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이슈] 성별이분법을 넘어 다양한 신체를 마주하기 : 법적 성별정정에서의 의료적 기준에 대한 논의와 지향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2019년 WHO가 국제질병분류 ICD-11판을 발행하면서 트랜스, 젠더 다양성 정체성은 공식적으로 비병리화되었다는 소식을 담은 이미지.
이미지 출처 : https://tgeu.org/icd-11-depathologizes-trans-and-gender-diverse-identities/
성별정체성을 법 앞에 인정받을 권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른 인격을 형성하고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기 위해서 성전환자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른 성을 진정한 성으로 법적으로 확인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에서 유래하는 근본적인 권리로서 행복추구권의 본질을 이루므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ref] 대법원 2022. 11. 24.자 2020스616 전원합의체 결정. 여기서 성전환자는 법원 판결문을 비롯하여 법학에서 트랜스젠더를 가리켜 사용하는 용어이다.[/ref]
지난 2022년 11월 24일 대법원은 미성년자녀를 둔 것을 이유로 법적 성별정정을 기각한 원심 결정을 파기하며 위와 같이 판시하였다. 이미 2006년 대법원은 최초로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정정을 허가[ref]대법원 2006. 6. 22. 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ref] 하며 “성전환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을 보장받는다”고 하였지만, ‘성정체성에 따른 성을 진정한 성으로 법적으로 확인받는 것’이 권리로서 보장된다고 명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법원은 트랜스젠더에 대해 위와 같은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2006년 대법원은 판례와 예규를 통해 성별정정의 기준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성전환증 또는 성주체성장애) 정신과 진단, 생식능력제거, 외부성기를 비롯한 신체외관의 변화’와 같은 의료적 조치들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일부 하급심 법원에서 외과적 수술 없이도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긍정적 결정들이 나왔으나 전반적인 의료적 기준 자체는 현재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고, 이로 인해 자신답게 살고자하는 많은 트랜스젠더들의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
이에 이 글에서는 국내에서 그간 성별정정에서의 의료적 기준에 있어 이루어진 논의들과 향후 개선되어야 할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별정정에서의 의료적 기준에 대한 국내 논의
한국 법원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성별정정과 관련된 결정이 있어 왔지만 당시에는 통일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어떤 법원에서는 외과적 수술 없이도 허가를 해주는 반면, 어떤 법원은 수술을 했음에도 불허하기도 했다.[ref]오미영.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허가에 관한 고찰”. 「미국헌법연구」, 24(3), 2013., 164면.[/ref] 그러한 상황을 정리한 것이 앞서 말한 대법원의 2006년 결정이다. 이 결정에서 대법원은 성별정정의 의료적 기준으로 ① 정신과적으로 성전환증의 진단을 받고 상당기간 정신과적 치료나 호르몬 치료 등을 실시하여도 여전히 위 증세가 치유되지 않았을 것, ③ 일반적인 의학적 기준에 의하여 성전환수술을 받고 반대 성으로서의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를 갖추었을 것을 제시하였다.
이후 대법원은 2006년 9월 6일 호적예규 제716호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이하 ‘대법원 예규’)를 제정하여 성별정정의 허가 기준으로 ‘정신과 진단, 성전환수술, 생식능력이 없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이후 2011년 예규 개정으로 위 기준은 조사사항이 되었고, 2020년에는 다시 참고사항이 되었다. 하지만 ‘참고사항’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해당 내용들은 여전히 법원들이 성별정정 허가여부를 판단하는 실질적인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가령 최근 부산가정법원은 대법원 예규의 각 사유는 법률적 요건은 아니라도 중요하게 고려되는 참고사항이라고 이야기하며, 성확정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남성의 성별정정 신청을 기각하였다.[ref]부산가정법원 2023. 2. 16.자 2022브20002 결정.[/ref]
한편 이러한 기준들은 법률에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법원 내부의 지침이기에 일선 법원에서는 재량을 발휘하여 대법원보다 완하된 기준에 따른 성별정정 허가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외부성기형성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남성에 대해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결정을 내렸고,[ref]서울서부지방법원 2013. 3.1 5.자 2012호파4225 결정[/ref] 이후 등 전국 각지의 법원에서 동일한 취지의 결정들이 이어졌다. 또한 2017년에는 외부성기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성별정정 결정이 나왔으며 [ref]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 2017.2.14.자 2015호기302 결정[/ref] , 2021년에는 생식능력을 제거 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남성에 대해,[ref]수원가정법원 2021.10.13.자 2020브202 결정[/ref] 2023년에는 역시 제거 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성별정정 결정도 이루어졌다.[ref]경향신문,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허가…법원 “수술, 필수요건 아냐”」, 2023. 3. 14.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3142117015 [/ref]
이러한 각 법원에서의 진전된 결정은 기존의 엄격한 성별정정 기준을 완화하고 논의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하급심 결정이기에 일반적인 기준은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고, 결국은 대법원의 판례나 예규의 개정, 또는 성별정정의 구체적 절차와 기준을 담은 법률의 제정이 요구된다.
