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03월[몸] 차이 나는 몸들 사이에서(의) 안전을 상상하기

박종주

우리는 몇 가지 차이들, 예를 들면 성별, 인종, 장애 여부, 나이 같은 것들을 기준 삼아 몸들을 분류한다. 염색체나 생식기의 차이, 피부색이나 몇 가지 신체적 특징들의 차이, 외모나 능력의 차이 같은 것들은 쉽게 포착된다. 남자는 어때야 하고 여자는 어때야 한다는 식의 의미 부여를 빼고 생각하더라도, 인종차별이나 장애인차별, 연령차별이 사라진 후의 세계를 생각해 보더라도, 그 자체로 분명해 보이는 차이들이다. 게다가 이곳은 여전히 차별로 가득한 세상이므로, 이러한 차이들은 나와 남을, 동지와 적을 구분하는 데에 요긴한 것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실은 순전한 ‘차이 그 자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두 사람이 있으면 두 개의 서로 다른 몸이 있게 된다. 하지만 지구상의 인구가 이미 여러해 전에 75억 명을 넘어섰음에도 여간해서 우리는 그만큼이나 수많은 서로 다른 몸을 상상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지조차 않는다. 앞에서 예로 든 몇 가지 기준들 중 하나만을 골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같은 것으로 분류되는 성기들조차도 각각 다르게 생겼으며 매끈한 곡선을 이루도록 줄을 세운 후 그 스펙트럼의 가운데에 선을 긋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여러가지 차이가 존재한다. 염색체, 내외부 생식기, 호르몬, 이 모두가 마찬가지다.[ref]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셰어 이슈페이퍼 지난 호의 〈섹스도 젠더도 스펙트럼이다〉 1편(http://srhr.kr/2020/865) 및 2편(http://srhr.kr/2020/897)을 참고.[/ref]

이것은 과학이나 의학이 어떤 예외들을 다루는 방식 탓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 또한 아니다. 페미니즘은 순전한 차이, 중립적인 차이라는 허구 너머를 탐구해 왔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차이라는 개념의 두 가지 의미를 제시한다. 첫째는 “(오렌지와 사과의 차이 같이) 이미 존재하는 두 실체 사이의 차이”이고 두번째는 “구성하는(constitutive) 차이, 자신이 생산하는 실체들에 앞서 존재하는 차이”다. 성차는 후자에 해당하는 차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존재를 비교함으로써 도출되는 차이가 아니라 표준으로서의 남성이라는 유일한 존재의 나머지로서 여성이라는 자리를 설정하기 위해 선언되는 차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두 개의 성이 실존하기 위한 […] 공간은 없으며 단지 하나의 성과 그 반대항이 있을 뿐”이라는 의미에서, ‘두 성별 사이의 차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구도에 있는 것이다.[ref]Elizabeth Grosz, “Histories of the Present and Future. Feminism, Power, Bodies,” in Cohen Jeffrey Jerome and Gail Weiss edited, Thinking the Limits of the Body,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3, pp. 21-22. 마지막에 인용한 문구는 뤼스 이리가레의 성차 개념을 설명한 것이다.[/ref]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차별이 사라진 이후에도 남을 차이가 아니라 차별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의 차이다.

성 뿐 아니라 인종, 장애, 나이와 같은 ‘차이’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여성, 소수인종, 장애인, 노인, 아동청소년 등의 몸은 표준이 되는 신체, 합리적이고 건강하며 지배인종에 속하는 남성 신체의 잔여물로 배치됨으로써 애초에 그 몸과의 차이를 드러내고 실험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자신의 신체 조건을 극복했다는―여자 치고는 강단 있다는, 장애를 딛고 일어섰다는, 어른스럽다는 등의―평가를 받음으로써 표준과 유사한 것이 되거나 그저 무력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되거나 하는 두 개의 길만이 주어진다. 이 몸들이 갖고 있는 삶의 조건들, 그 삶을 살아내는 방식들은 숨겨지고 다만 동정의 대상이나 배척의 대상으로 지목될 때에만 두드러지는 존재가 된다. 이 둘 모두를 거부할 때, 다시 말해 허락된 공간을 벗어나 어떤 차이를 드러낼 때에는 “무단 침입자”, “‘그 자리에 부적당한’ 존재”로 여겨지며 경계를 받게 된다.[ref]너멀 퓨워 지음, 김미덕 옮긴, 『공간침입자: 중심을 교란하는 낯선 신체들』, 현실문화, 2017, 23쪽. 이 책은 성별과 인종의 지평에서 “[과거에는 금지되었으나 이제는 공식적으로는 개방된 여러] 공간에 자리 잡을 확고한 권리가 없지만 그대로 여전히 내부자”인 이른바 “공간 침입자”들을 탐구함으로써 이 침입이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의미를 띠며 벌어지는지, 이들이 침입자로 여겨지게 하는 기존의 사회 구조는 어떠한 것인지―“누가 비가시적이고 표가 나지 않으며 암묵적인 신체규범으로 통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경합과 공모가 일어나는지를 상세히 논의한다(22-23쪽).[/ref]

