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주의•제국주의 통치체제의 그물에서 재생산 정치를 고민하기: 연극 <리드리스>
윤수련 퍼포먼스학자
대만계 미국작가 프랜시스 야추 카위그(Frances Ya-Chu Cowhig)의 <리드리스 Lidless>는 2009년 미국 택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 랩씨어터에서 초연한 연극작품으로, 관타나모(Guantanamo Bay)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과 이 때 연루된 이들에게 벌어진 탈수용소 이후의 시간을 다룬다. <리드리스>에 대한 이 글은, 일반적으로 구금 또는 시설과 관련한 재생산권 및 재생산 정의를 논하는 글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될 것이고, 어쩌면 직면하기 어렵거나 쉽게 답을 정하기 힘든 질문들만 던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구금과 재생산권 논의를 채워온 기존의 구도나 문법으로부터 다소 비껴가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논의의 확장을 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의도로 작성되었다.
<리드리스>는 2019년과 2004년의 기억 사이를 동시에 오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2004년의 고문실을 상징하는 사각형 오렌지 조명 아래 한 미국 백인여성이 보이지 않는 고문대상에게 말을 걸며 유혹하고 조롱한다. “왜 그래, 너의 그 위대한 이슬람의 검을 오늘은 치켜들기 힘든가봐? (…) 참, 깜박했는데 나 생리 중이야. 내 스물 다섯 먹은 보지로부터 너를 지켜줄 건 아무 것도 없단 뜻이지. 허연 진물과 푸른 멍으로 떡진 네 피부에 시뻘건 얼룩을 묻힐 거라고. 내가 맹세한 국기 색깔처럼 말이야.” (제1장, 217-18쪽)
여성 고문기술자가 노골적으로 성적이고 원색적인 표현으로 무슬림 남성을 모욕하는 장면이 다소 충격적이지만, 놀라운 건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이 연극 배경의 일부인 관타나모 수용소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가 쿠바 관타나모 베이(관타나모만) 내 미해군기지에 세운 구금시설이다. 테러용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수감했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테러단체와 무관한 대다수의 무슬림 남성들을 직접 타겟팅하여 인종주의적 프로파일링 논란이 일었다. 더 큰 논란을 일으킨 것은 물고문(워터보딩) 등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난 각종 고문 및 미국 헌법에도 버젓이 명시된 적법절차를 무시한 채 재판을 생략하고 구금한 행위들이었다. 2009년에 이르러서야 오바마 정부에서 폐쇄명령을 내렸지만, 그 이후에도 관타나모 수용소는 공식적으로 폐쇄된 적이 없다.[ref] 황준범, “6명 목숨 끊은 ‘죽음의 수용소’…바이든, 관타나모 폐쇄할까,” 한겨레, 2021.09.20 참고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1012264.html[/ref]
연극은 이어 남편 루카스, 14세 딸 리아논과 함께 미국 중부에 위치한 미네소타주에서 꽃집을 운영하며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는 40세 백인여성 엘리스를 등장시킨다. 관객은 점차 엘리스가 과거 촌스러운 텍사스 사투리를 쓰던 관타나모 수용소 고문기술자, 바로 첫 장면의 그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남편 루카스는 현재 채식주의자이며 태극권을 배우는 자유로운 ‘히피’로 살고 있지만, 실은 과거 헤로인을 복용하던 마약중독자 시절 엘리스를 만났다. 엘리스는 아프가니스탄 파병군인과 고문기술자 시절 암페타민계 약물로 추정되는 알약을 사탕처럼 수시로 복용하였고, 그 탓인지 제대 후 미네소타로 이주해오는 과정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상실해버린다.