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을 팝니다 : 『바이브레이터의 나라』 서평
김보영 셰어 기획운영위원, 에브리바디 플레져랩팀
린 코멜라가 쓰고 조은혜가 옮긴 『바이브레이터의 나라(원제: Vibrator Nation)』가 얼마 전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여성을 주요 소비자층으로 하는 섹스토이 시장이 어떻게 형성되고 확대되었는지를 다룬다. 저자는 섹스토이 산업을 개척해 온 여성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하였으며 섹스토이숍 광고, 섹스토이숍으로 날아온 고객의 편지처럼 흥미진진한 자료를 아카이빙했다. 이 책이 가진 큰 강점은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 속에서 여성 섹스토이 산업의 형성과정을 짚어낸다는 것이다. 그 둘은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다.
여성 섹스토이 산업의 형성은 미국의 성혁명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다. 이른바 성혁명이 본격화된 1960년대에는 성역할이나 성에 관한 보수적 관념에 대항하는 담론이 쏟아져나왔다. FDA(미국 식품의약국)가 경구피임약을 승인하면서 여성의 성적 자율성이 확대된 시기였으며, 여성이 소비자 주체로서 자리 잡아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성혁명이라는 명명이 온당한지에서부터 성혁명을 촉발한 사회적 배경과 그 진행 과정만 쓴다 해도 책 한 권은 거뜬히 채우겠지만, 『바이브레이터의 나라』는 이 성혁명이라는 배경을 간략히 언급할 뿐이다. 이 책은 그 시기에 여성 섹스토이숍을 창업한 구체적 여성에 더욱 주목하기 때문이다.[ref]이 시기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배신’ 시리즈로 잘 알려진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엘리자베스 헤스, 글로리아 제이콥과 함께 쓴 『Re-making Love』를 참고하면 좋을듯하다. 이 책은 페미니즘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여성이 아닌, 그보다는 ‘평범한’ 여성의 일상에 어떻게 성혁명이 들이닥쳤는지를 보여준다. 게일 혹스의 『섹슈얼리티와 사회』도 이 시기를 일부 다룬다. 특히 여성의 쾌락 추구가 소비자본주의와 통합되는 지점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한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섹스 시장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선택의 파노라마를 제시하고, 그 속에서 개인들이 진열장의 에로틱 상품을 구경하고 쇼핑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도록 조장한다. 섹슈얼리티와 관련하여 시장의존성이 가져올 수 있는 하나의 결과는 성적 이미지를 선택하고 동일시하는 일이 실제적인 성 행동, 즉 행해진 성보다 중요시될 수 있다는 점이다."[/ref]
성혁명이라 불리는 시기가 시작될 즈음까지도 섹스에 관한 공적 담론은 의료종사자, 특히 산부인과 및 정신과 의사가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결혼 매뉴얼’이라 불리기도 했던 대중적 섹스 가이드를 출판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소비자본주의와 페미니즘 운동의 팽창으로 섹스 담론의 주도권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1966년에 창립된 전미여성기구 NOW(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가 섹슈얼리티 컨퍼러스를 개최하며 여성들이 자신의 성기를 잘 바라보고 다룰 수 있도록 도왔으며, 여성들은 공적 공간에서 자신의 섹스 경험을 쏟아냈다. 이 같은 경험에 힘입은 여성들이 섹스토이 산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전미여성기구 활동가이기도 했던 델 윌리엄스는 섹스 워크숍에 참여한 후 많은 영향을 받아 미국 최초로 여성 섹스토이숍을 창업했다. 해방의 에너지를 다른 여성에게도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이 섹스토이숍 창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워크숍과 교육을 통해 중요하게 발견된 중요한 신체 기관이 있다. 