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욕망에 대한 성찰은 왜 ‘섹스할 권리’의 확장으로 연결되지 않나
- 아미아 스리니바산, <섹스할 권리>가 열어준 생각과 닫힌 질문에 대하여
나영 /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엘리엇 로저. 소위 ‘인셀 incel’이라고 불리는 ‘비자발적 독신주의자 involuntary celibate’인 그는 2014년 5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세 명의 아시아계 남성을 칼로 찔러 살해한 후 캘리포니아대학교 캠퍼스 인근에 있는 여학생 사교 클럽 ‘알파 파이’로 차를 몰고 가서 여성 세 명을 총으로 쏘았고, 다시 차를 타고 달리며 닥치는대로 총을 쏘아서 학생 두 명을 죽였다. 이 과정에서 열네 명이 부상을 입었고, 엘리엇 로저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했다.
그는 ‘나의 일그러진 세상: 엘리엇 로저의 이야기’라는 회고록 겸 선언문을 작성해서 부모와 치료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이메일로 보냈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나는 그저 세상과 어울리며 행복하게 사는 삶을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쫓겨나고 거부당했으며 홀로 내던져져 외로움과 무의미함이라는 존재를 견뎌야 했다. 이건 모두 여자라는 인간 종이 내가 가진 가치를 볼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책 <섹스할 권리>의 중심이 되는 저자의 글 ‘섹스할 권리’는 인셀 엘리엇 로저의 사례를 짚으며 시작된다. 백인과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혈통이며 성공한 영국인 영화제작자의 아들이었던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도 경제적 특권을 누리고 자랐으나, 자신이 금발이 아니고, 키가 작고, 운동신경이 없으며, 수줍음이 많아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불행하게 여겼으며, ‘열등하고 못생겼으며 노예의 자손’인 흑인 남자애가 ‘영국 귀족의 자손’인 자신도 못 만나는 백인 여자애와 만난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그는 인기가 없고 연애를 못한다는 이유로 남자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으나, 그의 분노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지 않고 섹스를 해주지 않은 여성들을 박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향했다. 사건 이후 인셀 그룹은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에 “‘그 못된 년들’ 중 한 명만 엘리엇 로저와 성관계를 했어도 누구도 죽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저자는 로저 사건과 인셀들의 반응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분석에서 남성의 성적 권리의식, 여성에 대한 대상화와 폭력이 주로 언급되었으나 욕망의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로저와 인셀들의 성에 대한 권리의식, 여성들을 향한 분노를 정당화해주는 기제는 무엇인가. 인셀 현상을 만드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배경, 데이팅·연애 시장에서 나타나는 성적 선호나 욕망은 어떻게 관련되어 있고 현재 어떠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누군가에게 꼴리거나 꼴리지 않는다는 것에는 어떠한 사회경제적 지위와 가치 평가가 부여되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연결해 보는 것이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권리, 섹스할 권리, 욕망, 욕구, 취향, 지향, 동의와 합의 등에 관한 복잡한 질문들을 마주하게 된다.
<섹스할 권리> 책 표지 ⓒ 창비
욕망에 대하여
성적 욕망이란 그저 선천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충동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과 퀴어이론에서 숱하게 논의해 온 주제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60-80년대의 페미니즘 이론을 다수 검토하고 인용하는 반면 퀴어이론은 상대적으로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누구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누구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가부장적 체제 속에서 오랜 역사에 걸쳐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왔음을 밝혔다. 여성의 성적 욕망은 철저히 낙인찍히고 비가시화되거나 억압의 대상이 되지만 남성의 성적 욕망은 자연스럽고 언제든 분출하고 해소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든지, 여성이 남성의 성적 욕망을 위한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 여성들이 이성애적 요구와 규범에 충실하도록 교육받으며 가부장제 질서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일련의 훈육과 보상의 체계 등 성적 욕망의 정치경제적 구성을 분석하는 일은 여성들에게 성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주는 일이었다.
