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01월[국내이슈] 동의, 합의, 욕망 사이 - 소수자의 즐거움을 바라지 않는 사회에 저항하는 성교육

[국내이슈] 동의, 합의, 욕망 사이 - 소수자의 즐거움을 바라지 않는 사회에 저항하는 성교육

나영정/타리


1. 찾아가는 성교육이 찾으려는 것은


학교 성교육은 내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시간이었다. 내 경험이 온전히 이해되고 내가 소외되거나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받지 않는 성교육을 받고 싶었다. (게이남성)

나에게 성기는 배출을 위한 기관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그래서 ‘안쓰면 거미줄 친다’는 농담 같은 것이 싫다. (청소년 트랜스젠더)

섹스에서 나는 수동적일 때가 많고 애인에게 뭔가 싫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번개를 할 때는 대체로 동의를 구하는 편인데 콘돔을 안쓰자고 요구하면 거절하기가 어렵다. 최근에는 만나기 전에 미리 콘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피엘[ref]People Living with HIV/AIDS, HIV/AIDS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줄임말. HIV감염인들이 스스로를 지칭할 때 즐겨 사용된다. [/ref] 게이남성)

성매매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콘돔 사용이 어려운 상황에서 안전을 높이는 것이 쉽지 않다. 사정하는 것만이 목표이다보니까 협상을 시도하는데 한계가 있다. (성노동자)

부치로서 온깁[ref]Only Giver, 오로지 주는 사람의 줄임말. 주로 여성간의 섹스에서 삽입하는 역할로 고정된 사람을 가리킨다.  [/ref]을 하는데 상대방의 만족감에 중심을 두다보니까 나의 즐거움이 퇴색되는것 같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어렵다. (퀴어여성)


셰어는 주된 활동의 영역 중 하나로 포괄적 성교육 운동을 설정하고 에브리바디 플레져팀을 운영하고 있다. [에브리바디 플레져북]과 [섹스빙고] 를 제작하고 소수자집단과 함께 기획하고 진행하는 ‘찾아가는 성교육' 활동 등을 진행하고 있다. “찾아간다”는 의미는 셰어가 각각의 소수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장으로 찾아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즐거움을 증진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찾아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모두의 즐거움을 증진하는 것을 모토로 삼는 에브리바디 플레져팀은 성교육이 위험의 예방과 대처를 다루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의 ‘즐거움'을 지향하고 증진하는 방향을 설정하고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지난한 과정인지 실감하고 있다. 


[에브리바디 플레져북]과 [섹스빙고] ⓒ 한겨례 신문 이정용 기자 


이 어려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성교육이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핵심적인 고민이다.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금욕과 폭력예방 중심의 성교육의 한계를 넘어서 포괄적이고 과학적인 성건강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자 하기 때문이다. 실제의 삶에서 많은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즐거움을 추구하기도 하고, 성적 즐거움이 아닌 이유로 섹스를 하기도 하며, 동의한 섹스였지만 나쁜 섹스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들의 선택과 소통과 협상의 실패를 포함하지만 이 실패들은 각자의 능력에 매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특정한 집단의 섹스를 불법화하는 법제도, 특정한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는 사회적인 규범, 성적인 자율성을 침해하는 젠더, 나이, 질병, 빈곤 등의 구조적인 차별과 억압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셰어는 성건강에 대한 정보를 차별없이 제공하고, 누구나 자신의 성적 즐거움을 찾고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활동이 성적 억압에 저항하는 운동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이 글은 찾아가는 성교육 활동을 통해서 이러한 목표를 보다 분명히하고 강화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2. 즐거움을 금지하는 권력은 무엇인가


‘찾아가는 성교육'을 통해서 셰어는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성노동자, 청소년, 중노년 여성 등과 만나 각자의 그룹이 필요로 하는 성교육이 무엇인지 함께 질문하고, 이들이 꺼내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서로 배우는 시간을 만들고자 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학교 성교육에서 배제되었다. 청소년을 성적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성교육은 이들 전체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성교육 시간에 성소수자는 전혀 언급되지 않거나 오히려 교사의 혐오발언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전히 많은 장애인이 공고육에서 소외되고 있으며 농인학교에서조차 수어를 하지 못하는 교사가 성폭력 예방 비디오를 틀어주는 것으로 성교육을 대신하는 경우도 일쑤였다. 법적 성인이 된 이후에는 공공적인 차원에서 성건강과 성적즐거움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으며 소외된 집단일수록 더욱 심각하다. 