클리토리스다. 이전에도 클리토리스의 존재를 몰랐던 건 아니지만, 질에 음경을 삽입하는 체위가 중심이던 이성애 섹스 세계에서 클리토리스는 존중받지 못했다. 그러나 클리토리스를 통한 오르가슴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여성 오르가슴에 관한 담론은 질에서 클리토리스로 그 중심을 옮겨갔다. 여성의 쾌락에 있어서 페니스가 핵심이 아니며, 페니스를 대체할만한 물건은 세상에 많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이야기되었다. 『바이브레이터의 나라』에도 언급된 마스터스와 존슨의 성과학 연구가 대표적이다. 마스터스와 존슨은 클리토리스 오르가슴에 대한 통계를 산출하는 등 여성의 성적 쾌락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ref]이 두 연구자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마스터스 오브 섹스>가 있다. [/ref]
여성 섹스토이숍을 창업한 사람들은 각자의 사명이 있었다. 남성이 중심이던 섹스토이 산업에서 여성 섹스토이숍을 운영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들은 깔끔한 인테리어와 깨끗한 환경, 노골적인 모양을 하지 않은 섹스토이를 배치하며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고자 애썼다. 또한 이 매장을 거점으로 성에 대한 교육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도록 노력했고, 직원들은 때때로 성교육을 진행하는 교사가 되었다. “성 지식에 대한 민주화”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굿바이브레이션스의 창업자인 블랭크는 직원 면접을 보면서 “당신이 하루종일 단 한 개도 못 팔아도 신경 안 써요. 교육하는 일, 그리고 여성이 자신의 성적 이익을 탐구할 수 있는 대안 공간을 제공하는 게 중요해요”라고 말했다. 보다 많은 여성에게 즐거움을 선물하겠다는 사명감을 느낄 수 있는 뜨거운 대목인 동시에 사업의 앞날이 걱정되는 대목이다.
어떤 멋진 사명을 가진 섹스토이숍이라 하더라도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꾸준한 수익 창출이 필요하다. 초기에는 여성 섹스토이숍만의 특색이 있었지만, 점차 대형 섹스토이숍에서도 여성친화적 문화를 따르기 시작하면서 수익 창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일례로 앞서 언급한 굿바이브레이션스는 2007년 GVA-TWN이라는 대규모 섹스토이 도매업체에 매각되기도 했다. GVA-TWN이 굿바이브레이션스의 영향으로 여성에게 친화적인 방향으로 사업 모델을 개편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저자는 굿바이브레이션스가 앞으로도 예전 고객들이 알고 사랑했던 그 섹스 포지티브하고, 퀴어친화적이며, 페미니즘 지향적인 회사로 남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물론 안정적인 재정 상황을 발판삼아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새 출발로 평가하는 직원도 있었다.
여성 섹스토이숍의 과거와 현재, 여성 섹스토이숍이 구축한 문화와 대단한 성취를 보여주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섹스토이숍을 운영하면서 벌어지는 가치관의 충돌이다. 페미니스트로서의 ‘나’와 이윤추구에 골몰해야 하는 사업 운영자로서의 ‘나’가 충돌하면서 겪는 괴로움이나, 각자가 지향하는 바가 다름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직원들 사이에서 터지는 갈등은 이들이 지금껏 결코 쉽지 않은 일을 해왔다는 걸 새삼 상기시킨다. 예를 들어 여성 친화적인 섹스토이숍에 포르노를 틀어놓는다고 할 때, 이 포르노가 여성 섹스토이숍에 틀어도 될만한 포르노인가를 합의해가는 과정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직원들은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즐거움을 전하겠다는 사명으로 일하지만, 즐거움이나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에 정답은 없기에 자연스럽게도 언제나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갈등을 해결해가는 과정 또한 페미니즘 운동의 일부다. 여성의 쾌락을 발명하고 더 나은 세계를 모색하는 일이니 말이다.