스리니바산은 주로 남성과 여성의 성적 욕망과 억압에 대해 분석했던 이들의 논의에서 좀 더 나아가 인종, 국적, 경제적·사회문화적 지위, 외모, 신체 조건 등에 따른 배경이나, 다양한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을 지닌 그룹에서도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성적 욕망의 조건들에 대해서 검토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성적 욕망의 장에 시장이 촘촘히 파고들어 움직이고 있는 세계에서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될만한 조건과 가치 위계가 무엇의 영향을 받고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는 이미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데이팅 앱에서 특정한 신체 조건이나 경제력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선택을 받는다는 것,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너무 부치 같은 사람보다는 ‘일스’(외모나 옷차림 등에서 레즈비언인 티가 나지 않는 사람)가 더 인기가 많다는 사실 등은 단지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그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사회경제적 조건으로부터 당연히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어떠한 사회적 배경 또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 사회나 커뮤니티 내에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소외되거나 고립된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조건이 그만큼 해당 사회나 커뮤니티에서 유리하지 않은 상태임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개인적인 취향이나 자연스러운 욕망, 심지어 정체성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조차도 실은 이미 정치적, 사회적 영향 하에 형성되어 온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와보자. 그렇다면 저자는 왜 로저 사건과 인셀들의 반응을 보며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다양한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특권을 지니고 있음에도 당연히 자신과 섹스를 해줘야 마땅할 여자들이 섹스를 해주지 않아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에 상처를 입히고 소외당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섹시한 금발의 헤픈 년’들이나 ‘동아시아 섹스돌’에 불과한 여자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야 마땅하다는 생각,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분배받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라는 인식의 오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권리 의식이 잘못되었다는 지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섹스라는 자원을 배분받지 못했다는 왜곡된 권리의식의 배경에는 타인의 욕망을 그저 내가 가져야 할 자원, 어떠한 사회적 위치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보상으로서 인식하거나, 나의 욕망이 사회가 규정한 틀 안에서 충족되지 않으면 그것을 ‘실패’로 여기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욕망의 지형은 더 다양할 수 있으며, 오히려 사회가 규정한 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내가 탐색하고 관계맺을 욕망의 자리도 더 넓어질 수 있음을 확인한다면, 타인의 욕망 또한 나에게 마땅히 주어질 자원이 아님을 인식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때문에 저자는 오히려 욕망에 대한 성찰은 그 동안 세상의 틀에 가로막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대상과 방향을 열어줄 수 있을 해방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섹스할 권리’는?
저자는 욕망을 개인이 마땅히 충족받아야 할 자원으로 인식하는 대신, 욕망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지형을 살피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의 위치를 찾아보라고 제안한다. “자신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를 바라보고, 정치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존경·감사·욕구의 느낌을 스스로에게 허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p.169)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스리니바산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욕망에 대한 훈육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해방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에 가깝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스리니바산의 논의는 독자를 다소 혼란스럽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이토록 욕망의 정치경제적 성격에 관해 파고들며 사회로부터 규정된 욕망의 틀로부터 해방되어 보라고 제안하는 반면에 ‘섹스할 권리’에 대해서는 “없다”고 반복해서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망이 그토록 정치경제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어째서 ‘섹스할 권리’는 것은 욕망에 대한 분석처럼 좀 더 깊이있고 구체적인 정치경제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없다”는 선언으로 끝나버리는가?
