 매주 월요일 새벽 6시에 2달 동안 인터뷰를 했어요. 이번에 용주골 상황이 벌어지면서 그때 기록을 찾았는데 이사 다니고 하면서 없어졌더라고요. 그때 사진 찍은 것 몇 장정도 남아있어요.
셰어 아이고 기록이 없어졌더니 안타까워요. 이번에 다시 가보니 어떻던가요?
일란 한번밖에 못 갔지만 여전히 예전 업소들도 있고. 이모들과 대화해봤더니 그 업소들을 알더라고요. 마담이라고 부르던 곳은 별로 없었어서 저기였다 이렇게 가르키더라고요. 예전에 마담언니랑 종사자분들이랑 같이 밥 먹고 이불 덮고 귤 까먹으면서 얘기도 하고 그랬어요. 7~8번 만나서 2시간씩 인터뷰를 했는데. 그 당시에 한국에 집결지의 실제 구조와 생활, 이동하는 상황이나 선불금의 문제 등에 대해서 알게 됐죠.
성병 관련 검사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게 됐어요. 근처 정해진 병원에만 다니는데 다른 병원에 가면 마음이 불편하고 눈치보이는데 그 병원에 가면 마음이 편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안전하다는 느낌이 집창촌에 있었다고 하셨던 부분이 인상적으로 남았어요. 삼촌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계속 왔다갔다 하는 게 진상 손님으로부터 보호가 되고, 비상벨이 있어서 바로 연락이 되도록 하고 등등. 20년만에 그 현장을 다시 마주하니 혼자 감회에 젖기도 했어요.
셰어 서두에 인생을 한바퀴 돌아서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라고 했는데 좀 더 듣고 싶어요.
일란 20년의 소회는 잘 모르겠고. 이제는 나이가 드니까. 사회적인 이슈도 중요한데 내 인생이 더 중요해진 느낌이에요. 어쨌든 몸의 변화나 노화라고 하는 것이 예전에는 크게 영향을 안미쳤는데, 이제는 엄청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내 몸이 반응하는 것에 활동을 하게 되어요.
40대 후반쯤 되었을 때 이게 아마 갱년기의 느낌이기도 했는데 엄청 허무한 거예요. 내 안에서 의미가 잘 안만들어지는 느낌이었어요. 왜 나는 활동을 했지?라는 질문을 하고, 왜 여전히 이렇게 위험하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 견디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 둘 데 없는 시간을 한참 보낸 것 같아요. 그런데 <에디와 앨리스> 작업을 하면서 마음을 좀 잡을 수 있었어요. 나한테 영화란? 활동이란? 퀴어란?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영화를 통해 새로운 서사 만들기를 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표현 전략을 통해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어요. 트랜스여성들의 서사를 매체적인 감각을 경유하면 더욱 확장되지 않을까? 다양한 트랜스 서사가 있고 표현하는 방식도 굉장히 다양하다. 그걸 내가 입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다시 시도 하게 되었어요.
여기 앞에 있는 타리가 두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지난 활동에 대해서 허무해하고 허탈해 할 때 “일란이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읊어줄까?”가 있었고, 또 한 가지는 몇년 전에 “활동가는 40세가 기점인 것 같다. 계속 같이 활동하고 싶은 사람과 안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같이 활동하고 싶은 사람이 되자라고 마음을 먹고(웃음). “새삼 읊어줄까?” 라는 동료가 있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떤 순간들은 많은 걸 같이 했고, 또 따로 각자 한 것도 있지만 친분을 넘어 활동을 함께 현장에 있었음을 증언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묘하게 다가왔어요.
그런 텀이 지나고 최근에 수엉과 여름님이 성노동, 트랜스, 재개발 이라는 키워드를 들고 함께 작업을 해보자가 저에게 다가왔을 때 뭔가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었어요. 되게 고마웠어요. 이제 내가 한 보따리 경험한 걸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다시 다르게 시작할 수 있겠구나.
사진: 김일란 조이님의 인터뷰 장면. 테이블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른쪽 뒤편에 <3XFTM> 영화 포스터가 있다.
<3XFTM>에서 <에디의 앨리스>까지
셰어 조이풀 인터뷰를 읽는 사람들이 <에디와 앨리스>라는 작품이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해하실 것 같아요.
일란 트랜스젠더 이슈를 접하고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 하게 된 계기는 2006년 민주노동당 최현숙 성소수자위원장의 팩스였어요.(웃음) 당시 성전환자성별변경법제정을 위해서 연대체를 만들자는 제안을 보내주셨죠. 당시에 연분홍치마가 생긴지 얼마 안됐을 때였어요. 어떤 활동들을 해나갈까 고민하던 시기였는데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느꼈어요. 트랜스젠더가 어떤 판사를 만나서 운명이 바뀌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계획하고 정리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연대를 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성전환자 인권실태조사를 함께 하게 됐어요. 당시에는 인터넷 조사가 활발하지 않아서 직접 설문지를 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태원에 여보여보와 같은 트랜스 업소에 무작정 방문하게 된거예요. 지금까지 이루어진 트랜스젠더 조사 중에 업소에서 일하는 트랜스여성의 참여가 가장 높았던 조사라서 각별한 의미가 있어요.
