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보건법 제14조, 형식만 남았을 뿐 법적 효력 없다
최현정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기획운영위원

2021년 1월 1일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후 5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임신중지 의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낙태죄 조항과 함께 실효된 모자보건법 제14조를 계속 소환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모자보건법 제14조는 형법 낙태죄 조항을 전제로 한 조항으로서, 낙태죄 조항이 실효된 것과 함께 법적인 효력을 잃었다.
#1. 모자보건법 제14조의 법적 의미 : 낙태죄로 처벌받지 않는 한계 설정
형법은 1953년 제정될 때부터 낙태죄 조항을 두고 있었다. 여성이 약물이나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경우 여성을 처벌하고(형법 제269조 제1항, ‘자기낙태죄’), 여성의 부탁이나 동의를 받고 낙태를 하도록 해준 사람은 물론(형법 제269조 제2항, ‘동의낙태죄’), 여성의 부탁이나 동의를 받고 낙태시술을 해준 의사,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약종상도 처벌했다(형법 제270조 제1항, ‘의사낙태죄’). 낙태죄 조항은 여성이 임신중지를 한 경우 그 방법이나 시기에 관계없이 처벌한다고 규정했던 것이다. 여성의 부탁을 받고 임신중지 시술을 해준 의사 등도 공범으로 처벌했다. 특히 의사 등은 의료인이라는 사정을 고려하여 벌금형 없이 징역형만으로 더 무겁게 처벌되었다. 한국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임신중지가 전면 금지되는 국가였던 것이다.
가족계획사업을 위해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은 임신중지를 일부 허용하는 규정을 두었다. 제정 모자보건법 제8조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를 정하고 있었다. 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와 실질적으로 동일하게, 일정한 사유를 갖춘 사람이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서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하고자 하는 경우 의사는 수술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제정 모자보건법 제12조는 ‘형법의 낙태죄 조항에도 불구하고, 모자보건법에 따라 인공임신중절수술을 받은 사람과 행한 사람(의사)은 처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은 현행 모자보건법 제28조로 위치만 바뀐 채 내용은 동일하게 남아 있다.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② 제1항의 경우에 배우자의 사망ㆍ실종ㆍ행방불명, 그 밖에 부득이한 사유로 동의를 받을 수 없으면 본인의 동의만으로 그 수술을 할 수 있다. ③ 제1항의 경우 본인이나 배우자가 심신장애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친권자나 후견인의 동의로, 친권자나 후견인이 없을 때에는 부양의무자의 동의로 각각 그 동의를 갈음할 수 있다. 제28조(「형법」의 적용 배제) 이 법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수술을 받은 자와 수술을 한 자는 「형법」 제269조제1항ㆍ제2항 및 제270조제1항에도 불구하고 처벌하지 아니한다. |
요약하면, 현재의 모자보건법 제14조는 형법 낙태죄 조항에도 불구하고 형사 처벌되지 않는 낙태의 허용 기준을 정한 조항이다. 바꾸어 말하면, 모자보건법 제14조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법 낙태죄 조항을 전제로 하여 존재하는 조항인 것이다. 법적으로는 이를 ‘위법성 조각 사유’라고 한다. 형법이 금지하는 어떤 행위를 했더라도 그 행위가 위법하지는 않아서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 사유를 의미한다(익숙한 예로 ‘정당방위’를 생각하면 된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서도 헌법재판관들은 결정문 서두에 이러한 법체계를 설명한 바 있다. “낙태와 관련하여 우리 법체계는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과 위법성 조각사유를 규정한 모자보건법으로 이원화되어 있다”는 것이다(헌법재판소 2019. 4. 11.자 2017헌바127 결정, 이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2.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의미와 임신중지 비범죄화 경과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269조 제1항과 제270조 제1항의 ‘의사’ 부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다(아래 표 조문 참조). 자기낙태죄 조항과 의사낙태죄 조항의 ‘의사’ 부분이다. 헌법불합치 결정은 위헌 결정의 한 유형으로, 법률 조항의 위헌성을 인정하되 헌법재판소가 정한 기한 내에 입법자가 법을 개정하도록 하는 결정이다. 