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07월[국내이슈] 성과 재생산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의약품 생산·공급 체제의 공공성

성과 재생산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의약품 생산·공급 체제의 공공성

 

이동근(더나은 의약품생산체제를 위한 시민사회연대)

  

의약품 접근권은 건강권의 일종으로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인권 중 하나이다. 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의약품 생산·공급은 영리적 민간기업 주도하에 놓여 있다. 결국 의약품 생산·공급·배분은 ‘누가 더 필요하냐’에 따르기 보다는 ‘얼마나 더 돈을 낼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구조라는 뜻이다. 의약품 생산·공급 체제의 영리화에 따른 건강침해는 성·재생산 건강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미국 보스톤 모더나 지부 앞에서 백신평등을 위한 지재권 면제를 주장하고 있는 시민들. ‘모두를 위한 백신’이라는 조형물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있다. 

출처: https://www.opengirok.or.kr/4966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의약품 생산·공급 체제의 영리화에 따른 성·재생산 건강권 침해


성·재생산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사용되는 인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 접근문제를 살펴보자. 초국적제약사 머크(MSD)가 판매하는 ‘가다실’은 자궁경부암 발병 원인 중 70%에 달하는 HPV 감염을 예방한다. 최근 스웨덴의 코호트 조사에 따르면 17세 이전에 가다실 백신을 맞은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88%까지 자궁경부암 발병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ref] 청년의사, "자궁경부암 예방 백신, 17세 이전에 맞아야 효과 최대" (2020.10.05)[/ref] 이러한 HPV백신은 공적 연구개발에 의한 성과이다. HPV 백신의 핵심 기술을 연구·개발한 곳은 호주의 퀸즈랜드 대학 등 대학 연구소와 미국 암연구소(NCI)이며, 가다실 관련 주요 특허를 보유한 곳도 개발 초기부터 연구에 참여하고 재정을 지원한 미국 국립보건원(NIH)이다. 하지만 공공기관들은 초국적제약사 머크와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에 기술을 이전하였고, 관련 독점적 권리도 그들에게 넘어갔다. 머크는 전 세계 자궁경부암 환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저소득 국가 지역 백신 공급에 미온적이었다. 심지어 가다실의 특허만료가 다가오자 임상적 유용성 차이가 크지 않은 ‘가다실9(9가 백신)’를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마케팅하며 백신 독점권을 연장하고 있다. 머크는 한국에서 가다실9 가격을 작년과 올해 각각 15%, 8.5% 인상하기도 하였다.[ref]청년의사, “MSD 자궁경부암 백신’가다실9’ 1년만에 또 가격인상(2022.05.16)[/ref] 암을 예방할 수 있는 항암백신이 공공기관의 연구개발 지원을 통해 개발되었지만 가격이나 공급에 대한 결정은 전적으로 민간기업에 달려 있으며, 특별한 이유 없이 가격을 높이더라도 우리는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HPV의 연령표준화 유병율이 높을수록 지도에서 짙은 색깔을 띄고 있으며, 국경선이 굵은 국가는 HPV백신이 도입된 국가를 뜻한다. 

불행히도 자궁경부암 위험이 높은 아프리카 지역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HPV 백신이 도입조차 이뤄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2018년 기준, HPV 백신을 이용할 수 있는 인구는 전세계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출처: https://bit.ly/3IwspJ4 [세계보건기구]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페프리스톤은 현재 허가심사가 진행중이다.  작년 3월 현대약품은 영국제약사와 독점 공급계약을 맺고 작년 7월에 시판허가신청을 했지만  지금까지 허가심사는 지지부진하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식약처가 심사자료의 보완을 요청했지만, 현대약품이 제출기한을 지키지 못해 심사 연기를 요청한 상태로 알려져 있다. 현대약품이 허가절차에 미온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다수의 산부인과 품목 의약품을 생산하는 현대약품은 작년 초 대표를 교체하면서 실적에 대한 여러 우려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교임상’[ref]민족적 요인에 차이가 있어 외국 임상자료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경우 실시하는 임상시험. 미프지미소의 주요 성분인 미페프리스톤은 동양인이 많이 이주해 살고 있는 미국, 캐나다, 유럽 등 주요국가에서 아무 문제없이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 베트남, 몽골, 북한 등 한국과 민족적으로 유사한 국가에서도 임신중지를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약물이므로, 미프지미소의 가교시험 요구는 제도의 취지를 완전히 왜곡하는 주장이다.[/ref]을 요구하는 대한산부인과학회 및 대한산부인과의사회의 주장을 뒤엎고 허가를 진행하기 조심스러워 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가 이후 의약품의 가격에 대해서도 현대약품은 이윤을 최대화 하는 방식으로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대체가능한 다른 의약품이 없는 상황에서 급여등재를 서두를 동기도 적다. 이미 현대약품은 유산유도제 ‘미프지미소’[ref]성분명 미페프리스톤·미소프로스톨 [/ref]를 35만원에 판매할 것이라 밝힌 바 있다. 이는 유엔인구기금(UNFPA)이 보급하는 동일성분 의약품의 가격 2만원(16달러)보다 훨씬 비싸다. 심지어 중·저소득 국가에서 실제 거래되는 가격은 1만원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현대약품이 35만원이라는 가격을 요구할 수 있는 이유는 ‘자료독점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자료독점권이란 정부가 신약을 허가할때 제출받은 임상시험자료에 대해 제약사에게 일정기간(6년) 독점권을 보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해당 의약품에 대해 판매독점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결국 의약품 접근권에 매우 중요한 허가, 건강보험 급여, 가격이 모두 제약회사의 결정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의약품을 공공재로 만들기 위한 두 가지 전략