물론 저자가 ‘섹스할 권리’란 없다고 강조하는 배경에는 ‘섹스할 권리’,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섹스를 분배받을 권리, 필요하다면 누군가가 당연히 해줘야 하는 권리, 심지어 강제로 섹스할 수 있는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인식하는 로저나 인셀들, 대다수 남성들의 주장을 단호히 배격하기 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권리를 단순히 사회 구성원 간의 자원 분배 문제 정도로 생각하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하는 문제이지, “없다”고 선언함으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욕망과 함께 섹스할 권리에 대한 인식을 확장해 내는 적극적이고 새로운 지형도를 그리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욕망, 섹스, 동의/합의, 권리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장애여성을 위한 성교육 교재 <장애여성, 성을 밝히다> 2019. 삽화. @장애여성공감
우리의 욕망을 둘러싼 정치경제적·사회문화적 틀로부터 우리의 인식이 자유롭지 않듯, 섹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욕망과 섹스는 실타래처럼 똘똘 뭉쳐 엮여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섹스로 생각하는가. 지난 몇 년 간 셰어의 에브리바디 플레져랩 팀에서는 다양한 그룹을 만나 욕망과 섹스, 관계에 대해 탐색해왔다. 참여자들이 생각한 섹스의 시작과 끝, 섹스의 과정, 섹스에서 중요한 요소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넓고 다양했다. 섹스의 과정에서 만족감이나 성적 충만감을 느끼는 상황, 동의나 합의가 필요한 순간, 위험과 안전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자신의 몸에 대한 만족도나 위화감, 상대방과 자신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위계나 자존감, 섹스의 시작에서부터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서로에게 중요한 순간을 소통하는 과정이 모두 섹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주로 ‘남성 성기가 여성 성기에 삽입되는 것’을 섹스로 규정하지만, 이 사회에 살아가는 수많은 개인들에게 섹스의 의미는 훨씬 다양하다. 누군가에게는 탐색의 순간부터, 누군가에게는 밥 먹는 순간부터가 섹스의 시작이고, 만족감을 주는 행위와 순간들 또한 천차만별이며, 여기에는 단순히 몸이 맞닿는 행위만이 아니라 정서와 관계, 장소, 시간 등 무수한 요소들이 결합한다. 섹스가 이처럼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섹스에 대해 무엇을 사회적으로 보장받아야 하는지도 보다 폭넓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듯, 당연히 동의나 합의만으로 누군가의 욕망을 정당화하거나 서로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섹스할 권리’란 없다”고 단언하는 대신, 우리가 중요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은 그 동의와 합의의 배경에 몸에 대한 인식, 섹스에 대한 규범적 생각, 관계에서의 위계, 정치경제적 자원 등이 개입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여기에 개입하는 불평등과 차별, 낙인, 부정의를 이야기하며, 그로부터 평등과 정의에 대한 요구를 끌어올리는 일이다.
장애여성공감은 리얼돌이나 성서비스 도입의 필요성을 논의할 때마다 주로 장애 남성을 끌어들여 남성 중심의 성욕 서사와 실천방식을 중심으로 장애인의 성적 권리를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해온 바 있다. 이러한 논의들 속에서 오히려 장애여성과 성적소수자인 장애인들의 다양한 성적 취향과 욕망은 배제되며, 성서비스가 성적 권리로 요구되는 것이 오히려 장애인을 대상화하는 동시에 섹슈얼리티를 제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장애여성공감은 단순히 욕망을 해결하고자 구획된 서비스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성적 주체로서 존중받고 관계 안에서 성적욕망을 긍정하며 새로운 서사를 만들 수 있도록 확장된 고민을 해야한다고 지적한다.[ref]진은선, ‘성적권리를 지지하는 돌봄관계는 가능한가’, IL과 젠더 라운드테이블 <탈시설 이후 자기결정권, 돌봄, 섹슈얼리티를 통합적으로 고민하기>, 장애여성공감, 2022.12.28.[/ref] 우리는 권리를 배분되는 자원으로서 인식하는 데에 머물게 하지 않고, 평등과 정의에 대한 정치적 요구로서 적극적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섹스할 권리’ 역시 마찬가지다. 섹스에 대한 협소한 규정과 규범을 깨나가며, 평등한 성적 관계를 맺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과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들(이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노동할 권리, 보건의료에 대한 권리, 주거지를 가질 권리, 안전하고 위생적인 용품을 보장받을 권리, 탈시설하여 자신의 삶을 보장받고 살아갈 권리 등)을 더 많이 연결시켜 나갈 때 섹스도, 욕망도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리뷰] 욕망에 대한 성찰은 왜 ‘섹스할 권리’의 확장으로 연결되지 않나
- 아미아 스리니바산, <섹스할 권리>가 열어준 생각과 닫힌 질문에 대하여
나영 /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엘리엇 로저. 소위 ‘인셀 incel’이라고 불리는 ‘비자발적 독신주의자 involuntary celibate’인 그는 2014년 5월 자신의 아파트에서 세 명의 아시아계 남성을 칼로 찔러 살해한 후 캘리포니아대학교 캠퍼스 인근에 있는 여학생 사교 클럽 ‘알파 파이’로 차를 몰고 가서 여성 세 명을 총으로 쏘았고, 다시 차를 타고 달리며 닥치는대로 총을 쏘아서 학생 두 명을 죽였다. 이 과정에서 열네 명이 부상을 입었고, 엘리엇 로저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했다.