위헌성을 인정한 것이므로, 입법자가 기한 내에 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그 법률 조항은 효력을 잃는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문에도 이 효력이 명시되어 있다. “입법자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개선입법을 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늦어도 2020. 12. 31.까지는 개선입법을 이행하여야 하고, 그때까지 개선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위 조항들은 2021. 1. 1.부터 효력을 상실한다.”(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형법 제269조(낙태) ①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자도 제1항의 형과 같다. 이하 생략 제270조(의사 등의 낙태, 부동의낙태) ① 의사,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하 생략 |
국회는 헌법재판소가 명시한 기한인 2020년 12월 31일까지 낙태죄 조항을 개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2021년 1월 1일부터 낙태죄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한국은 임신중지가 더 이상 형사 처벌되지 않는(비범죄화)된 국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임신중지 의료접근성을 떨어뜨리는 두 가지 문제되는 주장이 있다. 하나는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조항은 의사낙태죄 조항 중 ‘의사’ 부분에 한정되기 때문에, 의사 외의 의료인이 임신중지시술을 하면 처벌된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조항은 형법 낙태죄 조항들이지 모자보건법이 아니므로, 모자보건법 제14조는 여전히 효력을 가진다”는 주장이다. 둘 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의미와 효과를 오해하였거나, 의도적으로 오해를 유도하는 주장으로서 사실이 아니다.
#3. 주장 ① : ‘의사가 아닌 의료인이 임신중지시술을 하면 처벌된다’?
‘의사가 아닌 의료인이 임신중지시술을 하면 처벌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조항이 의사낙태죄 조항 중 ‘의사’ 부분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는 헌법소원심판 청구인이 의사였으므로, 법률 조항 중에서 해당 사건에 적용되는 문구를 특정하는 실무에 따른 것뿐이다. 만약 청구인이 조산사였다면 결정문에 “형법 제270조 제1항 중 ‘조산사’ 부분”이라고 표시했을 것이다. 즉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의사가 아닌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약종상이 임신중지시술을 하면 처벌해도 된다는 의미에서 ‘의사’ 부분만을 특정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헌법재판소가 자기낙태죄 조항에 대해서도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낙태죄 조항의 출발점은 자기낙태죄 조항이다. 과거의 형법은 여성의 임신중지가 죄라는 것을 전제로, 그 여성의 임신중지를 도와준 사람들을 처벌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기낙태죄 조항이 위헌이라면 의사낙태죄 조항도 당연히 위헌이 되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공범 관계를 법적으로는 ‘대향범’이라고 한다. 헌법재판소도 “업무상동의낙태죄와 자기낙태죄는 대향범이므로, 임신한 여성의 자기낙태를 처벌하는 것이 위헌이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동일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의사를 형사처벌하는 의사낙태죄 조항도 당연히 위헌이 되는 관계에 있다”고 정리했다(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결정문의 대부분도 자기낙태죄 조항의 위헌성 논증에 할애되었다. 헌법불합치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판결문에서 총 18페이지에 걸쳐 헌법불합치 의견을 개진했는데, 의사낙태죄 조항에 대한 내용은 반페이지 분량, 단 두 문단이 전부다. 단순위헌 의견 또한 약 15페이지에 걸친 판단 이유의 대부분을 자기낙태죄의 위헌성에 할애하며, 의사낙태죄 조항 언급은 단 두 줄에 그친다. 합헌의견도 21페이지 중 19페이지를 자기낙태죄 조항의 합헌성을 주장하는 데 할애했다.
따라서 2021년 1월 1일로 자기낙태죄 조항이 효력을 잃은 이상,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주문에 명시된 의사낙태죄 조항의 ‘의사’ 부분뿐만 아니라 자기낙태죄 조항을 전제로 하는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약종상’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로 효력이 없다. 또한 같은 이유로 형법 제269조 제2항도 효력이 없다. 즉 임신중지를 한 여성은 물론, 임신중지시술을 해준 의료인도 처벌할 수 없다.
#4. 주장 ② : ‘모자보건법 제14조에 따른 임신중지만 가능하다’?
