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04월[국제이슈]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사회의 기준 변화 - 완전한 비범죄화와 유산유도제의 접근성 확대로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사회의 기준 변화: 완전한 비범죄화와 유산유도제의 접근성 확대로

 

나영

 

헌법재판소가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지 3년이 지났다. 2021년 1월 1일부로 한국은 ‘낙태죄’의 법적 실효가 사라진 완전한 비범죄화 국가가 되었고 그렇게 다시 1년이 지났다. 법의 실효가 사라진 이후 국가가 곧장 착수했어야 하는 일은 임신중지가 더 이상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리고 변화한 조건에 맞게 보건의료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세계보건기구 WHO가 제시해 온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가이드를 기준으로 새로운 가이드를 만들고, 보건의료인들이 편견없이 제대로 된 최신의 정보를 바탕으로 진료와 시술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공식 보건의료 체계 안에서 임신초기부터 후기까지의 다양한 상황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했어야 한다. 지역 간 격차와 정보 격차를 줄이는 일, 이주민, 난민, 청소년, 장애인, 성소수자 등 다양한 이들의 상황과 조건에 맞는 정보・의료지원・상담 체계를 갖추는 일, 건강보험 적용과 수가 조정으로 비용 때문에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초기 접근에 어려움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고 새로운 권리 보장법을 제정하는 일 등 정부가 바로 착수했어야 하는 일들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이 중 어떤 것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채, 무책임하게 1년이 흘렀다. 유산유도제의 공식적인 승인도 그 중 하나다. 식약처는 내내 가교임상 여부만 만지작거리다가 시간을 보내놓고, 그 와중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통해 위민온웹 Women On Web 사이트까지 차단해버려 오히려 안전성을 확인할 수 없는 온라인 뒷거래 유통 시장만 키워놓았다.


우리에겐 아직 완전한 권리를 위해 싸워나가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불법과 통제의 역사가 길었던만큼 변화에도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그 과정이 앞으로 그저 힘들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국제적 기준이 크게 진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WHO, 새 가이드라인에 전면 비범죄화 강력 권고 명시



 

지난 1년 사이에는 특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중요한 변화와 진전이 있었다. 콜롬비아는 2월 21일 임신24주까지의 임신중지를 완전히 합법화했고, 프랑스는 지난 2월 23일 어떠한 조건도 없는 임신중지 허용 시기를 이전의 14주에서 16주로 확대했다.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수정 시기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마지막 월경일을 기준으로 계산하는 다른 나라와 2주의 차이가 난다. 여기서 14주, 16주는 프랑스 기준으로는 각각 12주, 14주이다.) 그리고 칠레는 지난 해 12월 임신14주까지 임신중지를 합법화하는 법안이 논의되었으나 안타깝게 보류된 이후 계속해서 논의를 진전시킨 결과, 현재 헌법 개정안 초안에 임신중지 권리가 포함된 성・재생산 권리 보장 조항을 명시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세계 각국의 변화에 조응하며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세계보건기구 WHO는 새로운 임신중지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 새 가이드는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장사항을 각 항목별로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가장 첫번째 항목으로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권고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전보다 훨씬 명확하고 분명하게 비범죄화를 강력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비범죄화란 모든 형법과 관련 처벌 조항에서 임신중지를 삭제하고, 살인이나 과실치사를 임신중지에 적용하지 않으며, 임신중지를 한 사람이나 지원한 사람, 정보를 제공한 사람에 대해서도 어떠한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강요에 의한 임신중지는 심각한 폭행이라는 점도 확인한다. 이어서 다음 항목에서는 특정한 조건에 따른 허용 조항을 두는 것에도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현재 각국에서 적용되고 있는 조건부 허용은 모두 ‘여성의 요청에 따른 임신중지 허용’으로 수정되어야 하며, 관련 조건들을 삭제하고 전면 비범죄화로 수정되기 전까지 기존의 조항은 국제 인권 기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강하게 권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신 기간에 따라 제한을 두는 법률이나 기타 규정에도 반대하며, 의무대기 기간을 두는 방식,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초음파 촬영을 요구하는 것도 권장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아울러 부모나 파트너 등 제3자가 당사자의 의사 결정에 개입하는 조치도 없어야 한다고 권장한다. WHO의 이번 가이드는 지난 수십년 동안 아무리 임신중지의 합법화가 이루어져 왔어도 임신중지에 대한 법적 제약과 처벌이 남아있는 이상 결코 온전한 안전과 건강을 보장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접근성의 제약으로 인해 그간 더 큰 위험과 해악만을 가져왔을 뿐이라는 명확한 결론을 통해 나오게 된 것인만큼 각국에 비범죄화를 촉구하는 강력한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산부인과학회, ‘완전한 비범죄화를 촉구하는 선언문’ 발표

 