의료적 기준 없이, 성별정체성의 권리 보장
“성별변경에 있어 전제조건이 되는 가혹한 요건을 삭제하라. 여기에는 강압, 강제, 비자발적인 생식능력제거; 수술, 호르몬 등 성전환 관련 의료적 조치; 의학적 진단, 심리평가 혹은 다른 의학적, 심리학적 절차나 조치가 포함된다”[ref] Independent Expert on protection against violence and discrimination based on 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 “Protection against violence and discrimination based on 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 UN Doc. No. A/73/152. (2018).[/ref]
1972년 세계 최초로 스웨덴은 법률을 통해 성별정정의 기준과 절차를 규정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3년 스웨덴은 해당 법률을 개정하여 수술 기준을 삭제하였다. 스웨덴에 앞서 이미 영국, 독일 등을 비롯한 유럽 대부분 국가와 미국의 여러 주에서도 수술 없이 성별정정이 가능하다. 아시아에서는 2021년 대만 타이페이 고등법원이 성별정정에 있어 생식능력 제거 요구는 위헌이라고 판단했고,[ref] [희망법 브리핑] 성별정정에 있어 수술 요구를 위헌이라고 본 대만 판결, 2021. 9. 29. https://hopeandlaw.org/%ED%9D%AC%EB%A7%9D%EB%B2%95-%EB%B8%8C%EB%A6%AC%ED%95%91-%EC%84%B1%EB%B3%84%EC%A0%95%EC%A0%95%EC%97%90-%EC%9E%88%EC%96%B4-%EC%88%98%EC%88%A0-%EC%9A%94%EA%B5%AC%EB%A5%BC-%EC%9C%84%ED%97%8C%EC%9D%B4/ [/ref]
2023년 홍콩최고법원도 유사한 판결을 내렸다.[ref] 연합뉴스, 「홍콩법원 "트랜스젠더, 성전환수술 없이 신분증 젠더 변경 가능"」[/ref]
트랜스 활동가 헨리 에드워드 체 씨는 홍콩 대법원 앞에서 ‘승소’를 의미하는 빨간색 종이를 들고 있다. (트랜스젠더 평등 홍콩//Envato 제공)
그리고 국제적으로 2018년 유엔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독립전문가는 유엔 총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위와 같이 수술과 정신과적 진단을 포함한 모든 의료적 조치를 성별정정 요건에서 제외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현재의 대법원이 요구하는 성별정정의 의료적 기준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폐지되어야 한다.
먼저 생식능력제거와 외부성기 형성, 즉 ‘성확정수술’ 기준이 삭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외과적 수술을 요구하는 것은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 신체침해와 불임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인권침해이다. 2014년 유엔인권최고대표(OHCHR), 유엔여성기구(UN Women), 세계보건기구(WHO) 등 역시 공동성명을 통해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인 사람에 대하여 법적 성별 변경을 위하여 불임을 요구하는 것은 신체적 온전성, 자기 결정권,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에 위배되며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에 대한 차별을 야기하고 영속시킨다“고 지적하기도 했다.[ref] “Eliminating forced, coercive and otherwise involuntary sterilization: an interagency statement”, OHCHR, UN Women, UNAIDS, UNDP, UNFPA, UNICEF and WHO (2014).[/ref]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비병리화한 국제질병분류 제11판 공식채택을 환영하는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성명서 이미지>
다음으로 정신과 진단 요구 역시 폐지되어야 한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은 오랜 기간 정신장애로 분류되어 왔는데, 이는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정상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가져왔다. 이에 2019년 세계보건기구는 국제질병분류 제11판(ICD-11)에서 성전환증과 성주체성장애를 삭제하여 트랜스젠더 정체성이 더 이상 질병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럼에도 현재도 대법원 예규에 따라 성별정정을 하기 위해서는 1부 이상의 정신과 진단서를 제출해야만 하는데, 이는 당사자가 자신이 질병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도록 하는 것으로 “개인의 존엄성에 불필요한 모욕을 주는 것”이다.[ref] 2021년 북아일랜드 고등법원은 영국의 2004 성별인정법이 성별변경에 있어 진단서를 요구하는 것 자체는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청구를 기각하였지만, 위와 같이 판시하며 최소한 그 진단명은 그 진단명은 국제의학계가 공인하는 비병리화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NI Judicial Review ‘JR111’ [2021] NIQB 48[/ref] 이에 대해 통계청은 ICD-11의 국내 반영을 2031년에야 하겠다고 미루고 있고, 따라서 성별정정의 기준 자체를 먼저 개정하여 더 이상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정체성이 질병임을 진단받고 증명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위와 같은 변화들은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수술에 상관없이, 정신과 의사의 보증없이 누구나 자신의 성별정체성을 정의하고 이에 따라 살아갈 권리가 있다. 성별정정에서의 의료적 요건의 폐지는 이러한 권리를 있는 그대로, 최대한 보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글의 첫머리에 대법원이 판시했듯이 말이다.