‘모자보건법 제14조에 따른 임신중지만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헌법재판소가 판단한 것은 형법 낙태죄 조항이지 모자보건법이 아니므로, 낙태죄 조항이 효력을 잃었더라도 모자보건법은 여전히 효력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현재 여성들이 임신중지의료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범이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모자보건법 제14조는 형법 낙태죄 조항에도 불구하고 처벌하지 않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의 범위를 정한 조항이다(모자보건법 제28조). 즉 형법 낙태죄 조항을 원칙으로 하여, 그 예외를 규정한 것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주문에 모자보건법 제14조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맞다. 그러나 이는 모자보건법 제14조가 합헌이어서가 아니라, 헌법소원심판 청구인에게 모자보건법 제14조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구인에게 모자보건법 제14조가 적용되었다면 의사낙태죄로 기소될 일도 없고(모자보건법 제14조는 위법성 조각 사유이므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조항의 위헌 판단 이유 중 하나로, 모자보건법 제14조에서 허용하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 범위를 고려하더라도 그 범위가 너무도 협소하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낙태죄 조항의 위헌성이 모자보건법 제13조를 통해 해소되는지 여부를 면밀히 검토한 다음, 해소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던 것이다.
이러한 법체계에서, 2021년 1월 1일로 원칙이 되는 낙태죄 조항이 효력을 잃었는데 예외 조항인 모자보건법 제14조가 단독으로 효력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잘못된 주장을 바로잡기는 커녕, 앞장서서 모자보건법 제14조가 마치 효력이 있는 것처럼 공문을 보내거나 지침을 배포하고 있다. 이렇게 모자보건법 제14조를 들어 의료접근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안전한 임신중지를 할 권리라는 기본적 인권과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국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취지에 따라 후속조치로서 모자보건법 제14조를 삭제했다면 이런 주장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통되지 않을 것이다. 국회는 조속한 시일 내에 모자보건법 제14조를 삭제하고, 성재생산권리를 제대로 보장하기 위한 입법을 해야 한다.
사진 :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모자보건법 제14조, 형식만 남았을 뿐 법적 효력 없다
최현정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기획운영위원
2021년 1월 1일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후 5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임신중지 의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낙태죄 조항과 함께 실효된 모자보건법 제14조를 계속 소환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모자보건법 제14조는 형법 낙태죄 조항을 전제로 한 조항으로서, 낙태죄 조항이 실효된 것과 함께 법적인 효력을 잃었다.
#1. 모자보건법 제14조의 법적 의미 : 낙태죄로 처벌받지 않는 한계 설정
형법은 1953년 제정될 때부터 낙태죄 조항을 두고 있었다. 여성이 약물이나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경우 여성을 처벌하고(형법 제269조 제1항, ‘자기낙태죄’), 여성의 부탁이나 동의를 받고 낙태를 하도록 해준 사람은 물론(형법 제269조 제2항, ‘동의낙태죄’), 여성의 부탁이나 동의를 받고 낙태시술을 해준 의사,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약종상도 처벌했다(형법 제270조 제1항, ‘의사낙태죄’). 낙태죄 조항은 여성이 임신중지를 한 경우 그 방법이나 시기에 관계없이 처벌한다고 규정했던 것이다. 여성의 부탁을 받고 임신중지 시술을 해준 의사 등도 공범으로 처벌했다. 특히 의사 등은 의료인이라는 사정을 고려하여 벌금형 없이 징역형만으로 더 무겁게 처벌되었다. 한국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임신중지가 전면 금지되는 국가였던 것이다.
가족계획사업을 위해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은 임신중지를 일부 허용하는 규정을 두었다. 제정 모자보건법 제8조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를 정하고 있었다. 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와 실질적으로 동일하게, 일정한 사유를 갖춘 사람이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서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하고자 하는 경우 의사는 수술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제정 모자보건법 제12조는 ‘형법의 낙태죄 조항에도 불구하고, 모자보건법에 따라 인공임신중절수술을 받은 사람과 행한 사람(의사)은 처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은 현행 모자보건법 제28조로 위치만 바뀐 채 내용은 동일하게 남아 있다.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제28조(「형법」의 적용 배제) 이 법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수술을 받은 자와 수술을 한 자는 「형법」 제269조제1항ㆍ제2항 및 제270조제1항에도 불구하고 처벌하지 아니한다.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② 제1항의 경우에 배우자의 사망ㆍ실종ㆍ행방불명, 그 밖에 부득이한 사유로 동의를 받을 수 없으면 본인의 동의만으로 그 수술을 할 수 있다.