그는 ‘나의 일그러진 세상: 엘리엇 로저의 이야기’라는 회고록 겸 선언문을 작성해서 부모와 치료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이메일로 보냈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나는 그저 세상과 어울리며 행복하게 사는 삶을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쫓겨나고 거부당했으며 홀로 내던져져 외로움과 무의미함이라는 존재를 견뎌야 했다. 이건 모두 여자라는 인간 종이 내가 가진 가치를 볼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책 <섹스할 권리>의 중심이 되는 저자의 글 ‘섹스할 권리’는 인셀 엘리엇 로저의 사례를 짚으며 시작된다. 백인과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혈통이며 성공한 영국인 영화제작자의 아들이었던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도 경제적 특권을 누리고 자랐으나, 자신이 금발이 아니고, 키가 작고, 운동신경이 없으며, 수줍음이 많아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불행하게 여겼으며, ‘열등하고 못생겼으며 노예의 자손’인 흑인 남자애가 ‘영국 귀족의 자손’인 자신도 못 만나는 백인 여자애와 만난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그는 인기가 없고 연애를 못한다는 이유로 남자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으나, 그의 분노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지 않고 섹스를 해주지 않은 여성들을 박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향했다. 사건 이후 인셀 그룹은 남초 온라인 커뮤니티에 “‘그 못된 년들’ 중 한 명만 엘리엇 로저와 성관계를 했어도 누구도 죽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저자는 로저 사건과 인셀들의 반응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분석에서 남성의 성적 권리의식, 여성에 대한 대상화와 폭력이 주로 언급되었으나 욕망의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로저와 인셀들의 성에 대한 권리의식, 여성들을 향한 분노를 정당화해주는 기제는 무엇인가. 인셀 현상을 만드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배경, 데이팅·연애 시장에서 나타나는 성적 선호나 욕망은 어떻게 관련되어 있고 현재 어떠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누군가에게 꼴리거나 꼴리지 않는다는 것에는 어떠한 사회경제적 지위와 가치 평가가 부여되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연결해 보는 것이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권리, 섹스할 권리, 욕망, 욕구, 취향, 지향, 동의와 합의 등에 관한 복잡한 질문들을 마주하게 된다.
<섹스할 권리> 책 표지 ⓒ 창비
욕망에 대하여
성적 욕망이란 그저 선천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충동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과 퀴어이론에서 숱하게 논의해 온 주제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60-80년대의 페미니즘 이론을 다수 검토하고 인용하는 반면 퀴어이론은 상대적으로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누구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 누구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가부장적 체제 속에서 오랜 역사에 걸쳐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왔음을 밝혔다. 여성의 성적 욕망은 철저히 낙인찍히고 비가시화되거나 억압의 대상이 되지만 남성의 성적 욕망은 자연스럽고 언제든 분출하고 해소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든지, 여성이 남성의 성적 욕망을 위한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 여성들이 이성애적 요구와 규범에 충실하도록 교육받으며 가부장제 질서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일련의 훈육과 보상의 체계 등 성적 욕망의 정치경제적 구성을 분석하는 일은 여성들에게 성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중요한 열쇠를 제공해주는 일이었다.