[ref]정치학자 우카쉬 카민스키의 연구에 따르면 미군은 이미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으로 병사들에게 암페타민, 코데인, 덱세드린, 쏘라진(클로르프로마진) 등 다양한 중추신경계 약물을 별도의 처방전이나 적정 복용량에 대한 지시 없이 지급해왔다. 군인들은 이것을 “사탕처럼” 먹었고, 이들은 약물효과가 감소하거나 금단증상이 시작될 때 “거리에 있는 아이들만 보면 (무차별적으로) 쏘고 싶을 만큼” 극심한 신경쇠약을 겪었다고 증언한다. 해당 약물들은 흥분제로 기능하기도 했지만, 전시 트라우마를 일시적으로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틀란틱>지(The Atlantic), “슈퍼군인을 만든 약물들”(The Drugs That Built a Super Soldier), 2016.04.09 참고. https://www.theatlantic.com/health/archive/2016/04/the-drugs-that-built-a-super-soldier/477183/[/ref] 그러던 어느 날 엘리스의 꽃집에 바쉬르라는 남성이 찾아오면서 엘리스와 주변인들의 평온했던 일상은 완전히 깨지고 만다. 바쉬르는 엘리스가 관타나모베이에서 고문했던 파키스탄계 무슬림 남성으로,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캐나다로 망명했다. 풀려난 뒤 엘리스를 줄곧 찾아다니던 바쉬르는 라디오에서 엘리스의 꽃집 홍보 인터뷰 방송을 듣고 미네소타로 찾아와 ‘당신 때문에 간염을 얻게 되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당신의 간을 이식해달라’고 요구한다. 바쉬르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가 하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엘리스는 귀가 후 남편 루카스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내고, 바쉬르가 15년 전 자신의 ‘성고문’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한편, 엘리스가 없는 사이 꽃집을 다시 찾은 바쉬르는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엘리스의 딸 리아논과 친분을 쌓게 되고, 리아논의 구술사 과제를 도와주면서 서서히 자신과 엘리스의 정체를 밝히게 된다. “한겨울에도 얼굴이 선탠한 것처럼”(제2장 248쪽) 까무잡잡한 리아논은 사실 엘리스와 바쉬르의 성관계를 통해 출생한 아이였다. 바쉬르의 천식 질환을 물려받은 리아논은 바쉬르의 ‘새우꺾기’ 고문자세를 재연해 보이다 질식해 숨지고, 자신의 간을 바쉬르에게 이식하게 된다.[ref]새우꺾기와 같은 자세를 미국에서는 ‘stress position’이라고 부른다. 이 같은 stress position이 강요된 화성외국인보호소 같은 국내 구금시설이 관타나모 수용소에 비교되기도 했다. 박래군, “80년대 뒷수갑의 기억…여전히 ‘합법적 고문’ 인정되는 한국,” 한겨레, 2021.10.09.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14528.html?_ga=2.19942399.670653877.1678634322-302051271.1678634322 [/ref] 절망한 엘리스는 평소 천식증상 때문에 심호흡 연습을 하곤 했던 리아논의 호흡법을 따라하며, 리아논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바뀌길, 세상이 바뀌길” (제15장 894쪽) 기도한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고문이 자행된다는 것이 알려지는 과정에서 미군이 엘리스와 같은 여성 고문기술자들로 하여금 무슬림 남성을 대상으로 강간 및 강제추행을 저지르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21년 한국에서도 개봉한 영화 <모리타니안>의 원작 <관타나모 다이어리>의 저자 모하메드 오울드 슬라히 또한 여성 간수들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이 같은 고문전략은 혼외 성적접촉을 엄격히 금지하는 이슬람 교리에 정확히 반하므로 무슬림 수감인들의 수치심을 극대화하고 이들을 구타와 같은 폭행 없이도 단시간에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고안되었다.