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중과 성소수자, HIV 감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
윤우 HIV/AIDS 인권행동 알 인권팀,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
“중국인들은 더럽다.”, “중국인은 시끄럽다.”, “중국이 중국 했다.” 등의 편견은 아마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숱하게 들어온 혐오의 말일 것이다. 이처럼 편견에 기반해 ‘중국인’의 특성을 차별적으로 규정하는 식의 사회적 낙인들은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중국인’, ‘화교’라는 존재 자체가 비속어가 된 것처럼 쓰이는 등 차별과 혐오가 극대화된 것이다. 이러한 차별과 혐오의 온상지는 단연 극우 성향의 커뮤니티다. 이들 커뮤니티와 SNS, 유튜브 등에서는 ‘반중 정서’에 기대어 부정선거 음모론과 가짜뉴스가 무분별하게 퍼져나갔다. 특히나 화제가 되었던 뉴스는 12·3 비상계엄 당시 중국인 간첩 99명이 선거관리위원회 연수원에서 체포돼 미군 기지를 통해 미국으로 압송됐다는 한 인터넷 매체 보도였다. 극우 세력은 이에 반중·혐중 선동을 가미했다. 윤석열 역시도 중국을「주권 침탈 세력」으로 묘사하며 윤석열 본인이 분쇄하려고 하는 ‘내부의 적’이 ‘외부의 더 큰 적’과 연계돼 있다고 적극 선동하기 시작했다. 극우 세력의 집회와 퇴진 요구 집회 공간이 닿아있던 때,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중국인인지 아닌지 검열을 하겠다며 신분증을 검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행을 온 중국인 여행객들에게 ‘No China’가 적힌 피켓을 들어 공포감을 조성했다. 또 어느 단체는 푸드트럭을 하면서도 탄핵 찬성 집회에 참여하는 한국의 민주시민에게만 제공되는 것이라며, 외국인에게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사례들도 있었다.

탄핵집회 광장에서 외국인에게는 음식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특정 단체의 홍보물(제공: 윤우)
반노조·반동성애·반이슬람·반페미니즘이라는 혐오의 전선
현재 극우들의 공통된 지점은 누군가를 괴롭히고, 차별하고, 또 혐오하고 있다는 것이며,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자신들보다 약한, 사회적 약자들을 삼고 있다는 점이다. 약자들을 괴롭히는 행동의 주된 동기 중 하나를 말하자면 권력과 통제에 대한 욕구라고 볼 수 있다. 가해자들은 자신을 더 강력하고 중요한 존재로 여기며, 자신을 증명하고자 다른 사람들을 제어하려고 한다. 이러한 욕망의 기저에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일부 자리하며 이 역시 약자들의 권익이 과도하게 증진되었다는 커뮤니티 내부의 편향적인 정보 습득을 통한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약자들의 권익 증진은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누군가의 인권 향상이 또 다른 누군가의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권익을 침해당하지 않으려 소수자들을 향해 더욱더 극렬한 혐오를 퍼붓는 것이다. 이러한 비뚤어진 권력 욕구는 자아실현과 자신감 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극우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괴롭힘으로써 얻는 것은 희열이 아니다. 본인이 약자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점에서 권력을 얻어냈다는 영웅 심리이다. 혐오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쟁취했다는 오도된 정의감인 것이다.
그렇기에 극우 세력이 반노조·반동성애·반이슬람·반페미니즘 등을 곁들여 혐오의 외연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가장 취약한 존재일수록 그들 자신의 인권을 위한 운동, 또 그들과 연대하는 운동은 그들에게 일종의 반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극우와 혐오 세력들이 지독히도 괴롭히는 대상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약자이다. 그러나 극우 세력이 느끼는 일종의 배신감과 현실은 다르다. 성소수자, HIV 감염인, 장애인, 이주 난민, 여성, 청소년, 성노동자 등의 소수자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로 고통받고 있다.
더욱 노골적으로 가시화된 혐오와 차별, 사회의 비난과 편견은 우리, 사회적 소수자들을 음지로 숨어들게 하였다. 이 음지에서 그동안 대다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기본적인 권리마저 향유하지 못한 채 숨죽여 지내왔다. 이주민과 성소수자에 대해 부정확한 정보를 담은 자료들이 허다했고, 누적된 사회 불만의 이슈와 초점을 사회적 약자에게 맞추어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선동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일은 사회적 약자에게서도 약자, 소수자 중에서도 소수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HIV 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서 특히 가시화된다.