illustration by Sarah Hofstedt

지난 연초, 한 트랜스젠더 여성 A씨가 여대 입시에 합격한 사실을 알리면서 이어진 일련의 반응들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른 몸’, 법적 성별을 정정하기 위해 수술이 필요했고 XY 염색체를 가졌으리라 추정되는 몸의 침입에 날을 세운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A씨의 입학을 막기 위한 집단행동을 감행했다. 수술로는 어차피 속일 수 없다고, 보기만 하면 눈치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몇 가지 문제적인 논점들이 등장한다.

첫째, 지금 여대에 다니고 있거나 이미 여대를 거쳐 간 트랜스/젠더/퀴어들의 존재는 완전히 삭제되었다.

둘째, (예를 들면 입학 요건에 XX 염색체를 갖고 있을 것을 명시해야 한다는 주장 속에서) 무엇을 차이로 설정할 것인가를 취사선택하는, 다시 말해 적극적으로 차이를 만들어 내는 활동이 벌어졌다.

셋째, A씨를 비롯한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존재와 욕망은 이론의 여지 없이 여성들의 파이를 빼앗거나 여성들에게 성범죄를 가하려는 악의로 환원되었다.

손상 없는 남성의 신체만을 유일한 실체로 삼고 여성의 몸도 장애인의 몸도 모두 차이를 논할 수 없는 나머지로 만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시스젠더를 절대적 가치로 설정함으로써 차이를 가질 수조차 없는 단순한 반대항으로서 트랜스젠더의 몸을 만들어 낸 것이다. A씨의, 그 이전의, 그 이후의 트랜스/젠더/퀴어들이 살아 왔고 살아갈 다양한 삶과 욕망의 서사들은 담론장의 시야에 등장하지 못하거나 순수한 악으로서만 등장하게 된다. 자신들의 몸과 삶이 시스젠더들의 것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를, 자신들 서로의 것과는 또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를 이야기할 기회를 잃고 마는 것이다.

이때 사라지는 것은 트랜스/젠더/퀴어들이 자신의 차이를 드러낼 기회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같은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표준의 위치를 차지한 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 기회를 잃는다.

서로가 같기에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공간, 그렇게 서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을 꿈꾸고 있다면 이를 아쉬워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가 같은지 다른지를 묻지 않은 채 다만 믿는 것만으로, 오직 의심해보지조차 않았기에 가능한 신뢰로 확보되는 안전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생김새나 목소리 혹은 행동거지로 식별해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배제하고 (적어도 현재의 틀로서는) 동질적이어 보이는 것만이 남았을 때, 다시 말해 상상적인 안전과 위험을 구분해 낼 모든 수단을 잃었을 때 그 공간은 어떤 곳이 되는가?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 중에조차 매 순간 경험하고 있는 우리의 삶에 비추어 본다면 그런 공간에서 얻을 수 있는 안전은 단 한 가지뿐일 것이다.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축출 당하지 않을 안전, ‘같다’는 인증을 받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오해와 매도로부터의 안전. 차이라는 것이 이미 서로 다른 둘 사이에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위치를 만들어내는 작용 그 자체라면 그 안전조차 보장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저 몸은 나의 몸과 다르다고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서로 다른 몸들을 생각한다면, 나의 몸조차도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차이를 대하는 새로운 방법, 안전을 상상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동질성을 상상하고 갈망하는 곳에서 차이는 쉽게 예측불가능하고 이해불가능한 것으로,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그것을 넘을 수 없는 절대적인 차이로 여기지 않는다면, 살펴보고 대화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다면 예측할 수 있고 예측이 빗나간다 해도 대처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예측하기 전에 소통하고 합의할 수 있다. 대화의 불가능성을 상정하고 그 필요성을 부정함으로써―집단 내부의 허구적인 동질성과 그에 따른 허구적인 예측가능성을 지어냄으로써―안전을 그저 상상하는 대신, 역동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안전을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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