[ref]Carol D. Leonnig and Dana Priest, “Detainees Accuse Female Interrogators, The Washington Post February 10, 2005.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politics/2005/02/10/detainees-accuse-female-interrogators/1e472805-5bf4-4144-ac5a-f46a1968c9dd/[/ref]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여성 고문기술자들은 붉은 페인트를 손에 묻혀 마치 생리혈을 무슬림 수감인 얼굴에 묻힐 것처럼 위협하거나, 짧은 치마를 입거나 상체 속옷을 노출하고 원치 않는 신체접촉을 했다(이와 유사하게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미군 남성 고문기술자들이 아랍 수감인들을 추행하거나 수감인들로 하여금 서로 항문성교, 오럴 섹스, 사도마조히즘적 체위를 따라하게끔 강요한 사례가 있다).[ref]Jasbir K. Puar, “Abu Ghraib: Arguing against Exceptionalism,” Feminist Studies 30, no. 2 (2004): 522-534. [/ref]
이 같은 사건의 배경에는 미국사회가 오랫동안 아랍계 시민들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히잡을 쓴 억압된 무슬림 여성’) 또는 과잉(‘백인여성을 강간하고 일부다처제라는 구습을 지속하는 성착취적 무슬림 남성’)되게 재현해온 것과 더불어 무슬림 인구를 감시통제함으로써 ‘선량한 (백인)미국인을 보호’하고자 했던 국가폭력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ref]Sahar F. Aziz, “Orientalism, Empire and The Racial Muslim,” Overcoming Orientalism (ed. Tamara Sonn, Oxford University Press, 2021); Erik Love, Islamophobia and Racism in America (NYU Press, 2017). [/ref] 자스비어 푸아는 더불어 아부 그라이브와 관타나모 성고문 보도를 끊임없이 양산하고 이에 선정적으로 집착하는 미국사회야말로 수감인들의 인권과는 무관하게 ‘평범한 미국인과는 무언가 본질적으로 다른 중동과 아랍문화’라는 타자를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공고히 하는 것이라 지적했다.[ref]Puar 524. [/ref]
이런 맥락에서 <리드리스> 주인공들이 재생산 정의를 쟁취해내려는 투지 어린 생존자와, 타인의 재생산권을 침해하는 가해자로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는 점은 고민해볼 만하다. 또한 <리드리스>는 백인남성 권력자와 비백인여성 소수자라는 익숙한 젠더권력의 문법을 따르지도 않으며, 때때로 성적자기결정권, 신체주권, 재생산권리 투쟁에 동원되는 언어와 의제들의 경계를 마구 흐트러뜨린다. 가령, 간을 요구하는 바쉬르에게 엘리스가 “당신이 내 몸의 일부를 요구할 권리는 없어”(I do not owe you a piece of my body)라고 할 때, 이는 미국 프로초이스(pro-choice) 운동 정체성을 나타내는 “내 몸, 내 선택”(My body, my choice)이라는 구호를 연상케 한다. 얼핏 고문기술자이자 성폭력 가해자일 뿐인 엘리스가 프로초이스 구호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몸, 내 선택”이라는 구호가 강조하는 여성 개인의 신체주권과 자율성이 쉽고 단순하게 ‘선택’의 문제로 환원되고 전유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엘리스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바쉬르의 아이인 리아논을 낳고 길렀지만, 그 선택은 과연 ‘윤리적’ 결정이거나 여성으로서의 정당한 재생산권 행사였을까? 아니, 인종, 젠더, 폭력, 위계, 성적욕망이 복잡하게 뒤얽힌 이 관계에서 ‘윤리’를 말한다는 것은 도대체 주인공들의 신체를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만 가능한 것일까?