한편 이 책에 몇 가지 아쉬움도 남는다. 저자는 성혁명과 섹스 포지티비티를 다루면서도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연구와 운동에서 주요하게 촉발되었던 논쟁이나 문제의식은 언급하지 않는다. 섹스 포지티비티는 논쟁 속에 탄생한 입장이고 여전히 논쟁적이다. 섹스를 긍정하지 않는 페미니스트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다. 섹스 포지티브 입장을 가진 페미니스트들이 성적 욕망을 그 자체로 긍정한다는 비판은 부당하다. 하지만 욕망을 정치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면, 섹스 포지티브 입장에 가해지는 비판 중 부당한 일부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일례로 프랜시스 빌, 린다 라 루, 벨 훅스와 같은 흑인 페미니스트는 백인 페미니스트가 섹슈얼리티를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보는 것 자체를 특권이라고 지적했다. 빈곤한 유색인 여성에게 피임약 임상 시험이나 불임 시술을 강제했던 끔찍한 역사가 있기에 흑인 여성에게 쾌락과 고통은 복잡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이유다.[ref]캐서린 앤젤. 조고은 옮김. (2022).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ref]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가 멕시코 여성의 성적 욕망 체계와 실천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밝히는 한 연구[ref]Tyburczy, J. (2016). Sex Toys after NAFTA: Transnational Class Politics, Erotic Consumerism, and the Economy of Female Pleasure in Mexico City [/ref] 에서 초국가적 경제체제가 개인의 욕망 체계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것처럼 욕망에는 여러 요소가 복잡하게 관여한다.
또한 저자가 주요하게 언급한 마스터스와 존슨의 그 유명한 연구도 이후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연구참여자 대부분이 워싱턴 대학에서 모집한 백인 고학력 중상류층이었으며 이미 성적으로 적극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ref]캐서린 앤젤. 조고은 옮김. (2022).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ref] 마스터스와 존슨의 연구가 갖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이들의 연구가 어떤 의미에서 ‘18~19세기의 성 관련 문헌 속에 뚜렷이 나타났던 불안 조성 전통을 잇고 있다’는 것이다.[ref]게일 혹스. 임인숙 옮김. (2005). 『섹슈얼리티와 사회』 [/ref] 이른바 ‘오르가슴 불안’이다.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 자체가 병리화되며 여성용 비아그라 개발의 근거로 사용되는 식이다. 오르가슴에 관한 무조건적 긍정과 옹호는 섹스토이숍의 운영 전략일 수 있지만, 섹스 포지티브 입장을 가진 연구자로서 오르가슴과 쾌락, 욕망의 관계에 대한 면밀한 분석까지 나아갔다면 더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한국에서도 여성을 주요 소비자층으로 삼은 섹스토이숍이 여럿 생겼다. 새로운 섹스토이숍의 등장은 201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다시금 불붙은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가게들은 ‘성인용품’ 간판을 달고 왠지 비밀스러운 모습으로 운영되던 과거의 섹스토이숍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섹스와 욕망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말하는 새로운 섹스토이숍의 운영자들은 섹스토이와 친해질 기회를 미처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말을 걸며 즐거움을 향해 함께 모험해보자고 제안한다. 이 책처럼 말이다. 섹스토이를 활용해 즐거움의 형태를 다양한 모습으로 키워가는 각자의 경험이 섹스토이숍 안팎으로 더 많이 말해지길 기대한다.
[참고문헌]
게일 혹스. 임인숙 옮김. (2005). 『섹슈얼리티와 사회』. 일신사.
린 코멜라. 조은혜 옮김. (2022). 『바이브레이터의 나라』. 오월의봄.
캐서린 앤젤. 조고은 옮김. (2022).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중앙books.
Barbara Ehrenreich, Elizabeth Hess, Gloria Jacobs. (1986). 『Re-Making Love: The Feminization Of Sex』. Anchor Books.
Tyburczy, J. (2016). Sex Toys after NAFTA: Transnational Class Politics, Erotic Consumerism, and the Economy of Female Pleasure in Mexico City. Signs: Journal of Women in Culture and Society, 42, 123-152.