그 작업을 하고 나서 남는 고민들을 가지고 다큐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페미니스트로서 연대하였지만 트랜스젠더가 겪는 몸의 감각을 시각화하거나 감각화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싶었는데 능력이 안됐어요. <3XFTM> 상영할 때 관객 질문 중 하나가 “나는 비성전환자 여성인데 당신이 가슴 수술한 것 때문에 너무 불편하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때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한무지씨가 이렇게 말했죠. “당신의 가슴과 나의 가슴의 의미가 다르다. 이 점을 이해받고 싶다.” 나중에 무지랑 이런 이슈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영화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무지가 페루로 떠나기 전에 <3XFTM> 2를 만들자고 얘기해서, "그래 페루 갔다가 돌아오면 만들자" 했는데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려워졌죠.
다시는 트랜스젠더 영화는 안만들어야지 생각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에디가 자기 수술할거고 다큐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한참 망설였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얘기가 있을까? 무지하고의 약속을 이렇게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사실 저를 확 자극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제가 요즘 트랜스여성에 대한 다큐를 해야할까 고민중이에요 했는데. 그 분이 “트랜스젠더 이슈 가지고 더 할 얘기가 있나?” 라고 했고, 갑자기 빈정이 상했어요. 트랜스 서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이제 시작일 뿐인데. 그래서 그 말을 반박하고 싶고,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오기가 생겼어요. 무지에 대한 약속이 20%, 오기가 80%.(웃음) <에디와 앨리스> 작업 시작을 해서 한참 달려왔는데 어려운 작업인 것은 확실하네요.
셰어 어떤 다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일란 두 주인공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자랑하고 싶기도 하지만, 트랜스젠더가 몸으로 겪는 감각이 상상될 수 있는 힌트들이 많은 다큐이길 바랬어요. 그것을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특성으로 보여주고 싶은데, 아직도 헤매고 있어요.
셰어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
일란 조금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는데, 저한테는 여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영화란 무엇인가 이 질문이 비슷해요. 두 가지다 본질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아니라 유효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의미를 갖게 하는 것 같아요. 여성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나와 에디, 엘리스가 같이 만들면 되는구나. 그 경험에 의미를 붙이면 되는 구나, 이게 내가 영화를 인식하는 과정과 같구나. 이게 과정에 되게 중요하게 느껴졌어요.
트랜스서사라는 걸 지배적인 서사와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은 욕망이 중심에 있어요. 트랜스젠더와 영화의 시간성이 비슷하구나라는 걸 발견하고 있어요. 그걸 잘 드러내면 관객들이 트랜스젠더의 몸과 시간을 이해하면서도 영화를 보는 것이 의미있겠다 싶은 거죠. 영화안에서 일어나는 회고, 반복, 편집, 플래시백, 중첩 같은 시간성이 트랜스젠더가 정체성을 찾아가고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을 느끼는 방식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체화의 과정을 영화적 체험으로 구현하는 것을 계속 시도하는 중이에요.
사진: 연분홍치마 사무실에서는 만식이와 연아라는 이름을 가진 고양이도 함께 지낸다. 책장 위에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외과 수술 이후를 살아가면서 트랜스 몸 경험과 겹쳐지기
셰어 그렇게 시간을 복잡하게 겪어나가는 몸에 대한 감각은 일란님이 암투병을 통과하면서 체감했을 것 같기도 해요.
일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암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고 이게 44세인 거예요. 45세? 그때는 암 자체는 그렇게 두렵진 않았어요. 의사 친구가 얘기를 했는데 한국의 암발병률은 세계적이고 수술도 세계적인데 어지간한 대학병원에서 초기에 암수술은 생존률도 되게 높고 항암과정도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으니까 겁먹지말아라 했고 저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나는 몸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던 거 같아요. 몸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고 촬영의 도구로 느끼거나 게다가 외모와 헷갈리고(웃음). 그런 정도의 낮은 인식이나 존재감이었고 몸의 의미가 뭔지 몰랐어요. 그래서 암에 걸렸을 때 이것을 속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내가 몸을 잘 관리하고 좋게 지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가 저질렀는데 누구 탔을 할거여~' 그런 마음이었어요. 수술 잘 받고 하면 되겠다 했는데 오히려 외과적 수술 이후가 어려웠어요.
위의 상당 부분을 절제하니까 위의 기능을 하는 장기가 없어졌기 때문에 소장의 일부를 위처럼 기능할 수 있게 수술을 했었어요. 그것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컸던 것은 원래 기능을 하는 부분이 없어지니까 다른 부분이 대체해줬는데 적응하고 훈련하고 근육을 키우는 게 중요한 거예요. 수술 직후에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은 처음에 뭘 먹을 때 체하고 불안하고 이동도 어려웠어요. 화장실 가는 것도 무섭고 공포스럽고 그래서 잘 안먹게 되고. 내 몸이 무섭고. 밤에 혼자있을 때 찾아오는 고통도 무섭기도 하고. 여러 책을 읽으면서 위안을 받기도 했지만 복통이나 두드러기, 알 수 없는 고통을 거쳐서 지금은 많이 안정이 됐어요. 하지만 후유증이 계속 있어요. 내 몸이 혈당 관리를 잘 못해요. 당뇨환자랑 비슷하고 혈당 스파이크라고 해서 갑자기 치솟다가 떨어지고. 지금도 아이스크림이나 고혈당의 음식은 안먹고 인스턴트도 잘 안먹고 있어요.