이 같은 질문들은, ‘남성도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거나 ‘여성도 섹슈얼리티를 이용한다’는 식의 탈맥락적이고 성별위계만 바뀐 도식적 이해 너머, 국가의 책임과 감시통치체제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좀더 세밀화할 것을 주문한다. 바쉬르, 엘리스, 리아논의 이야기는 미국의 인종차별적 국가폭력이 구금을 통해 무슬림 남성의 신체를 감시통제하는 과정에서 백인여성을 동원하여 성적수치심을 유발하는 한편, 생리혈과 같은 여성의 재생산 표식들을 혐오물이자 고문수단으로 이용하여 여성 신체 자체를 도구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엘리스와 바쉬르는 익숙한 성폭력의 문법 하에서는 분명한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이지만, 극이 흘러갈 수록 둘은 15년 전 폭력이 발생했던 그 순간에도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통제할 수 없었던 여러 신체 반응들을 기억해내고는 혼란스러워한다. 특히 바쉬르는 성추행 트라우마에 대한 생존전략으로, 엘리스를 파키스탄에 두고 온 아내처럼 대했으나, 수용소에서 나온 뒤로는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앉은 의자 말고는 방은 텅 비어있었어. 내 귀, 눈, 목에 그녀의 숨결을 느꼈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가 내 귀에 속삭이면 나는…딱딱해지곤 했어. 발가락부터 올라왔어, 뭔가 뜨겁고 끓는 것이 말이야. 그러면 나는 예언자를 한 명씩 떠올렸지. 내가 아는 기도문이란 기도문은 다 외웠어. 그렇지만 그녀는 숨소리로, 열기로, 땀으로 소통했어.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깨닫고는, 난 그녀가 내 아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그녀의 눈에서 내 아내의 모습을 봤어. 그녀의 입술, 머리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게 사실이 되어버렸어. 그 즈음이었던가, 내 아내는 더이상 나를 기다리기를 포기했다지. 셰마야는 우리 딸 자키야를 맡겨놓고는 주머니에 돌을 넣고 바다로 걸어들어갔대. 이제는 아내 얼굴을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엘리스 당신의 모습만 보여.” (13장, 744쪽)
작가 프랜시스 야추 카위그는 인터뷰에서 “단순한 피해자 얘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ref]Caridad Svich, “Recovering Trauma: An Interview with Frances Ya-Chu Cowhig,” HotReview.org, September 2011, http://www.hotreview.org/articles/recoveringtrauma.htm [/ref] 이를 반영하듯 바쉬르 역시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철하거나 ‘피해자다운’ 모습을 보이기 보다는, 성폭력 트라우마, 성적 욕망,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 리아논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늘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는 입체적인 생존자이다. 성적 권리의 주체가 재생산 영역에서 어떤 위치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는 과정은 이처럼 다양하게 상충하고 모순되는 피해, 욕망, 권리, 폭력, 친밀성들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또한 나영정이 지적하듯 “발전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려는 국가 기조하에서 어떤 이들의 활동을 환영할 것인가”가 “어떤 이들의 재생산을 환영하고 지원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되는 문제라면, <리드리스>의 엘리스, 바쉬르, 리아논이 얽혀있는 인종주의적•제국주의적 통치체제의 그물에서 누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위치에서 신체주권과 성적욕망을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폭넓은 의미에서의 재생산 영역과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겠다.[ref]나영정, “[국내이슈] 이동권은 재생산 정의다.” <이슈페이퍼>, 셰어: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2022.05.03. https://srhr.kr/issuepapers/?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c6ImtleXdvcmQiO3M6Njoi7Iuc7ISkIjt9&bmode=view&idx=11327003&t=board [/ref]
그런 면에서 엘리스와 바쉬르의 딸인 리아논의 희생은 많은 고민점을 남긴다. 엘리스가 애초에 추행의 결과물인 리아논을 낳지 않았다면 바쉬르 역시 살지 못했을 것이고, 바쉬르가 살지 못했다면 엘리스 역시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할 것이다. 연극은 파키스탄에 남겨둔 바쉬르의 딸 자키야가 십수년 만에 바쉬르와 화해하고, 등장인물 모두 과거사를 기억하기 위한 깊은 호흡을 함께 하며 막을 내린다. <리드리스>는 트라우마를 딛고 관계의 회복을 통해 나와 타인의 존엄을 ‘재생’해나가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주지만, 그 과정은 또한 결정권을 가진 주체들의 끈질긴 복원력과 용기로 인해 나아감을 암시한다.