생물학이 정의하지 않는 다양한 신체를 마주하기
2006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 이후 최근 2023년 생식능력제거수술 없이 트랜스젠더 여성의 성별정정을 허가한 결정까지, 일련의 변화는 얼핏 한계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기존의 이분법적인 성별 체계 내에서 조금씩 그 요건을 바꾸고 점진적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때로는 답답해보이기도 한다. 수술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의 체계 하에서 성별정정을 선택하기 어려운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를 위한 제도 개선과 나아가 법적 성별 자체를 허무는 시도들이 있어야 함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난 17년의 이 모든 변화들을 통해 기존에 이른바 염색체, 외부성기 등 신체적 특징으로 성별을 정의하던 낡은 관점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아가 외부성기, 생식능력 제거 없이 성별을 변경한 당사자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이 사회가 유지해 온 이분법적 성별체계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인권침해인지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의료적 기준에 맞서 자신의 삶을 드러내온 이들의 힘 덕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재의 성별정정 기준이 포섭하지 못하는 다양한 이들이 자신의 삶을 드러내고 변화를 요구할 수 있도록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결코 기존의 제도로 포섭되지 통해 소위 ‘생물학적 관점’이 정의내리지 못하는 다양한 신체들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성별정정에서의 의료적 기준을 변화시키는 운동은 트랜스젠더 해방을 위한 길로 이어지는 여정은 이어져갈 것이다. 그 여정에 많은 분들의 동참을 바란다.
[국내이슈] 성별이분법을 넘어 다양한 신체를 마주하기 : 법적 성별정정에서의 의료적 기준에 대한 논의와 지향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2019년 WHO가 국제질병분류 ICD-11판을 발행하면서 트랜스, 젠더 다양성 정체성은 공식적으로 비병리화되었다는 소식을 담은 이미지.
이미지 출처 : https://tgeu.org/icd-11-depathologizes-trans-and-gender-diverse-identities/
성별정체성을 법 앞에 인정받을 권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른 인격을 형성하고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기 위해서 성전환자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른 성을 진정한 성으로 법적으로 확인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에서 유래하는 근본적인 권리로서 행복추구권의 본질을 이루므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ref] 대법원 2022. 11. 24.자 2020스616 전원합의체 결정. 여기서 성전환자는 법원 판결문을 비롯하여 법학에서 트랜스젠더를 가리켜 사용하는 용어이다.[/ref]
지난 2022년 11월 24일 대법원은 미성년자녀를 둔 것을 이유로 법적 성별정정을 기각한 원심 결정을 파기하며 위와 같이 판시하였다. 이미 2006년 대법원은 최초로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정정을 허가[ref]대법원 2006. 6. 22. 자, 2004스42 전원합의체 결정[/ref] 하며 “성전환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행복추구권을 보장받는다”고 하였지만, ‘성정체성에 따른 성을 진정한 성으로 법적으로 확인받는 것’이 권리로서 보장된다고 명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법원은 트랜스젠더에 대해 위와 같은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2006년 대법원은 판례와 예규를 통해 성별정정의 기준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성전환증 또는 성주체성장애) 정신과 진단, 생식능력제거, 외부성기를 비롯한 신체외관의 변화’와 같은 의료적 조치들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일부 하급심 법원에서 외과적 수술 없이도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긍정적 결정들이 나왔으나 전반적인 의료적 기준 자체는 현재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고, 이로 인해 자신답게 살고자하는 많은 트랜스젠더들의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
이에 이 글에서는 국내에서 그간 성별정정에서의 의료적 기준에 있어 이루어진 논의들과 향후 개선되어야 할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별정정에서의 의료적 기준에 대한 국내 논의
한국 법원에서는 1980년대 말부터 성별정정과 관련된 결정이 있어 왔지만 당시에는 통일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어떤 법원에서는 외과적 수술 없이도 허가를 해주는 반면, 어떤 법원은 수술을 했음에도 불허하기도 했다.[ref]오미영.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허가에 관한 고찰”. 「미국헌법연구」, 24(3), 2013., 164면.[/ref] 그러한 상황을 정리한 것이 앞서 말한 대법원의 2006년 결정이다. 이 결정에서 대법원은 성별정정의 의료적 기준으로 ① 정신과적으로 성전환증의 진단을 받고 상당기간 정신과적 치료나 호르몬 치료 등을 실시하여도 여전히 위 증세가 치유되지 않았을 것, ③ 일반적인 의학적 기준에 의하여 성전환수술을 받고 반대 성으로서의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를 갖추었을 것을 제시하였다.