쾌락을 팝니다 : 『바이브레이터의 나라』 서평
김보영 셰어 기획운영위원, 에브리바디 플레져랩팀
린 코멜라가 쓰고 조은혜가 옮긴 『바이브레이터의 나라(원제: Vibrator Nation)』가 얼마 전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은 미국에서 여성을 주요 소비자층으로 하는 섹스토이 시장이 어떻게 형성되고 확대되었는지를 다룬다. 저자는 섹스토이 산업을 개척해 온 여성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하였으며 섹스토이숍 광고, 섹스토이숍으로 날아온 고객의 편지처럼 흥미진진한 자료를 아카이빙했다. 이 책이 가진 큰 강점은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 속에서 여성 섹스토이 산업의 형성과정을 짚어낸다는 것이다. 그 둘은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다.
여성 섹스토이 산업의 형성은 미국의 성혁명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다. 이른바 성혁명이 본격화된 1960년대에는 성역할이나 성에 관한 보수적 관념에 대항하는 담론이 쏟아져나왔다. FDA(미국 식품의약국)가 경구피임약을 승인하면서 여성의 성적 자율성이 확대된 시기였으며, 여성이 소비자 주체로서 자리 잡아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성혁명이라는 명명이 온당한지에서부터 성혁명을 촉발한 사회적 배경과 그 진행 과정만 쓴다 해도 책 한 권은 거뜬히 채우겠지만, 『바이브레이터의 나라』는 이 성혁명이라는 배경을 간략히 언급할 뿐이다. 이 책은 그 시기에 여성 섹스토이숍을 창업한 구체적 여성에 더욱 주목하기 때문이다.[ref]이 시기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배신’ 시리즈로 잘 알려진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엘리자베스 헤스, 글로리아 제이콥과 함께 쓴 『Re-making Love』를 참고하면 좋을듯하다. 이 책은 페미니즘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여성이 아닌, 그보다는 ‘평범한’ 여성의 일상에 어떻게 성혁명이 들이닥쳤는지를 보여준다. 게일 혹스의 『섹슈얼리티와 사회』도 이 시기를 일부 다룬다. 특히 여성의 쾌락 추구가 소비자본주의와 통합되는 지점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한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섹스 시장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선택의 파노라마를 제시하고, 그 속에서 개인들이 진열장의 에로틱 상품을 구경하고 쇼핑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도록 조장한다. 섹슈얼리티와 관련하여 시장의존성이 가져올 수 있는 하나의 결과는 성적 이미지를 선택하고 동일시하는 일이 실제적인 성 행동, 즉 행해진 성보다 중요시될 수 있다는 점이다."[/ref]
성혁명이라 불리는 시기가 시작될 즈음까지도 섹스에 관한 공적 담론은 의료종사자, 특히 산부인과 및 정신과 의사가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결혼 매뉴얼’이라 불리기도 했던 대중적 섹스 가이드를 출판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소비자본주의와 페미니즘 운동의 팽창으로 섹스 담론의 주도권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1966년에 창립된 전미여성기구 NOW(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가 섹슈얼리티 컨퍼러스를 개최하며 여성들이 자신의 성기를 잘 바라보고 다룰 수 있도록 도왔으며, 여성들은 공적 공간에서 자신의 섹스 경험을 쏟아냈다. 이 같은 경험에 힘입은 여성들이 섹스토이 산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전미여성기구 활동가이기도 했던 델 윌리엄스는 섹스 워크숍에 참여한 후 많은 영향을 받아 미국 최초로 여성 섹스토이숍을 창업했다. 해방의 에너지를 다른 여성에게도 전달하고 싶다는 마음이 섹스토이숍 창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워크숍과 교육을 통해 중요하게 발견된 중요한 신체 기관이 있다. 클리토리스다. 