③ 제1항의 경우 본인이나 배우자가 심신장애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친권자나 후견인의 동의로, 친권자나 후견인이 없을 때에는 부양의무자의 동의로 각각 그 동의를 갈음할 수 있다.
요약하면, 현재의 모자보건법 제14조는 형법 낙태죄 조항에도 불구하고 형사 처벌되지 않는 낙태의 허용 기준을 정한 조항이다. 바꾸어 말하면, 모자보건법 제14조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형법 낙태죄 조항을 전제로 하여 존재하는 조항인 것이다. 법적으로는 이를 ‘위법성 조각 사유’라고 한다. 형법이 금지하는 어떤 행위를 했더라도 그 행위가 위법하지는 않아서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 사유를 의미한다(익숙한 예로 ‘정당방위’를 생각하면 된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서도 헌법재판관들은 결정문 서두에 이러한 법체계를 설명한 바 있다. “낙태와 관련하여 우리 법체계는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과 위법성 조각사유를 규정한 모자보건법으로 이원화되어 있다”는 것이다(헌법재판소 2019. 4. 11.자 2017헌바127 결정, 이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2.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의미와 임신중지 비범죄화 경과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 제269조 제1항과 제270조 제1항의 ‘의사’ 부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다(아래 표 조문 참조). 자기낙태죄 조항과 의사낙태죄 조항의 ‘의사’ 부분이다. 헌법불합치 결정은 위헌 결정의 한 유형으로, 법률 조항의 위헌성을 인정하되 헌법재판소가 정한 기한 내에 입법자가 법을 개정하도록 하는 결정이다. 위헌성을 인정한 것이므로, 입법자가 기한 내에 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그 법률 조항은 효력을 잃는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문에도 이 효력이 명시되어 있다. “입법자는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개선입법을 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늦어도 2020. 12. 31.까지는 개선입법을 이행하여야 하고, 그때까지 개선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위 조항들은 2021. 1. 1.부터 효력을 상실한다.”(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형법
제269조(낙태) ①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70조(의사 등의 낙태, 부동의낙태) ① 의사,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하 생략②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자도 제1항의 형과 같다. 이하 생략
국회는 헌법재판소가 명시한 기한인 2020년 12월 31일까지 낙태죄 조항을 개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2021년 1월 1일부터 낙태죄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한국은 임신중지가 더 이상 형사 처벌되지 않는(비범죄화)된 국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임신중지 의료접근성을 떨어뜨리는 두 가지 문제되는 주장이 있다. 하나는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조항은 의사낙태죄 조항 중 ‘의사’ 부분에 한정되기 때문에, 의사 외의 의료인이 임신중지시술을 하면 처벌된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조항은 형법 낙태죄 조항들이지 모자보건법이 아니므로, 모자보건법 제14조는 여전히 효력을 가진다”는 주장이다. 둘 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의미와 효과를 오해하였거나, 의도적으로 오해를 유도하는 주장으로서 사실이 아니다.
#3. 주장 ① : ‘의사가 아닌 의료인이 임신중지시술을 하면 처벌된다’?