감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진료거부와 의료차별을 하는 의료기관과 의료인들도 있다. 감염인을 향한 혐오는 이미 너무나 흔한 일이 되었다. “AIDS 환자가 우리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다는 사실이 소문이 나면 경영이 어렵다.”, “HIV 감염인들을 치료할 수 있는 기구나 장비, 또 전문인력 등이 없다.”, “치료 시 사용했던 의료기구의 폐기비용은 본인이 부담하라.”, “의료인과 다른 환자들에게 HIV가 전파되면 본인이 책임질 수 있느냐.” 등 감염인은 의료인이 HIV/AIDS에 대한 기본적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발생하는 낙인과 혐오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감염인은 솔직히 이해가 안 된다”, “문란하다”, “더럽다” 한 게이 커뮤니티에서 발견되는 HIV 감염인을 향한 혐오의 글이다. 즉 우리, 소수자 안에서도 또 다른 혐오를 양산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성소수자를 향한 사회의 비난과 편견, 혐오와 차별을 체감은 하지만, 그 대상이 성소수자라서가 아니라 그보다 취약한 HIV 감염인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HIV 감염인 때문에 성소수자의 인식이 좋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처럼 성소수자 내부에서도 감염인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소속된 커뮤니티 안에서 막연하게 드러내는 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세력을 향해 대항하는 것이 아닌, 성소수자 내부에서도 더욱 취약한 이들에게로 혐오가 흐르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HIV 감염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감염인의 탓이 아니라 이처럼 감염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도록 하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낙인, 차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HIV 감염인 이주민과 같은 소수자성이 교차되는 자리에서 시작되는 민주주의를
이처럼 보다 더 취약한 이들이 겪는 상처와 아픔들이 있다. 특히나 HIV 감염인 이주민은 소수자성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누구보다 가장 취약한 자리에 서 있다. 외국인 노동자 및 이주민에 대한 HIV 강제 검진 및 강제 출국 규정은 인권침해 및 차별임이 분명하고 공중 보건 실행의 실효성이 없다는 근거로 2017년 7월에 폐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노동을 위한 비자에서 HIV 검사는 여전히 자행되고 있으며, 본인의 동의 없이 HIV 검사를 진행하거나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HIV 검사결과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를 거부할 시 사증 발급이 어려워지거나, 본국으로 추방당할 것이라는 말로 윽박지르는 것은 예삿일이다. 또한 HIV 검진 결과를 본인의 동의 없이 사업주에게 통보하여 채용이 되지 않거나, 채용이 되었다 하더라도 검진 결과를 이유로 채용의 취소를 일방적으로 통보받기도 한다. 이 때문에 채용 전 신체검사와 채용 후 신체검사에서 혹여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회사에서 알게 될까 봐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사례들도 있다. 아픈 몸을 가진 사람들의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추태인 것이다.
현대사회에 만연한 HIV 감염인에 대한 혐오는 이들 존재에 대한 범죄화로부터 비롯되었다. 충격적이게도 국가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19조 전파매개행위죄로부터 HIV 감염인들의 성적권리를 범죄화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2013년부터 예방으로서의 치료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질병의 범죄화는 지속적인 치료를 통한 예방을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시켰다. 전파매개행위죄는 자신의 HIV 감염 사실을 모르도록 검진과 치료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 처벌을 피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이는 UNAIDS가 강조하는 조기 검진과 치료를 전면적으로 방해한다. 검진을 받아 자신의 상태를 알고 치료를 꾸준히 받는 것을 되려 자발적으로 잠재적 범죄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로써 감염인들은 일상이 지속되는 것을 기대하지 못하고 검진과 치료를 포기하게 된다. 전파매개행위죄는 본인의 HIV 감염상태를 인지하여 꾸준한 치료로 감염 예방의 주체로 선 HIV 감염인에게 ‘HIV 전파의 주범으로 감시해야 할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어, 예방의 주체로서의 동등한 시민으로 자리하지 못하게 한다.