WHO의 새 가이드가 발표되기 바로 며칠 전에는 세계산부인과학회에서도 ‘완전한 비범죄화를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세계산부인과학회는 이 선언문에서 “임신중지의 범죄화는 근거에 기반한 최상의 진료와 성과 재생산 건강 및 권리의 완전한 실현을 방해”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어서 “전 세계의 현행법이 포함하고 있는 규제들은 의학적 근거에 기반하지 않고 오히려 임신중지를 받는 시기를 지연시키며 위해를 끼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임신중지에 대한 법적 제약이 오히려 지체 없이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세계산부인과학회는 정부와 각국의 보건당국에 “임신중지가 항상 안전하고 합법적이며 접근 가능하도록 보장하는 법적 환경을 조성할 것”과 “임신중지에 대한 정보, 상담, 관련 서비스를 위한 탄탄한 시스템이 갖춰지도록 보장하고 다른 재생산 건강 서비스와 연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회원 협회와 의료 전문가에게도 “현행법에서 허용하는 최대한의 수준으로 임신중지를 제공할 것”, “의료 종사자와 사법부, 경찰, 대중에게 안전한 임신중지를 최대한으로 이행할 때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교육할 것”, 그리고 “특히 소외된 여성과 소녀, 인도주의적 위기에 처한 사람들, 빈곤에 처한 사람들, 청소년을 위한 임신중지 접근성을 검토하고 시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산부인과학회가 각국의 회원 협회와 의료 전문가에게 요구하는 마지막 사항은 데이터의 수집과 근거 자료를 강화하여 의사결정과 정책 과정에 그 내용을 알리고 국회의원, 의료 전문가, 법률 전문가, 여성 및 인권 단체 등과 힘을 합쳐 임신중지를 비범죄화하기 위한 캠페인과 지원 파트너십을 구축하라는 것이다.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후에도 계속해서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로 변화를 지연시키고만 있는 한국의 산부인과학회도 세계산부인과학회의 이번 발표를 반영하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환경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란다.

 

유산유도제, 어디서든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 높이기

 

유산유도제의 접근성 문제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세계 각국에서 각종 기준을 완화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항 중 하나다. 캐나다 산부인과협회는 팬데믹 초기부터 임신중지 접근성 보장의 중요성에 대해 성명을 발표했고, 이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피임 및 임신중지 연구팀이 전국 300개 병원과 클리닉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팬데믹 이전 20%이던 유산유도제 원격 처방과 진료 비중이 2021년 1월까지 90%로 증가했다. 영국에서도 팬데믹 상황에서도 임신중지에 접근해야 하는 여성들의 복지와 안전이 최우선 과제라고 보고 유산유도제의 처방 요건을 완화했다. 이에 따라 클리닉을 방문할 필요 없이 전화나 온라인 상담 후에 약을 처방받을 수 있도록 했고, 이 조치는 올해 2월에 6개월 더 연장되었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로 팬데믹으로 일시적으로 시작되었던 원격 진료를 통한 유산유도제 처방 조치를 확대하여 임신 7주까지 병원 방문 없이 처방이 가능하도록 접근성을 높였다. 이와 같은 원격 진료를 통한 처방 조치는 위에서 소개한 WHO의 새 가이드에도 권장 사항으로 포함되었다. WHO는 또한 각국에 품질이 보장된 의약품에 대한 접근, 필요한 경우 사후 확인과 관리를 위한 지원, 임신중지 후 피임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적절한 피임 서비스 연결 등을 보장할 것을 권고한다. WHO의 유산유도제 관련 지침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스스로 하는 임신중지(SMA, Self-Managed Abortion)에 대해 적극적으로 권고하며 자세히 세부 사항을 안내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산유도제의 안전성이 확인됨에 따라, 지금까지 여러 국가에서 반드시 병원에서 약을 복용하도록 하거나 의사의 통제 하에서만 복용하도록 해왔던 것과 달리 이제는 임신 12주 이내의 임신중지인 경우 의료시설 외부에서 의사의 직접적인 감독 없이 약을 복용할 수 있도록 관련 옵션을 권장하고 있으며, 10주 이내인 경우에는 더 가능한 자료와 근거가 많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모든 개인은 정확한 정보, 통증 관리, 훈련된 의료인의 지원, 의료시설이나 기타 필요한 서비스, 약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임신중지 비범죄화 이후 1년을 맞았다. 비범죄화 이후는 본격적인 평등을 위한 과정이다. 오랫동안 불법과 통제로 가려져 왔던 안전한 임신중지와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을 위한 보건의료 체계의 부재, 의료기관을 비롯한 각종 공적 서비스와 정보 접근에 대한 불평등, 다양한 의료권력의 개입과 영향에 대응하며 계속해서 변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미 국제사회의 기준은 빠르게 변화하며 진전하고 있다. 우리도 비범죄화를 이뤄낸 힘을 모아 제대로 평등과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유산유도제 즉각 승인, 건강보험 적용, 공식 보건의료 체계에서의 안전한 임신중지 환경 보장, 소수자 접근성 확대, 상담과 정보의 체계적 제공과 지원, 그리고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 제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2022년 ‘낙태죄’ 비범죄화 2년차를 의미있게 변화시켜 보자. 우리는 비범죄화라는 가장 큰 산을 먼저 넘었고,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 WHO의 새로운 임신중지 가이드 보기

https://www.who.int/publications/i/item/9789240039483

** 세계산부인과학회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촉구하는 선언문’ 보기

https://www.figo.org/resources/figo-statements/figo-calls-total-decriminalisation-safe-abor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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