의약품은 기본권인 건강을 향유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재화임에도 공공재로서가 아니라 일반 소비재처럼 관리되고 있으며, 독점적 지위를 통한 제약사의 이윤추구에 취약한 상태에 놓여있다. 앞으로 영리적 기업들이 의약품 생산, 유통, 공급 전반의 영역을 장악해 간다면, 의약품 가격이 더욱 치솟을지 모른다. 시민들은 민간기업에만 맡겨진 의약품 생산·공급 체제가 의약품 접근성을 저해하지 않도록 정부의 책임을 요구함은 물론, 민간기업을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필수적인 의약품의 공급을 위한 국제적 연대가 조속히 필요하다.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을 위해 세계보건기구(WHO)가 마련한 ‘코백스 퍼실리티’ 사례를 살펴보자.

코로나19 백신 관련 화이자의 탐욕과 고소득국가들의 자국이기주의, 저소득국가 시민들의 희생을 꼬집는 퍼포먼스

출처: https://www.opengirok.or.kr/4959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WHO는 코로나19 백신을 공동으로 구매하고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해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전염병대비혁신연합(CEPI)과 함께 코백스 퍼실리티를 출범하였다. 국가와 제약사의 양자간 협상에서 제약사는 자신들이 원하는 가격을 고수하기 위해 해당 국가에 대한 공급 거부를 시사한다. 의약품 접근성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가진 정부는 협상에 불리한 지위에 놓일 수 밖에 없다. 제약사의 독점권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 국가들이 연합하여 협상에 임한다면, 안정적으로 의약품 공급을 보장받고 합리적 가격 수준에서 협상이 가능할 수 있다. 코백스 퍼실리티의 경우 고소득 국가들이 시작한 일탈(코백스 밖에서 양자간 계약 추진)이 이어지면서 결국 당초의 목표 달성에 실패했지만, 향후 제약사의 독점권을 견제하기 위해 지역기구나 국제기구 수준에서의 국가간 연대협력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현재 국가별 약가를 비교 확인할 수 있는 믿을만한 국제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데, 바로 가격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려는 제약사의 전략 때문이다. 국가간 연대협력은 의약품의 적정한 가격을 책정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서 투명성 확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시장적 의약품 생산·공급 체제의 대안도 고민해야 한다. 의약품 연구개발은 가다실의 사례처럼 공적 기관을 통해 시작되지만 결국 민간기업의 독점권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미 국제적으로 글로벌 연구개발 조약을 수립하고 독점가격을 대체하는 대안적 혁신모델(‘delinkage’ model)에 대한 여러 고민들을 지속하고 있다. 또한 코로나19 기술 관련 특허를 공동관리(‘풀링’)하는  WHO의 ‘코로나19 기술 접근 풀(C-TAP)’ 사례, 각 제약사가 자체 치료제를 위해 진행하는 임상시험과 달리 여러 치료제 중 최상의 것을 찾기 위한 공동대응으로 WHO의 조율로 진행한 비교임상시험(‘solidarity trial’) 사례도 있다. 이러한 노력은 여전히 미약하지만, 독점에 기반한 의약품 생산·공급 체제에 조금씩 균열을 내면서 대안적 의약품 생산·공급 체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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