스리니바산은 주로 남성과 여성의 성적 욕망과 억압에 대해 분석했던 이들의 논의에서 좀 더 나아가 인종, 국적, 경제적·사회문화적 지위, 외모, 신체 조건 등에 따른 배경이나, 다양한 성별정체성과 성적지향을 지닌 그룹에서도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성적 욕망의 조건들에 대해서 검토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성적 욕망의 장에 시장이 촘촘히 파고들어 움직이고 있는 세계에서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될만한 조건과 가치 위계가 무엇의 영향을 받고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는 이미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데이팅 앱에서 특정한 신체 조건이나 경제력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선택을 받는다는 것,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너무 부치 같은 사람보다는 ‘일스’(외모나 옷차림 등에서 레즈비언인 티가 나지 않는 사람)가 더 인기가 많다는 사실 등은 단지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그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사회경제적 조건으로부터 당연히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어떠한 사회적 배경 또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 사회나 커뮤니티 내에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소외되거나 고립된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조건이 그만큼 해당 사회나 커뮤니티에서 유리하지 않은 상태임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개인적인 취향이나 자연스러운 욕망, 심지어 정체성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조차도 실은 이미 정치적, 사회적 영향 하에 형성되어 온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와보자. 그렇다면 저자는 왜 로저 사건과 인셀들의 반응을 보며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다양한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특권을 지니고 있음에도 당연히 자신과 섹스를 해줘야 마땅할 여자들이 섹스를 해주지 않아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에 상처를 입히고 소외당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섹시한 금발의 헤픈 년’들이나 ‘동아시아 섹스돌’에 불과한 여자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야 마땅하다는 생각,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적극적으로 분배받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라는 인식의 오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권리 의식이 잘못되었다는 지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섹스라는 자원을 배분받지 못했다는 왜곡된 권리의식의 배경에는 타인의 욕망을 그저 내가 가져야 할 자원, 어떠한 사회적 위치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보상으로서 인식하거나, 나의 욕망이 사회가 규정한 틀 안에서 충족되지 않으면 그것을 ‘실패’로 여기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욕망의 지형은 더 다양할 수 있으며, 오히려 사회가 규정한 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내가 탐색하고 관계맺을 욕망의 자리도 더 넓어질 수 있음을 확인한다면, 타인의 욕망 또한 나에게 마땅히 주어질 자원이 아님을 인식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때문에 저자는 오히려 욕망에 대한 성찰은 그 동안 세상의 틀에 가로막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대상과 방향을 열어줄 수 있을 해방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섹스할 권리’는?
저자는 욕망을 개인이 마땅히 충족받아야 할 자원으로 인식하는 대신, 욕망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지형을 살피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욕망의 위치를 찾아보라고 제안한다. “자신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를 바라보고, 정치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존경·감사·욕구의 느낌을 스스로에게 허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p.169)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스리니바산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욕망에 대한 훈육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해방시키기 위한 프로젝트에 가깝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스리니바산의 논의는 독자를 다소 혼란스럽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이토록 욕망의 정치경제적 성격에 관해 파고들며 사회로부터 규정된 욕망의 틀로부터 해방되어 보라고 제안하는 반면에 ‘섹스할 권리’에 대해서는 “없다”고 반복해서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욕망이 그토록 정치경제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어째서 ‘섹스할 권리’는 것은 욕망에 대한 분석처럼 좀 더 깊이있고 구체적인 정치경제적 분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없다”는 선언으로 끝나버리는가?