하지만 셰어가 이들과 함께 성교육을 진행하는 이유는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다. 이들은 현행 법제도와 사회적 규범으로 인해서 성적 권리를 국가로부터 금지당하거나 사회적인 낙인을 받고 있다. 소수자의 경험이 성교육 안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던 것은 단지 수가 적거나 사소한 문제라서가 아니라 기존의 차별과 불평등을 유지하는 구조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기존의 가치체계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취약한 그룹을 단지 ‘특별한 보호' 혹은 ‘특별한 욕구'를 가진 집단으로만 자리매김 하는 것이다. 이 차별과 낙인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도전이 가능하지 않으면, 각자가 경험해온 경험이 이러한 구조와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한 의식적인 인식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저 각자의 능력과 정보, 기회의 부족으로만 여기기 쉽다. 따라서 소수자를 위한 성교육은 바로 성적 권리에서 배제되었던 이들이 자신이 겪은 부당함에 대해서 깨닫고,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나가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적 즐거움, 만족감, 쾌감은 어떤 것일까. 오르가즘이라는 말로 수렴되기엔 부족하다. 많은 이들이 자위를 통한 즐거움과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얻는 만족감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하고, 신체적인 만족과 정신적인 만족이 다르다고 느끼기도 한다. 과학적인 지식을 통해서 알려지는 신체적인 매커니즘 또한 성별 이분법에 근거하거나 성기중심적 정상성에 기댄 설명이 많아서 많은 이들이 이와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나이, 장애, 질병, 트랜지션 등으로 인해서 각자가 느끼는 쾌감의 방식이 달라지기도 한다. 

셰어는 성교육을 통해서 각자가 신체에서 느끼는 즐거움의 느낌을 찾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편견이나 낙인이 즐거움을 찾아가는 길을 가로막지 않도록 대안적인 관점이 담긴 정보 또한 필요하다. 


장애여성을 위한 성교육 교재 <장애여성, 성을 밝히다> 2019. 삽화. @장애여성공감


하지만 즐거움을 얻기 어려운 이유의 핵심에는 사회가 소수자들이 성적 즐거움을 얻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에 있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기회, 정보, 비용, 장소 등을 마련하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무언가를 시도하다가 위험에 노출되었을 때,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타인과의 갈등이 생겼을때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얻어야 하는 비용과 시간 등의 자원 또한 필요하다. 성관계에서 발생하는 위험과 손해는 사회적인 차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소수자들은 더 많은 부담을 감당하며 손해를 복구하고 피해로부터 회복하는데 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ref] 나영정, “성관계에서의 위험(RISK)과 손해(HARM)를 정의하고 대처하기” 참조 https://srhr.kr/issuepapers/?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ODt9&bmode=view&idx=6142913&t=board [/ref] 바로 이러한 점이 자원이 부족하고 차별받는 이들이 성적 즐거움을 포기하도록 하고, 즐거움을 찾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즐거움을 찾는 과정에서 낙인과 또다른 차별에 노출되어 고통을 유발한다.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로 성적 즐거움을 고민하고, 성적권리가 인권의 영역으로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이다. 


즐거움을 권리로 만든다는 것은 구조적인 억압과 자신의 몸이 연결되는 지점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콘돔협상에서 실패해서 혹은 콘돔을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 원치않은 임신이 되었을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새삼 떠올려보자. 임신의 당사자가 겪어야 했던 일련의 고통은 낙태죄로 인해서 형사처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떨어질 수 없다. 게다가 낙태죄는 혼인상황, 경제적 상황, 나이, 장애,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국적 등의 조건에 따라서 매우 다른 효과를 발휘했고, 실제로는 혼외성관계를 한 여성, 자율적으로 자신의 신체와 성적 실천을 결정한 여성에 대해 처벌하는 기능을 해왔다. 이러한 행위를 단속하는 국가는 성풍속을 규제하기 위해서 금전거래가 매개된 성관계를 금지하고(형법 제242조) 음화제작과 반포를 금지하며(형법 제243, 244조) 공연음란을 감시한다(형법 제245조). 정조이데올로기와 모성이데올로기에 근거해서 젠더화된 폭력이 생산되는 구조를 사실상 국가가 만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강간과 강제추행을 피해자의 권리가 아니라 부계혈통과 성풍속 유지를 위해서 금지해왔던 유구한 역사속에서 군형법상 추행죄(군형법 제92조6)가 동성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으로 기능하는 것과 연결되며, 에이즈예방법 상 전파매개행위가 공중보건이 아니라 문란한 성적 행위로 인해 감염병에 걸린 이들의 성을 통제하는 것으로 작용했다(에이즈예방법 제19조). 또한 장애인, 부랑인, 홈리스, 미혼모, 성노동자를 수용하고 감금해왔던 역사는 성적 권리를 박탈하는 핵심적인 장치였다. 이렇게 성적권리의 침해는 오랜 역사속에서 국가가 행해왔던 처벌과 인권침해의 모습으로 소수자들의 몸에 켜켜이 쌓여왔다. 이러한 억압의 역사와 장치들을 이해하는 것은 현재 자신이 처한 부당한 경험의 출처와 원인을 이해하며 자신을 탓하지 않으면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해나갈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3. 동의, 합의,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그 동안 여러 소수자 단체와 함께 찾아가는 성교육을 진행하면서 나눈 소감중에 공통적인 것은 “새로울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의 경험과 고민을 들으면서 자신의 경험을 반추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는 것이었다. 참가자들 중에 일부는 자신이 경험한 즐거움과 소외감, 자신감과 두려움의 문제를 자신이 처한 사회적인 조건과 연결해서 해석해 들려주기도 했다. 대부분은 당장 적극적인 해석까지 나누긴 어려웠지만 “아 듣고보니 정말 우리는 이런 문제를 겪고 있고 이것이 청소년, 성소수자, 비혼여성 등이 겪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구나"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동시에 나와 오래 알고 지냈던 동료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할거라고 예상했던 우리 집단의 사람이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렇게 터져나온 이야기들이 더 많이 만나고, 필요한 이들에게 전해지고, 해석되고 저항의 근거로 쓰여야 한다. 