이전에도 클리토리스의 존재를 몰랐던 건 아니지만, 질에 음경을 삽입하는 체위가 중심이던 이성애 섹스 세계에서 클리토리스는 존중받지 못했다. 그러나 클리토리스를 통한 오르가슴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여성 오르가슴에 관한 담론은 질에서 클리토리스로 그 중심을 옮겨갔다. 여성의 쾌락에 있어서 페니스가 핵심이 아니며, 페니스를 대체할만한 물건은 세상에 많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이야기되었다. 『바이브레이터의 나라』에도 언급된 마스터스와 존슨의 성과학 연구가 대표적이다. 마스터스와 존슨은 클리토리스 오르가슴에 대한 통계를 산출하는 등 여성의 성적 쾌락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ref]이 두 연구자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마스터스 오브 섹스>가 있다. [/ref]
여성 섹스토이숍을 창업한 사람들은 각자의 사명이 있었다. 남성이 중심이던 섹스토이 산업에서 여성 섹스토이숍을 운영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이들은 깔끔한 인테리어와 깨끗한 환경, 노골적인 모양을 하지 않은 섹스토이를 배치하며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고자 애썼다. 또한 이 매장을 거점으로 성에 대한 교육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갈 수 있도록 노력했고, 직원들은 때때로 성교육을 진행하는 교사가 되었다. “성 지식에 대한 민주화”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굿바이브레이션스의 창업자인 블랭크는 직원 면접을 보면서 “당신이 하루종일 단 한 개도 못 팔아도 신경 안 써요. 교육하는 일, 그리고 여성이 자신의 성적 이익을 탐구할 수 있는 대안 공간을 제공하는 게 중요해요”라고 말했다. 보다 많은 여성에게 즐거움을 선물하겠다는 사명감을 느낄 수 있는 뜨거운 대목인 동시에 사업의 앞날이 걱정되는 대목이다.
어떤 멋진 사명을 가진 섹스토이숍이라 하더라도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꾸준한 수익 창출이 필요하다. 초기에는 여성 섹스토이숍만의 특색이 있었지만, 점차 대형 섹스토이숍에서도 여성친화적 문화를 따르기 시작하면서 수익 창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일례로 앞서 언급한 굿바이브레이션스는 2007년 GVA-TWN이라는 대규모 섹스토이 도매업체에 매각되기도 했다. GVA-TWN이 굿바이브레이션스의 영향으로 여성에게 친화적인 방향으로 사업 모델을 개편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저자는 굿바이브레이션스가 앞으로도 예전 고객들이 알고 사랑했던 그 섹스 포지티브하고, 퀴어친화적이며, 페미니즘 지향적인 회사로 남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물론 안정적인 재정 상황을 발판삼아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새 출발로 평가하는 직원도 있었다.
여성 섹스토이숍의 과거와 현재, 여성 섹스토이숍이 구축한 문화와 대단한 성취를 보여주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섹스토이숍을 운영하면서 벌어지는 가치관의 충돌이다. 페미니스트로서의 ‘나’와 이윤추구에 골몰해야 하는 사업 운영자로서의 ‘나’가 충돌하면서 겪는 괴로움이나, 각자가 지향하는 바가 다름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직원들 사이에서 터지는 갈등은 이들이 지금껏 결코 쉽지 않은 일을 해왔다는 걸 새삼 상기시킨다. 예를 들어 여성 친화적인 섹스토이숍에 포르노를 틀어놓는다고 할 때, 이 포르노가 여성 섹스토이숍에 틀어도 될만한 포르노인가를 합의해가는 과정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직원들은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즐거움을 전하겠다는 사명으로 일하지만, 즐거움이나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에 정답은 없기에 자연스럽게도 언제나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갈등을 해결해가는 과정 또한 페미니즘 운동의 일부다. 여성의 쾌락을 발명하고 더 나은 세계를 모색하는 일이니 말이다.