인종주의•제국주의 통치체제의 그물에서 재생산 정치를 고민하기: 연극 <리드리스>
윤수련 퍼포먼스학자
대만계 미국작가 프랜시스 야추 카위그(Frances Ya-Chu Cowhig)의 <리드리스 Lidless>는 2009년 미국 택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 랩씨어터에서 초연한 연극작품으로, 관타나모(Guantanamo Bay)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과 이 때 연루된 이들에게 벌어진 탈수용소 이후의 시간을 다룬다. <리드리스>에 대한 이 글은, 일반적으로 구금 또는 시설과 관련한 재생산권 및 재생산 정의를 논하는 글과는 사뭇 다르게 전개될 것이고, 어쩌면 직면하기 어렵거나 쉽게 답을 정하기 힘든 질문들만 던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은 구금과 재생산권 논의를 채워온 기존의 구도나 문법으로부터 다소 비껴가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논의의 확장을 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의도로 작성되었다.
<리드리스>는 2019년과 2004년의 기억 사이를 동시에 오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2004년의 고문실을 상징하는 사각형 오렌지 조명 아래 한 미국 백인여성이 보이지 않는 고문대상에게 말을 걸며 유혹하고 조롱한다. “왜 그래, 너의 그 위대한 이슬람의 검을 오늘은 치켜들기 힘든가봐? (…) 참, 깜박했는데 나 생리 중이야. 내 스물 다섯 먹은 보지로부터 너를 지켜줄 건 아무 것도 없단 뜻이지. 허연 진물과 푸른 멍으로 떡진 네 피부에 시뻘건 얼룩을 묻힐 거라고. 내가 맹세한 국기 색깔처럼 말이야.” (제1장, 217-18쪽)
여성 고문기술자가 노골적으로 성적이고 원색적인 표현으로 무슬림 남성을 모욕하는 장면이 다소 충격적이지만, 놀라운 건 이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이 연극 배경의 일부인 관타나모 수용소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가 쿠바 관타나모 베이(관타나모만) 내 미해군기지에 세운 구금시설이다. 테러용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수감했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테러단체와 무관한 대다수의 무슬림 남성들을 직접 타겟팅하여 인종주의적 프로파일링 논란이 일었다. 더 큰 논란을 일으킨 것은 물고문(워터보딩) 등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난 각종 고문 및 미국 헌법에도 버젓이 명시된 적법절차를 무시한 채 재판을 생략하고 구금한 행위들이었다. 2009년에 이르러서야 오바마 정부에서 폐쇄명령을 내렸지만, 그 이후에도 관타나모 수용소는 공식적으로 폐쇄된 적이 없다.[ref] 황준범, “6명 목숨 끊은 ‘죽음의 수용소’…바이든, 관타나모 폐쇄할까,” 한겨레, 2021.09.20 참고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1012264.html[/ref]
연극은 이어 남편 루카스, 14세 딸 리아논과 함께 미국 중부에 위치한 미네소타주에서 꽃집을 운영하며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는 40세 백인여성 엘리스를 등장시킨다. 관객은 점차 엘리스가 과거 촌스러운 텍사스 사투리를 쓰던 관타나모 수용소 고문기술자, 바로 첫 장면의 그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남편 루카스는 현재 채식주의자이며 태극권을 배우는 자유로운 ‘히피’로 살고 있지만, 실은 과거 헤로인을 복용하던 마약중독자 시절 엘리스를 만났다. 엘리스는 아프가니스탄 파병군인과 고문기술자 시절 암페타민계 약물로 추정되는 알약을 사탕처럼 수시로 복용하였고, 그 탓인지 제대 후 미네소타로 이주해오는 과정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상실해버린다.