서두에 인용했던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다시 보자. 학교성교육에서는 없는 존재로 취급받았던 성소수자의 경험은 단지 내가 어떻게 건강하고 안전한 성관계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정보로부터 소외된 것이 아니다. 다른 몸, 다른 욕망, 다른 지향을 상정하지 않거나 금지한 채로 성적인 것을 논의하게 되면, 성을 매개로 맺어진 특정한 관계와 그 속에 존재하는 행복과 고통 전체를 이 세계에서 삭제해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그다지 중대한 억압으로 인식되지 않고 생존과 생계, 노동과 같은 문제보다 사소하다고 여겨지지만 성적인 것이 어떻게 생존, 노동과 긴밀하게 얽혀있는지는 차별을 당한 소수자들을 통해서 선명하게 그려진다. 오히려 정상범주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정상화된 폭력에 대해서,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법제도와 구조의 강고함에 대해서 틈을 벌릴 수 있는 힘은 여기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또한 성교육 안에서 오가는 대화를 통해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가 알려주는 이분법에 갇힐 수 없는 몸의 형태, 호르몬이 일으키는 엄청난 화학적인 변화들을 마주한다. 수엉은 트랜스/퀴어들은 “자신을 부정하거나, 잘못 호명하거나, 냉대하거나, 차별하는 사회에서 스스로가 원하는 방식을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싸우고, 협상하고, 새로운 각본을 쓰는데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 연장선 상에서 우리는 섹스를 하는 과정에서 몸과 섹스에 이미 부착되어 있는 성별이분법을 재전유하며, 그렇게 내 몸이 이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을 새롭게 써내려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ref]수엉, ‘트랜스젠더/퀴어가 새롭게 써내려가는 성애를 위해 섹스토이와 반려되기’ https://srhr.kr/issuepapers/?q=YTox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9&bmode=view&idx=13670920&t=board[/ref] 각자가 성기에, 생식기관에 부여하는 의미와 관계맺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가는 것은 자신의 생애에서도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둘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된다. 트랜스젠더/퀴어가 삶의 긴 시간을 두고, 다양한 정보와 시도, 사람과 만나서 자신의 몸에 대해서 스스로 재정의하고, 새로운 느낌을 감각하고, 그것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힘이 되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 특권이 되지 않도록 투쟁하고 싶다. 


한편 전파매개행위금지죄와 같은 형사처벌 조항은 동의와 합의를 가로막는 가장 강력한 장벽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피엘이 상대로부터 부당한 요구를 수용하게 되는 사회적인 조건은 HIV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게 하는 낙인과 결합하여 취약성을 구성한다. 피엘에게 예방의 책임을 돌리는 사회는 오히려 예방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매개감염과 임신의 예방은 취약한 조건에 있는 사람이 혼자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내탓이 되는 사회에서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면, 예방을 회피하는 요구 또한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성교육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응답을 해야 할까. 그건 동의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니 취약성을 가진 사람에게 그 성관계를 거절하고 회피하라고 할까? 많은 사람들은 위험과 손해를 무릅쓰고 성적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상대방의 요구를 여러가지 이유로 수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합의가 실패했을때 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취약성을 가진 사람이 된다. 이 동의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왜 한쪽이 부당하게 감수해야 하는가. 이 부정의에 대해서 무감각한 성 전문가, 보건당국, 성교육 교사와 강사 모두 이 부정의를 강화하는데 공모할 뿐이다. 