물론 저자가 ‘섹스할 권리’란 없다고 강조하는 배경에는 ‘섹스할 권리’, 좀 더 명확히 말하자면 섹스를 분배받을 권리, 필요하다면 누군가가 당연히 해줘야 하는 권리, 심지어 강제로 섹스할 수 있는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인식하는 로저나 인셀들, 대다수 남성들의 주장을 단호히 배격하기 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권리를 단순히 사회 구성원 간의 자원 분배 문제 정도로 생각하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하는 문제이지, “없다”고 선언함으로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욕망과 함께 섹스할 권리에 대한 인식을 확장해 내는 적극적이고 새로운 지형도를 그리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욕망, 섹스, 동의/합의, 권리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장애여성을 위한 성교육 교재 <장애여성, 성을 밝히다> 2019. 삽화. @장애여성공감
우리의 욕망을 둘러싼 정치경제적·사회문화적 틀로부터 우리의 인식이 자유롭지 않듯, 섹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욕망과 섹스는 실타래처럼 똘똘 뭉쳐 엮여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섹스로 생각하는가. 지난 몇 년 간 셰어의 에브리바디 플레져랩 팀에서는 다양한 그룹을 만나 욕망과 섹스, 관계에 대해 탐색해왔다. 참여자들이 생각한 섹스의 시작과 끝, 섹스의 과정, 섹스에서 중요한 요소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넓고 다양했다. 섹스의 과정에서 만족감이나 성적 충만감을 느끼는 상황, 동의나 합의가 필요한 순간, 위험과 안전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자신의 몸에 대한 만족도나 위화감, 상대방과 자신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위계나 자존감, 섹스의 시작에서부터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서로에게 중요한 순간을 소통하는 과정이 모두 섹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사회에서는 주로 ‘남성 성기가 여성 성기에 삽입되는 것’을 섹스로 규정하지만, 이 사회에 살아가는 수많은 개인들에게 섹스의 의미는 훨씬 다양하다. 누군가에게는 탐색의 순간부터, 누군가에게는 밥 먹는 순간부터가 섹스의 시작이고, 만족감을 주는 행위와 순간들 또한 천차만별이며, 여기에는 단순히 몸이 맞닿는 행위만이 아니라 정서와 관계, 장소, 시간 등 무수한 요소들이 결합한다. 섹스가 이처럼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섹스에 대해 무엇을 사회적으로 보장받아야 하는지도 보다 폭넓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듯, 당연히 동의나 합의만으로 누군가의 욕망을 정당화하거나 서로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섹스할 권리’란 없다”고 단언하는 대신, 우리가 중요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은 그 동의와 합의의 배경에 몸에 대한 인식, 섹스에 대한 규범적 생각, 관계에서의 위계, 정치경제적 자원 등이 개입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여기에 개입하는 불평등과 차별, 낙인, 부정의를 이야기하며, 그로부터 평등과 정의에 대한 요구를 끌어올리는 일이다.
장애여성공감은 리얼돌이나 성서비스 도입의 필요성을 논의할 때마다 주로 장애 남성을 끌어들여 남성 중심의 성욕 서사와 실천방식을 중심으로 장애인의 성적 권리를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해온 바 있다. 이러한 논의들 속에서 오히려 장애여성과 성적소수자인 장애인들의 다양한 성적 취향과 욕망은 배제되며, 성서비스가 성적 권리로 요구되는 것이 오히려 장애인을 대상화하는 동시에 섹슈얼리티를 제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장애여성공감은 단순히 욕망을 해결하고자 구획된 서비스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성적 주체로서 존중받고 관계 안에서 성적욕망을 긍정하며 새로운 서사를 만들 수 있도록 확장된 고민을 해야한다고 지적한다.[ref]진은선, ‘성적권리를 지지하는 돌봄관계는 가능한가’, IL과 젠더 라운드테이블 <탈시설 이후 자기결정권, 돌봄, 섹슈얼리티를 통합적으로 고민하기>, 장애여성공감, 2022.12.28.[/ref] 우리는 권리를 배분되는 자원으로서 인식하는 데에 머물게 하지 않고, 평등과 정의에 대한 정치적 요구로서 적극적으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섹스할 권리’ 역시 마찬가지다. 섹스에 대한 협소한 규정과 규범을 깨나가며, 평등한 성적 관계를 맺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과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들(이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노동할 권리, 보건의료에 대한 권리, 주거지를 가질 권리, 안전하고 위생적인 용품을 보장받을 권리, 탈시설하여 자신의 삶을 보장받고 살아갈 권리 등)을 더 많이 연결시켜 나갈 때 섹스도, 욕망도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