셰어 화장실 공포가 어떤 건지 좀 더 얘기해줄 수 있나요?
일란 갑자기 설사하거나 갑자기 배탈나거나 하는 상황이 발생하니까 외출이나 이동에 공포가 생겼어요. 장이 위치가 바뀌니까 자꾸 꼬이는거예요. 그래서 수술을 한번 더 했어요. 장이 민감하니까 소화를 잘 못 시켜서 꾸룩꾸룩 소리도 많이 나고 식은땀이 날 때도 있고 그러니까요. 이제 많이 줄었긴 했는데 이젠 두려움만 있는 상태에요.
이 경험이 에디랑 되게 비슷했어요. 에디의 경우에도 대장으로 질을 만들고 나서 다이레이션을 하는 게 장기가 훈련하는 과정이죠. 놀라운 건 새롭게 자리 잡으면 그 역할을 하더라고요. 완벽한 대체물은 아니더라도 그 기능을 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직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가기도 했어요. 조직이 하나의 유기체라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이 빠지면 다른 사람이 그 업무를 수행할 수 있고 자기 만의 색깔로 수행할 수 있다 이런 생각. 본래 그 사람만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조직은 건강하지 않다. 나중에 듣고 보니까 고통을 이미지화 하는 게 고통을 잊는 방식이라고도 하더라고요. 고통을 시각화하고 이해하면서 실제로 고통이 줄어요. 아 내가 스스로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그런 생각을 했구나 했어요.
한나 아렌트가 스토리텔링이 치유라고 이야기하면서 ‘고통이 무엇인지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와 경험이 있으면 잊을 수 있다.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인과성을 발견하거나 설명할 수 있으면 고통이 줄어든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해요. 제가 에디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니까 다이레이션을 하면서 느낀 고통을 완화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대요. 다른 다이레이션 한 언니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안해주는 데 저의 수술 경험을 공유하면서 서로 지지를 했던 것 같아요.
사진: 인터뷰하고 있는 김일란 조이님. 테이블위에 두팔을 올려놓고 앞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낡아빠진 것을 새롭게 만드는 힘을 가진 셰어
셰어 셰어가 설립되고 반가우셨나요? 퀴서비스 출연 제안도 해주셨어요. (보러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_Et7Vzjk5rQ)
일란 물론이죠. 낙태죄 폐지와 관련한 운동이 저에겐 굉장히 놀라웠어요. 낡아빠지고 아무도 건드리고 싶지 않은 이런 이슈를 어떻게 새로운 운동으로 해석하고 현재의 운동으로 만드는 전환의 과정이 특히나 놀라웠어요. 물론 셰어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셰어가 단체 설립을 하면서 그 운동을 이후에 계속 이어나가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중요한것 같아요.
최근에 에로영화 관련해서 토론을 했는데 답답한 상황이에요. 에로영화의 문제는 2000년대 초반 표현의 자유 프레임에서 멈춰있어요. 여성적 포르노, 쾌락에 대한 이야기들도 나왔지만 이제는 너무 낡았고, 누구도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이슈가 되어버렸어요. 하지만 여전히 에로영화는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고 소비자 중에서 상당 부분이 여성으로 추정돼요.
제가 토론을 하다가 셰어의 활동을 봐라 이런 말을 했어요.(웃음) 성재생산 권리 운동은 예전부터 제자리 걸음이거나 잊혀진 이슈들을 현재화하는 과정을 해냈고, 여전히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안에서 몸의 문제, 임신중지와 더불어서 몸의 쾌락과 이런 부분들에 다른 언어를 만들어간다는 점이 너무 좋았어요. 낡고 낙후된, 지루하고 지겹다고 생각하는 이슈를 다른 프레임으로 전환하는 거라서요.
제로섬 같은 공회전을 하던 이슈에 이것을 국가에 책임을 묻는 방식을 가져온 것도 중요했죠. 세월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왜 이것이 국가 책임인지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려웠어요. 그래서 앞으로도 셰어에게 그런 전환의 활동을 기대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시 에로영화를 예로 든다면, 낡아빠진 에로영화의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고 그걸 제작하는 과정은 어때야 하는지 질문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의 실제 사회적 조건이 어떤지 드러내고, 꽉 막힌 성 담론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면서 사회정의와 연결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죠. 기회가 된다면 당연히 함께 하고 싶고요.
셰어 셰어도 일란 조이님과 다양한 활동들을 함께 이어나가면 좋겠어요! 그리고 연분홍치마의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해 셰어도 함께하겠습니다💜 (연분홍치마 정기후원 가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