모든 윤석열 퇴진 요구 광장에서 흩날렸던 무지개깃발 (제공: 윤우)
성소수자, HIV 감염인, 장애인, 이주 난민, 여성, 청소년, 성노동자 등 우리 모두가 존엄과 존중이라는 평등의 연결고리에서 더 이상의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광장에서, 윤석열 파면 이후 도래하기를 그토록 원했던 사회가 아닌가. 차별과 혐오에 대항하는 우리 소수자들의 연대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이번 광장에서 우리의 연대는 더욱 단단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누군가의 용기있는 발언과 무지개존을 필두로 켜켜이 무지개와 자신의 정체성을 알릴 수 있던 깃발을 들고, 또 응원봉에 무지개 리본과 트랜스 리본을 묶으며 함께 외쳤다. “차별도 혐오도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말이다.
이렇게 외친 우리의 미래가 후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HIV 감염인이라고 해서 채용을 거부당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또한 부당한 해고를 당할까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는, 감염인이라고 해서 진료거부와 의료차별을 받지 않는, 전파매개행위죄 폐지로 감염인들의 섹스가 범죄화되지 않는 사회가 파면으로 맞이한 봄처럼 따사롭게 다가오길 바란다.
필자소개
저는 대만 화교이신 어머니의 자녀이자, HIV/AIDS 인권행동 알 인권팀과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에서 활동하는 윤우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한 선배가 제가 동성애자인 것 같다는 말을 하고,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더럽다거나, 에이즈 환자로 몰아가며 괴롭혔어요. 제 별명은 에이즈였습니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아무에게도 저의 상처를 말하지 못했어요. 저는 스스로를 부정하며 지내왔습니다. 이런 복잡 미묘한 심정들을 마음의 짐으로 두고, 청소년기와 이십대를 보냈다는 게 여전히 가슴이 아파요.
아주 우연히 ‘바비를 위한 기도’라는 영화를 봤어요. 저는 되게 죽고 싶어 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난 잘못됐다. 죄인이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고 제 자신을 혐오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제가 또 다른 ‘바비’라고 생각을 했어요. 영화에서의 바비처럼 저는 저를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제 정체성이 부끄럽거나 수치스럽지 않다는 믿음과 용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이 용기는 저를 활동가로 까지 이끌어 주었어요.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는 사회에 고민이 많았어요. 활동은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고, 차별 없는 나를 위해 앞으로도 저의 활동은 계속 될 것 같아요.
혐중과 성소수자, HIV 감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
윤우 HIV/AIDS 인권행동 알 인권팀,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
“중국인들은 더럽다.”, “중국인은 시끄럽다.”, “중국이 중국 했다.” 등의 편견은 아마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숱하게 들어온 혐오의 말일 것이다. 이처럼 편견에 기반해 ‘중국인’의 특성을 차별적으로 규정하는 식의 사회적 낙인들은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중국인’, ‘화교’라는 존재 자체가 비속어가 된 것처럼 쓰이는 등 차별과 혐오가 극대화된 것이다. 이러한 차별과 혐오의 온상지는 단연 극우 성향의 커뮤니티다. 이들 커뮤니티와 SNS, 유튜브 등에서는 ‘반중 정서’에 기대어 부정선거 음모론과 가짜뉴스가 무분별하게 퍼져나갔다. 특히나 화제가 되었던 뉴스는 12·3 비상계엄 당시 중국인 간첩 99명이 선거관리위원회 연수원에서 체포돼 미군 기지를 통해 미국으로 압송됐다는 한 인터넷 매체 보도였다. 극우 세력은 이에 반중·혐중 선동을 가미했다. 윤석열 역시도 중국을「주권 침탈 세력」으로 묘사하며 윤석열 본인이 분쇄하려고 하는 ‘내부의 적’이 ‘외부의 더 큰 적’과 연계돼 있다고 적극 선동하기 시작했다. 극우 세력의 집회와 퇴진 요구 집회 공간이 닿아있던 때,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중국인인지 아닌지 검열을 하겠다며 신분증을 검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여행을 온 중국인 여행객들에게 ‘No China’가 적힌 피켓을 들어 공포감을 조성했다. 또 어느 단체는 푸드트럭을 하면서도 탄핵 찬성 집회에 참여하는 한국의 민주시민에게만 제공되는 것이라며, 외국인에게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사례들도 있었다.
