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2] 우생학적 국가폭력을 청산하고 소수자들의 살만한 삶을 만든다는 것
황지성(기획운영위원)
유예된 정의, 유예된 미래
필자가 강제불임수술진상규명대책위 활동 필요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처음으로 느끼게 된 것은 2019년도 경이다. 당시는 형법 낙태죄 폐지 운동이 한창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였고, 마침내 헌재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이라는 쾌거를 이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일본에서는 우생보호법에 의해 강제불임수술 피해를 당한 당사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은 한국과 유사하게 형법이 낙태를 금지하는 상황에서 <우생보호법>으로 임신중지를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국가다. 다만 <우생보호법>의 예외적 허용 사유가 굉장히 폭넓게 유지되어 오고 있다는 점이 한국과 크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2차 세계 대전 패전, 냉전 지정학, 경제위기 등 다양한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경제성장에 짐이 된다고 여겨지는 집단의 인구재생산을 억제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 일본은 1948년 <우생보호법>의 최초 제정 시점부터 임신중지의 폭넓은 허용뿐 아니라 장애인 등에 대한 강제불임수술을 시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은 반세기 역사 동안 일본 사회에서 여러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적 갈등을 촉발했지만, 종국에 정부는 1996년 <우생보호법>을 폐지함으로써 20세기 역사에 새겨진,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배제의 장치를 스스로 폐기하기로 하였다. 이어 2018년 강제불임수술 피해를 당한 당사자들이 마침내 국가 배상 소송을 시작했다는 것은 반갑기만 한 소식이었다.
이러한 일본 사회의 움직임은 한국의 낙태죄 폐지가 출발점일 뿐 종착점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지난 역사 동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소수자에 대한 낙인, 배제, 폭력은 경제성장 또는 독재청산과 민주화 같은 거대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또는 ‘나중의’ 문제라는 이유로 번번이 묵인되고 비가시화되었다. 이처럼 역사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모자보건법>과 같은 무수히 많은 차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법률과 제도, 문화적 관습 등이 아무 저항 없이 작동할 수 있었다. 그로인해 오늘날에도 새로운 얼굴을 한 소수자들이 구조적으로 양산되고 있다.
소수자에 대한 국가폭력의 역사를 청산해야 하는 이유는 드디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역으로 그것 없이는 미래로 유예시킨 지속 가능한 삶, 더 나은 삶을 한 치 앞도 전망하기 어려운 현실을 지금 여기 우리 모두 목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침묵되어 온 목소리들
1999년 당시 국회의원 김홍신 씨와 함께 40대 남성 버스운전기사 유모 씨가 마이크 앞에 섰다. 그는 한 정신장애인 집단수용시설(정신요양원)에서 수용돼 있었던 1980년대 초반 보건소에 끌려가 강제불임시술을 받았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자신 외에도 100여 명의 여성과 남성 수용자가 수술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반항하는 사람들은 사지를 침대에 묶이거나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후 유모 씨는 정신요양원을 탈출해 버스운전기사로 일하며 폭력의 경험을 잊고 평범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그가 용기 내 과거의 피해를 말하게 된 계기는 1999년 김홍신 의원실이 다수의 집단수용시설에서 자행된 강제불임수술 실태를 조사 발표하여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1999년 김홍신 의원의 장애인 강제불임수술 실태와 대책에 관한 보고서 표지(15대 국회 김홍신 1999년 의정활동 자료집)
박정희 정권이 1973년 비상국무회의를 통해 제정한 <모자보건법>은 정부가 우생학적 사유로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 등에 대한 강제불임수술을 명령할 수 있는 조항(제9조)을 담고 있었다. 또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군부 체제는 일관되게 사회정화를 내세우며 ‘부랑인’, ‘불구자’, ‘걸인’ 등으로 호명되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을 거리에서 쓸어내 각종 수용시설에 감금했으며, 수용시설에서는 강제불임수술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국가의 용인 하에 자행되었다. 가난, 장애, 질병, 가족·집의 부재 등으로 ‘비생산적’이고 ‘열등’하다고 낙인찍힌 인구는 오랜 독재 국가 체제에서의 국가폭력 및 젠더, 장애, 계층이 교차하는 사회 부정의의 산물이었음에도, 오히려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해 수용시설에 감금하고 성과 재생산을 금지하는 것이 사회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인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으로 권위주의 체제가 종식된 이후 과거의 국가폭력과 사회적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지만, 불행히도 사회적 소수자에게 자행된 수용시설 감금과 강제불임수술의 폭력은 문제로조차 인식되지 않았다. 김홍신 의원실이 1999년 최초로 수용시설 내 강제불임수술 피해를 공론화하고 정부의 피해 전수조사와 피해자 보상을 촉구한 바 있지만, 이후 아무런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부와 사회의 이 같은 무관심은 오늘도 많은 소수자들이 폐쇄적인 수용시설 담장 안에서 동일한 피해에 노출되도록 부추겨왔다.