이후 대법원은 2006년 9월 6일 호적예규 제716호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이하 ‘대법원 예규’)를 제정하여 성별정정의 허가 기준으로 ‘정신과 진단, 성전환수술, 생식능력이 없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이후 2011년 예규 개정으로 위 기준은 조사사항이 되었고, 2020년에는 다시 참고사항이 되었다. 하지만 ‘참고사항’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해당 내용들은 여전히 법원들이 성별정정 허가여부를 판단하는 실질적인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가령 최근 부산가정법원은 대법원 예규의 각 사유는 법률적 요건은 아니라도 중요하게 고려되는 참고사항이라고 이야기하며, 성확정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남성의 성별정정 신청을 기각하였다.[ref]부산가정법원 2023. 2. 16.자 2022브20002 결정.[/ref]
한편 이러한 기준들은 법률에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법원 내부의 지침이기에 일선 법원에서는 재량을 발휘하여 대법원보다 완하된 기준에 따른 성별정정 허가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외부성기형성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남성에 대해 성별정정을 허가하는 결정을 내렸고,[ref]서울서부지방법원 2013. 3.1 5.자 2012호파4225 결정[/ref] 이후 등 전국 각지의 법원에서 동일한 취지의 결정들이 이어졌다. 또한 2017년에는 외부성기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성별정정 결정이 나왔으며 [ref]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 2017.2.14.자 2015호기302 결정[/ref] , 2021년에는 생식능력을 제거 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남성에 대해,[ref]수원가정법원 2021.10.13.자 2020브202 결정[/ref] 2023년에는 역시 제거 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성별정정 결정도 이루어졌다.[ref]경향신문,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허가…법원 “수술, 필수요건 아냐”」, 2023. 3. 14.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3142117015 [/ref]
이러한 각 법원에서의 진전된 결정은 기존의 엄격한 성별정정 기준을 완화하고 논의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하급심 결정이기에 일반적인 기준은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고, 결국은 대법원의 판례나 예규의 개정, 또는 성별정정의 구체적 절차와 기준을 담은 법률의 제정이 요구된다.
의료적 기준 없이, 성별정체성의 권리 보장
“성별변경에 있어 전제조건이 되는 가혹한 요건을 삭제하라. 여기에는 강압, 강제, 비자발적인 생식능력제거; 수술, 호르몬 등 성전환 관련 의료적 조치; 의학적 진단, 심리평가 혹은 다른 의학적, 심리학적 절차나 조치가 포함된다”[ref] Independent Expert on protection against violence and discrimination based on 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 “Protection against violence and discrimination based on 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 UN Doc. No. A/73/152. (2018).[/ref]
1972년 세계 최초로 스웨덴은 법률을 통해 성별정정의 기준과 절차를 규정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3년 스웨덴은 해당 법률을 개정하여 수술 기준을 삭제하였다. 스웨덴에 앞서 이미 영국, 독일 등을 비롯한 유럽 대부분 국가와 미국의 여러 주에서도 수술 없이 성별정정이 가능하다. 아시아에서는 2021년 대만 타이페이 고등법원이 성별정정에 있어 생식능력 제거 요구는 위헌이라고 판단했고,[ref] [희망법 브리핑] 성별정정에 있어 수술 요구를 위헌이라고 본 대만 판결, 2021. 9. 29. https://hopeandlaw.org/%ED%9D%AC%EB%A7%9D%EB%B2%95-%EB%B8%8C%EB%A6%AC%ED%95%91-%EC%84%B1%EB%B3%84%EC%A0%95%EC%A0%95%EC%97%90-%EC%9E%88%EC%96%B4-%EC%88%98%EC%88%A0-%EC%9A%94%EA%B5%AC%EB%A5%BC-%EC%9C%84%ED%97%8C%EC%9D%B4/ [/ref]
2023년 홍콩최고법원도 유사한 판결을 내렸다.[ref] 연합뉴스, 「홍콩법원 "트랜스젠더, 성전환수술 없이 신분증 젠더 변경 가능"」[/ref]
트랜스 활동가 헨리 에드워드 체 씨는 홍콩 대법원 앞에서 ‘승소’를 의미하는 빨간색 종이를 들고 있다. (트랜스젠더 평등 홍콩//Envato 제공)
그리고 국제적으로 2018년 유엔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독립전문가는 유엔 총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위와 같이 수술과 정신과적 진단을 포함한 모든 의료적 조치를 성별정정 요건에서 제외하라는 권고를 내렸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현재의 대법원이 요구하는 성별정정의 의료적 기준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폐지되어야 한다.