탄핵집회 광장에서 외국인에게는 음식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특정 단체의 홍보물(제공: 윤우)
반노조·반동성애·반이슬람·반페미니즘이라는 혐오의 전선
현재 극우들의 공통된 지점은 누군가를 괴롭히고, 차별하고, 또 혐오하고 있다는 것이며,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자신들보다 약한, 사회적 약자들을 삼고 있다는 점이다. 약자들을 괴롭히는 행동의 주된 동기 중 하나를 말하자면 권력과 통제에 대한 욕구라고 볼 수 있다. 가해자들은 자신을 더 강력하고 중요한 존재로 여기며, 자신을 증명하고자 다른 사람들을 제어하려고 한다. 이러한 욕망의 기저에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일부 자리하며 이 역시 약자들의 권익이 과도하게 증진되었다는 커뮤니티 내부의 편향적인 정보 습득을 통한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 약자들의 권익 증진은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누군가의 인권 향상이 또 다른 누군가의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권익을 침해당하지 않으려 소수자들을 향해 더욱더 극렬한 혐오를 퍼붓는 것이다. 이러한 비뚤어진 권력 욕구는 자아실현과 자신감 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극우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괴롭힘으로써 얻는 것은 희열이 아니다. 본인이 약자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점에서 권력을 얻어냈다는 영웅 심리이다. 혐오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쟁취했다는 오도된 정의감인 것이다.
그렇기에 극우 세력이 반노조·반동성애·반이슬람·반페미니즘 등을 곁들여 혐오의 외연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가장 취약한 존재일수록 그들 자신의 인권을 위한 운동, 또 그들과 연대하는 운동은 그들에게 일종의 반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극우와 혐오 세력들이 지독히도 괴롭히는 대상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약자이다. 그러나 극우 세력이 느끼는 일종의 배신감과 현실은 다르다. 성소수자, HIV 감염인, 장애인, 이주 난민, 여성, 청소년, 성노동자 등의 소수자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로 고통받고 있다.
더욱 노골적으로 가시화된 혐오와 차별, 사회의 비난과 편견은 우리, 사회적 소수자들을 음지로 숨어들게 하였다. 이 음지에서 그동안 대다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기본적인 권리마저 향유하지 못한 채 숨죽여 지내왔다. 이주민과 성소수자에 대해 부정확한 정보를 담은 자료들이 허다했고, 누적된 사회 불만의 이슈와 초점을 사회적 약자에게 맞추어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선동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일은 사회적 약자에게서도 약자, 소수자 중에서도 소수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HIV 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서 특히 가시화된다.
감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진료거부와 의료차별을 하는 의료기관과 의료인들도 있다. 감염인을 향한 혐오는 이미 너무나 흔한 일이 되었다. “AIDS 환자가 우리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다는 사실이 소문이 나면 경영이 어렵다.”, “HIV 감염인들을 치료할 수 있는 기구나 장비, 또 전문인력 등이 없다.”, “치료 시 사용했던 의료기구의 폐기비용은 본인이 부담하라.”, “의료인과 다른 환자들에게 HIV가 전파되면 본인이 책임질 수 있느냐.” 등 감염인은 의료인이 HIV/AIDS에 대한 기본적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발생하는 낙인과 혐오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감염인은 솔직히 이해가 안 된다”, “문란하다”, “더럽다” 한 게이 커뮤니티에서 발견되는 HIV 감염인을 향한 혐오의 글이다. 즉 우리, 소수자 안에서도 또 다른 혐오를 양산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성소수자를 향한 사회의 비난과 편견, 혐오와 차별을 체감은 하지만, 그 대상이 성소수자라서가 아니라 그보다 취약한 HIV 감염인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나 HIV 감염인 때문에 성소수자의 인식이 좋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처럼 성소수자 내부에서도 감염인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소속된 커뮤니티 안에서 막연하게 드러내는 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세력을 향해 대항하는 것이 아닌, 성소수자 내부에서도 더욱 취약한 이들에게로 혐오가 흐르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HIV 감염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감염인의 탓이 아니라 이처럼 감염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도록 하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낙인, 차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HIV 감염인 이주민과 같은 소수자성이 교차되는 자리에서 시작되는 민주주의를
이처럼 보다 더 취약한 이들이 겪는 상처와 아픔들이 있다. 특히나 HIV 감염인 이주민은 소수자성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누구보다 가장 취약한 자리에 서 있다. 외국인 노동자 및 이주민에 대한 HIV 강제 검진 및 강제 출국 규정은 인권침해 및 차별임이 분명하고 공중 보건 실행의 실효성이 없다는 근거로 2017년 7월에 폐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노동을 위한 비자에서 HIV 검사는 여전히 자행되고 있으며, 본인의 동의 없이 HIV 검사를 진행하거나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HIV 검사결과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를 거부할 시 사증 발급이 어려워지거나, 본국으로 추방당할 것이라는 말로 윽박지르는 것은 예삿일이다. 또한 HIV 검진 결과를 본인의 동의 없이 사업주에게 통보하여 채용이 되지 않거나, 채용이 되었다 하더라도 검진 결과를 이유로 채용의 취소를 일방적으로 통보받기도 한다. 이 때문에 채용 전 신체검사와 채용 후 신체검사에서 혹여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회사에서 알게 될까 봐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는 사례들도 있다. 아픈 몸을 가진 사람들의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추태인 것이다.