‘의사가 아닌 의료인이 임신중지시술을 하면 처벌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한 조항이 의사낙태죄 조항 중 ‘의사’ 부분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는 헌법소원심판 청구인이 의사였으므로, 법률 조항 중에서 해당 사건에 적용되는 문구를 특정하는 실무에 따른 것뿐이다. 만약 청구인이 조산사였다면 결정문에 “형법 제270조 제1항 중 ‘조산사’ 부분”이라고 표시했을 것이다. 즉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의사가 아닌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약종상이 임신중지시술을 하면 처벌해도 된다는 의미에서 ‘의사’ 부분만을 특정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헌법재판소가 자기낙태죄 조항에 대해서도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낙태죄 조항의 출발점은 자기낙태죄 조항이다. 과거의 형법은 여성의 임신중지가 죄라는 것을 전제로, 그 여성의 임신중지를 도와준 사람들을 처벌했던 것이다. 따라서 자기낙태죄 조항이 위헌이라면 의사낙태죄 조항도 당연히 위헌이 되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공범 관계를 법적으로는 ‘대향범’이라고 한다. 헌법재판소도 “업무상동의낙태죄와 자기낙태죄는 대향범이므로, 임신한 여성의 자기낙태를 처벌하는 것이 위헌이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동일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의사를 형사처벌하는 의사낙태죄 조항도 당연히 위헌이 되는 관계에 있다”고 정리했다(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결정문의 대부분도 자기낙태죄 조항의 위헌성 논증에 할애되었다. 헌법불합치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판결문에서 총 18페이지에 걸쳐 헌법불합치 의견을 개진했는데, 의사낙태죄 조항에 대한 내용은 반페이지 분량, 단 두 문단이 전부다. 단순위헌 의견 또한 약 15페이지에 걸친 판단 이유의 대부분을 자기낙태죄의 위헌성에 할애하며, 의사낙태죄 조항 언급은 단 두 줄에 그친다. 합헌의견도 21페이지 중 19페이지를 자기낙태죄 조항의 합헌성을 주장하는 데 할애했다.
따라서 2021년 1월 1일로 자기낙태죄 조항이 효력을 잃은 이상,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주문에 명시된 의사낙태죄 조항의 ‘의사’ 부분뿐만 아니라 자기낙태죄 조항을 전제로 하는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약종상’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로 효력이 없다. 또한 같은 이유로 형법 제269조 제2항도 효력이 없다. 즉 임신중지를 한 여성은 물론, 임신중지시술을 해준 의료인도 처벌할 수 없다.
#4. 주장 ② : ‘모자보건법 제14조에 따른 임신중지만 가능하다’?
‘모자보건법 제14조에 따른 임신중지만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헌법재판소가 판단한 것은 형법 낙태죄 조항이지 모자보건법이 아니므로, 낙태죄 조항이 효력을 잃었더라도 모자보건법은 여전히 효력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현재 여성들이 임신중지의료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범이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모자보건법 제14조는 형법 낙태죄 조항에도 불구하고 처벌하지 않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의 범위를 정한 조항이다(모자보건법 제28조). 즉 형법 낙태죄 조항을 원칙으로 하여, 그 예외를 규정한 것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주문에 모자보건법 제14조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맞다. 그러나 이는 모자보건법 제14조가 합헌이어서가 아니라, 헌법소원심판 청구인에게 모자보건법 제14조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구인에게 모자보건법 제14조가 적용되었다면 의사낙태죄로 기소될 일도 없고(모자보건법 제14조는 위법성 조각 사유이므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조항의 위헌 판단 이유 중 하나로, 모자보건법 제14조에서 허용하는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 범위를 고려하더라도 그 범위가 너무도 협소하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낙태죄 조항의 위헌성이 모자보건법 제13조를 통해 해소되는지 여부를 면밀히 검토한 다음, 해소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던 것이다.
이러한 법체계에서, 2021년 1월 1일로 원칙이 되는 낙태죄 조항이 효력을 잃었는데 예외 조항인 모자보건법 제14조가 단독으로 효력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잘못된 주장을 바로잡기는 커녕, 앞장서서 모자보건법 제14조가 마치 효력이 있는 것처럼 공문을 보내거나 지침을 배포하고 있다. 이렇게 모자보건법 제14조를 들어 의료접근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안전한 임신중지를 할 권리라는 기본적 인권과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국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의 취지에 따라 후속조치로서 모자보건법 제14조를 삭제했다면 이런 주장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통되지 않을 것이다. 국회는 조속한 시일 내에 모자보건법 제14조를 삭제하고, 성재생산권리를 제대로 보장하기 위한 입법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