한편 이 책에 몇 가지 아쉬움도 남는다. 저자는 성혁명과 섹스 포지티비티를 다루면서도 한편으로는 페미니즘 연구와 운동에서 주요하게 촉발되었던 논쟁이나 문제의식은 언급하지 않는다. 섹스 포지티비티는 논쟁 속에 탄생한 입장이고 여전히 논쟁적이다. 섹스를 긍정하지 않는 페미니스트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다. 섹스 포지티브 입장을 가진 페미니스트들이 성적 욕망을 그 자체로 긍정한다는 비판은 부당하다. 하지만 욕망을 정치적으로 분석하지 않는다면, 섹스 포지티브 입장에 가해지는 비판 중 부당한 일부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일례로 프랜시스 빌, 린다 라 루, 벨 훅스와 같은 흑인 페미니스트는 백인 페미니스트가 섹슈얼리티를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보는 것 자체를 특권이라고 지적했다. 빈곤한 유색인 여성에게 피임약 임상 시험이나 불임 시술을 강제했던 끔찍한 역사가 있기에 흑인 여성에게 쾌락과 고통은 복잡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이유다.[ref]캐서린 앤젤. 조고은 옮김. (2022).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ref]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가 멕시코 여성의 성적 욕망 체계와 실천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밝히는 한 연구[ref]Tyburczy, J. (2016). Sex Toys after NAFTA: Transnational Class Politics, Erotic Consumerism, and the Economy of Female Pleasure in Mexico City [/ref] 에서 초국가적 경제체제가 개인의 욕망 체계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것처럼 욕망에는 여러 요소가 복잡하게 관여한다.
또한 저자가 주요하게 언급한 마스터스와 존슨의 그 유명한 연구도 이후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연구참여자 대부분이 워싱턴 대학에서 모집한 백인 고학력 중상류층이었으며 이미 성적으로 적극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ref]캐서린 앤젤. 조고은 옮김. (2022).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ref] 마스터스와 존슨의 연구가 갖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이들의 연구가 어떤 의미에서 ‘18~19세기의 성 관련 문헌 속에 뚜렷이 나타났던 불안 조성 전통을 잇고 있다’는 것이다.[ref]게일 혹스. 임인숙 옮김. (2005). 『섹슈얼리티와 사회』 [/ref] 이른바 ‘오르가슴 불안’이다.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 자체가 병리화되며 여성용 비아그라 개발의 근거로 사용되는 식이다. 오르가슴에 관한 무조건적 긍정과 옹호는 섹스토이숍의 운영 전략일 수 있지만, 섹스 포지티브 입장을 가진 연구자로서 오르가슴과 쾌락, 욕망의 관계에 대한 면밀한 분석까지 나아갔다면 더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한국에서도 여성을 주요 소비자층으로 삼은 섹스토이숍이 여럿 생겼다. 새로운 섹스토이숍의 등장은 201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다시금 불붙은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가게들은 ‘성인용품’ 간판을 달고 왠지 비밀스러운 모습으로 운영되던 과거의 섹스토이숍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섹스와 욕망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말하는 새로운 섹스토이숍의 운영자들은 섹스토이와 친해질 기회를 미처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말을 걸며 즐거움을 향해 함께 모험해보자고 제안한다. 이 책처럼 말이다. 섹스토이를 활용해 즐거움의 형태를 다양한 모습으로 키워가는 각자의 경험이 섹스토이숍 안팎으로 더 많이 말해지길 기대한다.
[참고문헌]
게일 혹스. 임인숙 옮김. (2005). 『섹슈얼리티와 사회』. 일신사.
린 코멜라. 조은혜 옮김. (2022). 『바이브레이터의 나라』. 오월의봄.
캐서린 앤젤. 조고은 옮김. (2022).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중앙books.
Barbara Ehrenreich, Elizabeth Hess, Gloria Jacobs. (1986). 『Re-Making Love: The Feminization Of Sex』. Anchor Books.
Tyburczy, J. (2016). Sex Toys after NAFTA: Transnational Class Politics, Erotic Consumerism, and the Economy of Female Pleasure in Mexico City. Signs: Journal of Women in Culture and Society, 42, 123-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