현대사회에 만연한 HIV 감염인에 대한 혐오는 이들 존재에 대한 범죄화로부터 비롯되었다. 충격적이게도 국가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19조 전파매개행위죄로부터 HIV 감염인들의 성적권리를 범죄화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2013년부터 예방으로서의 치료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질병의 범죄화는 지속적인 치료를 통한 예방을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시켰다. 전파매개행위죄는 자신의 HIV 감염 사실을 모르도록 검진과 치료에 접근하지 않는 것이 처벌을 피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이는 UNAIDS가 강조하는 조기 검진과 치료를 전면적으로 방해한다. 검진을 받아 자신의 상태를 알고 치료를 꾸준히 받는 것을 되려 자발적으로 잠재적 범죄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로써 감염인들은 일상이 지속되는 것을 기대하지 못하고 검진과 치료를 포기하게 된다. 전파매개행위죄는 본인의 HIV 감염상태를 인지하여 꾸준한 치료로 감염 예방의 주체로 선 HIV 감염인에게 ‘HIV 전파의 주범으로 감시해야 할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어, 예방의 주체로서의 동등한 시민으로 자리하지 못하게 한다.
모든 윤석열 퇴진 요구 광장에서 흩날렸던 무지개깃발 (제공: 윤우)
성소수자, HIV 감염인, 장애인, 이주 난민, 여성, 청소년, 성노동자 등 우리 모두가 존엄과 존중이라는 평등의 연결고리에서 더 이상의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광장에서, 윤석열 파면 이후 도래하기를 그토록 원했던 사회가 아닌가. 차별과 혐오에 대항하는 우리 소수자들의 연대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이번 광장에서 우리의 연대는 더욱 단단한 연결고리가 되었다. 누군가의 용기있는 발언과 무지개존을 필두로 켜켜이 무지개와 자신의 정체성을 알릴 수 있던 깃발을 들고, 또 응원봉에 무지개 리본과 트랜스 리본을 묶으며 함께 외쳤다. “차별도 혐오도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말이다.
이렇게 외친 우리의 미래가 후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HIV 감염인이라고 해서 채용을 거부당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또한 부당한 해고를 당할까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는, 감염인이라고 해서 진료거부와 의료차별을 받지 않는, 전파매개행위죄 폐지로 감염인들의 섹스가 범죄화되지 않는 사회가 파면으로 맞이한 봄처럼 따사롭게 다가오길 바란다.
필자소개
저는 대만 화교이신 어머니의 자녀이자, HIV/AIDS 인권행동 알 인권팀과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에서 활동하는 윤우라고 합니다. 학교에서 한 선배가 제가 동성애자인 것 같다는 말을 하고,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더럽다거나, 에이즈 환자로 몰아가며 괴롭혔어요. 제 별명은 에이즈였습니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으로 아무에게도 저의 상처를 말하지 못했어요. 저는 스스로를 부정하며 지내왔습니다. 이런 복잡 미묘한 심정들을 마음의 짐으로 두고, 청소년기와 이십대를 보냈다는 게 여전히 가슴이 아파요.
아주 우연히 ‘바비를 위한 기도’라는 영화를 봤어요. 저는 되게 죽고 싶어 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난 잘못됐다. 죄인이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낙인을 찍고 제 자신을 혐오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제가 또 다른 ‘바비’라고 생각을 했어요. 영화에서의 바비처럼 저는 저를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제 정체성이 부끄럽거나 수치스럽지 않다는 믿음과 용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이 용기는 저를 활동가로 까지 이끌어 주었어요. HIV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는 사회에 고민이 많았어요. 활동은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고, 차별 없는 나를 위해 앞으로도 저의 활동은 계속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