먼저 생식능력제거와 외부성기 형성, 즉 ‘성확정수술’ 기준이 삭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외과적 수술을 요구하는 것은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 신체침해와 불임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인권침해이다. 2014년 유엔인권최고대표(OHCHR), 유엔여성기구(UN Women), 세계보건기구(WHO) 등 역시 공동성명을 통해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인 사람에 대하여 법적 성별 변경을 위하여 불임을 요구하는 것은 신체적 온전성, 자기 결정권,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에 위배되며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에 대한 차별을 야기하고 영속시킨다“고 지적하기도 했다.[ref] “Eliminating forced, coercive and otherwise involuntary sterilization: an interagency statement”, OHCHR, UN Women, UNAIDS, UNDP, UNFPA, UNICEF and WHO (2014).[/ref]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비병리화한 국제질병분류 제11판 공식채택을 환영하는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성명서 이미지>
다음으로 정신과 진단 요구 역시 폐지되어야 한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은 오랜 기간 정신장애로 분류되어 왔는데, 이는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정상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가져왔다. 이에 2019년 세계보건기구는 국제질병분류 제11판(ICD-11)에서 성전환증과 성주체성장애를 삭제하여 트랜스젠더 정체성이 더 이상 질병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럼에도 현재도 대법원 예규에 따라 성별정정을 하기 위해서는 1부 이상의 정신과 진단서를 제출해야만 하는데, 이는 당사자가 자신이 질병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도록 하는 것으로 “개인의 존엄성에 불필요한 모욕을 주는 것”이다.[ref] 2021년 북아일랜드 고등법원은 영국의 2004 성별인정법이 성별변경에 있어 진단서를 요구하는 것 자체는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청구를 기각하였지만, 위와 같이 판시하며 최소한 그 진단명은 그 진단명은 국제의학계가 공인하는 비병리화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NI Judicial Review ‘JR111’ [2021] NIQB 48[/ref] 이에 대해 통계청은 ICD-11의 국내 반영을 2031년에야 하겠다고 미루고 있고, 따라서 성별정정의 기준 자체를 먼저 개정하여 더 이상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정체성이 질병임을 진단받고 증명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위와 같은 변화들은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수술에 상관없이, 정신과 의사의 보증없이 누구나 자신의 성별정체성을 정의하고 이에 따라 살아갈 권리가 있다. 성별정정에서의 의료적 요건의 폐지는 이러한 권리를 있는 그대로, 최대한 보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글의 첫머리에 대법원이 판시했듯이 말이다.
생물학이 정의하지 않는 다양한 신체를 마주하기
2006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 이후 최근 2023년 생식능력제거수술 없이 트랜스젠더 여성의 성별정정을 허가한 결정까지, 일련의 변화는 얼핏 한계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기존의 이분법적인 성별 체계 내에서 조금씩 그 요건을 바꾸고 점진적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때로는 답답해보이기도 한다. 수술 여부와 상관없이 지금의 체계 하에서 성별정정을 선택하기 어려운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를 위한 제도 개선과 나아가 법적 성별 자체를 허무는 시도들이 있어야 함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난 17년의 이 모든 변화들을 통해 기존에 이른바 염색체, 외부성기 등 신체적 특징으로 성별을 정의하던 낡은 관점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아가 외부성기, 생식능력 제거 없이 성별을 변경한 당사자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이 사회가 유지해 온 이분법적 성별체계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인권침해인지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의료적 기준에 맞서 자신의 삶을 드러내온 이들의 힘 덕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재의 성별정정 기준이 포섭하지 못하는 다양한 이들이 자신의 삶을 드러내고 변화를 요구할 수 있도록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결코 기존의 제도로 포섭되지 통해 소위 ‘생물학적 관점’이 정의내리지 못하는 다양한 신체들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성별정정에서의 의료적 기준을 변화시키는 운동은 트랜스젠더 해방을 위한 길로 이어지는 여정은 이어져갈 것이다. 그 여정에 많은 분들의 동참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