2022년 11월 10일 헌법재판소의 전파매개행위죄 공개변론이 열리던 날 위헌판결 촉구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감염인의 섹스는 범죄가 아니다>라고 쓰여진 피켓도 있다.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불법화의 문제는 성노동자가 고스란히 겪는 문제와 연결된다. 성매개감염병을 옮기기 때문에 단속되어야 하는 몸으로 상정됨과 동시에 콘돔을 사용하는 순간 불법행위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금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 돈이 매개가 되었지만 계약으로 인정되지 않음으로써 성노동자가 손해를 온전히 감수해야 하고, 그 상황에서 발생하는 모든 동의와 합의를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는 조건이 있다. 이 조건은 전적으로 성노동자에게 위험과 손해가 된다. 국가는 성매매를 성풍속 유지를 위해서 여전히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권력에 저항하는 방법은 “문제로 정의된 사람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때 혁명이 시작된다"(존 맥나이트)는 장애운동의 오래된 경구를 떠올린다. 이 문제를 성노동자가 정의하고, 이들이 정의하는 동의와 합의에 따라서 질서를 바꾸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ref] 이 문제는 이글에서 거의 다루지 못한 경제적인 불평등, 의존, 거래, 화폐가치 등의 이슈를 포괄한다. ‘섹스의 시장화’는 소비자시민권이 권리를 왜곡하고 대체해나가는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더 광범위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이슈이다. 특히 시장이 여성과 퀴어들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포용해나가고 있고, 많은 이들의 삶과 깊이 연루되고 있다는 점에서 성교육의 현장에서도 충분히 다루어나가야 한다. 다나 카플란;에바 일루즈, [섹스 자본이란 무엇인가], 한울아카데미, 2022 참조. [/ref] 성노동자가 힘을 가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찾아가는 성교육은 성풍속을 단속하는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로울 것이다. 


퀴어여성이 들려주는 고민은 어떠한가. 파트너에게 성적 만족감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한 고군분투는 퀴어여성이 살아온 시간을 반영한다. 성적 주체임을 부정하는 사회에서 성적 만족을 충분히 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정체화만큼이나 중대한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오드리 로드는 여성 퀴어들이 성애를 통해서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면 엄청난 앎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ref]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드], 주해연.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18, 69~80쪽. [/ref]  하지만 여성 퀴어들이 이러한 앎과 힘을 가지는 것을 불온하게 여기고, 가정과 사회를 무너뜨린다고 책동하는 사회에서 주체가 되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을 탐험하고, 위험을 예상하거나 뛰어넘으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퀴어들이 모인 자리에서 동의와 합의가 성관계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되는 경향이 많고, 이러한 과정에서 즐거움과 만족감을 높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토로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고민을 들으면서 캐서린 엔젤이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에서 힘주어 말하는 취약성에 대해서 떠올렸다. 그는 “섹스의 즐거움 중 하나는 정확하게도 예전과 다르고 새로운 애무 방식을 발견하는 것, 즉 미지의 상황에 취약해 지는 것이다.(...) 만일 기쁨과 변화를 경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취약해져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고 미지의 상태에 열려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한데 묶여 있다. 쾌락은 위험을 수반하며, 그것은 결코 미리 배제하거나 회피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성적 만족을 찾는다면 그것은 취약성에 맞서 자신을 빈틈없이 강화하는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보편적 취약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통해서다.”라고 강조했다.[ref]캐서린 엔젤, [내일의 섹스는 다시 좋아질 것이다], 조고은 옮김, 중앙북스, 2022, 161~163쪽 등 참조 [/ref]  또한 이러한 취약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섹스를 둘러싼 동의와 합의에 대한 잘못된 오해들, 실패들을 보완해나갈 수 있다고 한다. 섹스를 동의에 기반한 것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은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를 바꾸기 위함이다. 하지만 동의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의 제한점으로 인해서 동의의 주체는 언제나 확신과 열정에 기반해있다는 전제를 함으로써, 동의했지만 원하지 않았던 수많은 섹스를 말하기 어렵게 하고, 여전히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보편적 취약성의 요소를 무시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의 문제는 오히려 그 취약성에서 욕망과 즐거움이 생산된다는 것을 간과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캐서린 엔젤이 지적하는 것들은 찾아가는 성교육 활동을 할때마다 우리가 마주하는 경험과 고민 속에 담겨있는 듯하다. 


이번 지면을 통해서 다루지 못한 경험과 고민들이 훨씬 많다. 계속 보편적인 취약성을 인식하면서 그것이 힘으로 전환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이야기가 가능한 찾아가는 성교육 활동(이름은 바뀔 수도 있다 🙂)이 올해도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동의, 합의, 욕망 사이의 관계의 복잡성을 인식하고 소수자들의 즐거움을 바라지 않는 세상에 계속 저항하면서 길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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