[ref]정치학자 우카쉬 카민스키의 연구에 따르면 미군은 이미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으로 병사들에게 암페타민, 코데인, 덱세드린, 쏘라진(클로르프로마진) 등 다양한 중추신경계 약물을 별도의 처방전이나 적정 복용량에 대한 지시 없이 지급해왔다. 군인들은 이것을 “사탕처럼” 먹었고, 이들은 약물효과가 감소하거나 금단증상이 시작될 때 “거리에 있는 아이들만 보면 (무차별적으로) 쏘고 싶을 만큼” 극심한 신경쇠약을 겪었다고 증언한다. 해당 약물들은 흥분제로 기능하기도 했지만, 전시 트라우마를 일시적으로 진정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틀란틱>지(The Atlantic), “슈퍼군인을 만든 약물들”(The Drugs That Built a Super Soldier), 2016.04.09 참고. https://www.theatlantic.com/health/archive/2016/04/the-drugs-that-built-a-super-soldier/477183/[/ref] 그러던 어느 날 엘리스의 꽃집에 바쉬르라는 남성이 찾아오면서 엘리스와 주변인들의 평온했던 일상은 완전히 깨지고 만다. 바쉬르는 엘리스가 관타나모베이에서 고문했던 파키스탄계 무슬림 남성으로,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캐나다로 망명했다. 풀려난 뒤 엘리스를 줄곧 찾아다니던 바쉬르는 라디오에서 엘리스의 꽃집 홍보 인터뷰 방송을 듣고 미네소타로 찾아와 ‘당신 때문에 간염을 얻게 되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당신의 간을 이식해달라’고 요구한다. 바쉬르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가 하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엘리스는 귀가 후 남편 루카스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내고, 바쉬르가 15년 전 자신의 ‘성고문’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한편, 엘리스가 없는 사이 꽃집을 다시 찾은 바쉬르는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엘리스의 딸 리아논과 친분을 쌓게 되고, 리아논의 구술사 과제를 도와주면서 서서히 자신과 엘리스의 정체를 밝히게 된다. “한겨울에도 얼굴이 선탠한 것처럼”(제2장 248쪽) 까무잡잡한 리아논은 사실 엘리스와 바쉬르의 성관계를 통해 출생한 아이였다. 바쉬르의 천식 질환을 물려받은 리아논은 바쉬르의 ‘새우꺾기’ 고문자세를 재연해 보이다 질식해 숨지고, 자신의 간을 바쉬르에게 이식하게 된다.[ref]새우꺾기와 같은 자세를 미국에서는 ‘stress position’이라고 부른다. 이 같은 stress position이 강요된 화성외국인보호소 같은 국내 구금시설이 관타나모 수용소에 비교되기도 했다. 박래군, “80년대 뒷수갑의 기억…여전히 ‘합법적 고문’ 인정되는 한국,” 한겨레, 2021.10.09.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14528.html?_ga=2.19942399.670653877.1678634322-302051271.1678634322 [/ref] 절망한 엘리스는 평소 천식증상 때문에 심호흡 연습을 하곤 했던 리아논의 호흡법을 따라하며, 리아논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바뀌길, 세상이 바뀌길” (제15장 894쪽) 기도한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고문이 자행된다는 것이 알려지는 과정에서 미군이 엘리스와 같은 여성 고문기술자들로 하여금 무슬림 남성을 대상으로 강간 및 강제추행을 저지르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21년 한국에서도 개봉한 영화 <모리타니안>의 원작 <관타나모 다이어리>의 저자 모하메드 오울드 슬라히 또한 여성 간수들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이 같은 고문전략은 혼외 성적접촉을 엄격히 금지하는 이슬람 교리에 정확히 반하므로 무슬림 수감인들의 수치심을 극대화하고 이들을 구타와 같은 폭행 없이도 단시간에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고안되었다.[ref]Carol D. Leonnig and Dana Priest, “Detainees Accuse Female Interrogators, The Washington Post February 10, 2005.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politics/2005/02/10/detainees-accuse-female-interrogators/1e472805-5bf4-4144-ac5a-f46a1968c9dd/[/ref]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여성 고문기술자들은 붉은 페인트를 손에 묻혀 마치 생리혈을 무슬림 수감인 얼굴에 묻힐 것처럼 위협하거나, 짧은 치마를 입거나 상체 속옷을 노출하고 원치 않는 신체접촉을 했다(이와 유사하게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미군 남성 고문기술자들이 아랍 수감인들을 추행하거나 수감인들로 하여금 서로 항문성교, 오럴 섹스, 사도마조히즘적 체위를 따라하게끔 강요한 사례가 있다).[ref]Jasbir K. Puar, “Abu Ghraib: Arguing against Exceptionalism,” Feminist Studies 30, no. 2 (2004): 522-534. [/ref]
이 같은 사건의 배경에는 미국사회가 오랫동안 아랍계 시민들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히잡을 쓴 억압된 무슬림 여성’) 또는 과잉(‘백인여성을 강간하고 일부다처제라는 구습을 지속하는 성착취적 무슬림 남성’)되게 재현해온 것과 더불어 무슬림 인구를 감시통제함으로써 ‘선량한 (백인)미국인을 보호’하고자 했던 국가폭력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ref]Sahar F. Aziz, “Orientalism, Empire and The Racial Muslim,” Overcoming Orientalism (ed. Tamara Sonn, Oxford University Press, 2021); Erik Love, Islamophobia and Racism in America (NYU Press, 2017). [/ref] 자스비어 푸아는 더불어 아부 그라이브와 관타나모 성고문 보도를 끊임없이 양산하고 이에 선정적으로 집착하는 미국사회야말로 수감인들의 인권과는 무관하게 ‘평범한 미국인과는 무언가 본질적으로 다른 중동과 아랍문화’라는 타자를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공고히 하는 것이라 지적했다.[ref]Puar 524. [/ref]
이런 맥락에서 <리드리스> 주인공들이 재생산 정의를 쟁취해내려는 투지 어린 생존자와, 타인의 재생산권을 침해하는 가해자로 명확히 나뉘지 않는다는 점은 고민해볼 만하다. 또한 <리드리스>는 백인남성 권력자와 비백인여성 소수자라는 익숙한 젠더권력의 문법을 따르지도 않으며, 때때로 성적자기결정권, 신체주권, 재생산권리 투쟁에 동원되는 언어와 의제들의 경계를 마구 흐트러뜨린다. 가령, 간을 요구하는 바쉬르에게 엘리스가 “당신이 내 몸의 일부를 요구할 권리는 없어”(I do not owe you a piece of my body)라고 할 때, 이는 미국 프로초이스(pro-choice) 운동 정체성을 나타내는 “내 몸, 내 선택”(My body, my choice)이라는 구호를 연상케 한다. 얼핏 고문기술자이자 성폭력 가해자일 뿐인 엘리스가 프로초이스 구호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몸, 내 선택”이라는 구호가 강조하는 여성 개인의 신체주권과 자율성이 쉽고 단순하게 ‘선택’의 문제로 환원되고 전유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엘리스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바쉬르의 아이인 리아논을 낳고 길렀지만, 그 선택은 과연 ‘윤리적’ 결정이거나 여성으로서의 정당한 재생산권 행사였을까? 아니, 인종, 젠더, 폭력, 위계, 성적욕망이 복잡하게 뒤얽힌 이 관계에서 ‘윤리’를 말한다는 것은 도대체 주인공들의 신체를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만 가능한 것일까?
이 같은 질문들은, ‘남성도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거나 ‘여성도 섹슈얼리티를 이용한다’는 식의 탈맥락적이고 성별위계만 바뀐 도식적 이해 너머, 국가의 책임과 감시통치체제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좀더 세밀화할 것을 주문한다. 바쉬르, 엘리스, 리아논의 이야기는 미국의 인종차별적 국가폭력이 구금을 통해 무슬림 남성의 신체를 감시통제하는 과정에서 백인여성을 동원하여 성적수치심을 유발하는 한편, 생리혈과 같은 여성의 재생산 표식들을 혐오물이자 고문수단으로 이용하여 여성 신체 자체를 도구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엘리스와 바쉬르는 익숙한 성폭력의 문법 하에서는 분명한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이지만, 극이 흘러갈 수록 둘은 15년 전 폭력이 발생했던 그 순간에도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통제할 수 없었던 여러 신체 반응들을 기억해내고는 혼란스러워한다. 특히 바쉬르는 성추행 트라우마에 대한 생존전략으로, 엘리스를 파키스탄에 두고 온 아내처럼 대했으나, 수용소에서 나온 뒤로는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앉은 의자 말고는 방은 텅 비어있었어. 내 귀, 눈, 목에 그녀의 숨결을 느꼈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가 내 귀에 속삭이면 나는…딱딱해지곤 했어. 발가락부터 올라왔어, 뭔가 뜨겁고 끓는 것이 말이야. 그러면 나는 예언자를 한 명씩 떠올렸지. 내가 아는 기도문이란 기도문은 다 외웠어. 그렇지만 그녀는 숨소리로, 열기로, 땀으로 소통했어.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깨닫고는, 난 그녀가 내 아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그녀의 눈에서 내 아내의 모습을 봤어. 그녀의 입술, 머리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게 사실이 되어버렸어. 그 즈음이었던가, 내 아내는 더이상 나를 기다리기를 포기했다지. 셰마야는 우리 딸 자키야를 맡겨놓고는 주머니에 돌을 넣고 바다로 걸어들어갔대. 이제는 아내 얼굴을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엘리스 당신의 모습만 보여.” (13장, 744쪽)
작가 프랜시스 야추 카위그는 인터뷰에서 “단순한 피해자 얘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ref]Caridad Svich, “Recovering Trauma: An Interview with Frances Ya-Chu Cowhig,” HotReview.org, September 2011, http://www.hotreview.org/articles/recoveringtrauma.htm [/ref] 이를 반영하듯 바쉬르 역시 언제나 이성적이고 냉철하거나 ‘피해자다운’ 모습을 보이기 보다는, 성폭력 트라우마, 성적 욕망,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 리아논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늘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는 입체적인 생존자이다. 성적 권리의 주체가 재생산 영역에서 어떤 위치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는 과정은 이처럼 다양하게 상충하고 모순되는 피해, 욕망, 권리, 폭력, 친밀성들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또한 나영정이 지적하듯 “발전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려는 국가 기조하에서 어떤 이들의 활동을 환영할 것인가”가 “어떤 이들의 재생산을 환영하고 지원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되는 문제라면, <리드리스>의 엘리스, 바쉬르, 리아논이 얽혀있는 인종주의적•제국주의적 통치체제의 그물에서 누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위치에서 신체주권과 성적욕망을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폭넓은 의미에서의 재생산 영역과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겠다.[ref]나영정, “[국내이슈] 이동권은 재생산 정의다.” <이슈페이퍼>, 셰어: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2022.05.03. https://srhr.kr/issuepapers/?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c6ImtleXdvcmQiO3M6Njoi7Iuc7ISkIjt9&bmode=view&idx=11327003&t=board [/ref]
그런 면에서 엘리스와 바쉬르의 딸인 리아논의 희생은 많은 고민점을 남긴다. 엘리스가 애초에 추행의 결과물인 리아논을 낳지 않았다면 바쉬르 역시 살지 못했을 것이고, 바쉬르가 살지 못했다면 엘리스 역시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할 것이다. 연극은 파키스탄에 남겨둔 바쉬르의 딸 자키야가 십수년 만에 바쉬르와 화해하고, 등장인물 모두 과거사를 기억하기 위한 깊은 호흡을 함께 하며 막을 내린다. <리드리스>는 트라우마를 딛고 관계의 회복을 통해 나와 타인의 존엄을 ‘재생’해나가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음을 보여주지만, 그 과정은 또한 결정권을 가진 주체들의 끈질긴 복원력과 용기로 인해 나아감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