2025년 폭로된, 목포시 노숙인시설(구 부랑아시설) 동명원에서 벌어진 강제피임시술(루프 삽입), 강제 자녀입양 등 사건은 시설수용과 성‧재생산의 부정의가 현재 진행 중인 문제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김애정씨는 1989년 부터 25년간 시설에 수용된 동안 강제노역, 시설장 등의 안마 강요와 이를 빙자한 성폭력, 정신병원 강제입원, 출산 후 강제 입양 조치, 강제피임시술 등의 범죄 행위에 노출되었다고 증언했다. 김애정 씨 외에도 다수의 수용 장애여성이 유사한 피해를 겪었었지만, 시설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아무런 자원이 없어 여전히 시설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명원에서의 강제피임시술 등을 제보한 피해당사자 김애정씨의 인터뷰 기사(한겨레, 2025.8.20.)
더 커다란 얽힘과 연대를 통해 도래할 다른 미래
2019년 낙태죄 폐지 운동은 비/장애 여성운동의 상호 얽힘과 연대를 통해 ‘재생산 정의’라는 보다 근본적인 정치학을 창출해냈기에 가능했다. 비/장애 여성들은 단지 기존의 임신중지 ‘허용’ 사유를 넓혀달라고 요구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애초에 다양한 여성의 몸을 합법과 불법으로 나누어 통제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보았다. 국가의 허용 또는 처벌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거부하고, 모두의 성·재생산 자유와 권리를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보았다. 여성들의 더 크고 담대한 변혁에의 요구는 낙태죄가 사라진 세상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그 역사적 경험과 연대의 힘을 발판삼아 강제불임수술대책위의 활동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1999년 강제불임수술 피해를 제보한 유모씨, 그리고 2025년 강제피임시술과 강제입양 피해 사실을 폭로한 김애정씨는 시간적 간극을 초월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소수자에 대한 부정의가 무관심 속에 잊혀버리는 데 저항하며 우리 사회를 향해 말을 건넨 용기있는 시민이다. 그들의 용기와 저항에 응답하고자 16개 시민단체와 개별 시민들이 모였다. 대책위는 국내외에 피해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한국의 국가폭력과 성·재생산 부정의의 실태를 적극 알리고, 책임있는 주체들의 진정성 있는 응답을 끈질기게 요구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시민사회와 얽히고 연대해 나갈 것이며, 그렇게 다른 미래는 조금씩 도래해 있을 것이다.
지난 3월 6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강제불임수술진상규명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의 모습
[이슈2] 우생학적 국가폭력을 청산하고 소수자들의 살만한 삶을 만든다는 것
황지성(기획운영위원)
유예된 정의, 유예된 미래
필자가 강제불임수술진상규명대책위 활동 필요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처음으로 느끼게 된 것은 2019년도 경이다. 당시는 형법 낙태죄 폐지 운동이 한창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였고, 마침내 헌재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이라는 쾌거를 이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일본에서는 우생보호법에 의해 강제불임수술 피해를 당한 당사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은 한국과 유사하게 형법이 낙태를 금지하는 상황에서 <우생보호법>으로 임신중지를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국가다. 다만 <우생보호법>의 예외적 허용 사유가 굉장히 폭넓게 유지되어 오고 있다는 점이 한국과 크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2차 세계 대전 패전, 냉전 지정학, 경제위기 등 다양한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경제성장에 짐이 된다고 여겨지는 집단의 인구재생산을 억제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 일본은 1948년 <우생보호법>의 최초 제정 시점부터 임신중지의 폭넓은 허용뿐 아니라 장애인 등에 대한 강제불임수술을 시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은 반세기 역사 동안 일본 사회에서 여러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적 갈등을 촉발했지만, 종국에 정부는 1996년 <우생보호법>을 폐지함으로써 20세기 역사에 새겨진,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배제의 장치를 스스로 폐기하기로 하였다. 이어 2018년 강제불임수술 피해를 당한 당사자들이 마침내 국가 배상 소송을 시작했다는 것은 반갑기만 한 소식이었다.
이러한 일본 사회의 움직임은 한국의 낙태죄 폐지가 출발점일 뿐 종착점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지난 역사 동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소수자에 대한 낙인, 배제, 폭력은 경제성장 또는 독재청산과 민주화 같은 거대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또는 ‘나중의’ 문제라는 이유로 번번이 묵인되고 비가시화되었다. 이처럼 역사를 잊어버린 상태에서 <모자보건법>과 같은 무수히 많은 차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법률과 제도, 문화적 관습 등이 아무 저항 없이 작동할 수 있었다. 그로인해 오늘날에도 새로운 얼굴을 한 소수자들이 구조적으로 양산되고 있다.
소수자에 대한 국가폭력의 역사를 청산해야 하는 이유는 드디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달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역으로 그것 없이는 미래로 유예시킨 지속 가능한 삶, 더 나은 삶을 한 치 앞도 전망하기 어려운 현실을 지금 여기 우리 모두 목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침묵되어 온 목소리들
1999년 당시 국회의원 김홍신 씨와 함께 40대 남성 버스운전기사 유모 씨가 마이크 앞에 섰다. 그는 한 정신장애인 집단수용시설(정신요양원)에서 수용돼 있었던 1980년대 초반 보건소에 끌려가 강제불임시술을 받았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자신 외에도 100여 명의 여성과 남성 수용자가 수술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반항하는 사람들은 사지를 침대에 묶이거나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후 유모 씨는 정신요양원을 탈출해 버스운전기사로 일하며 폭력의 경험을 잊고 평범한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그러던 그가 용기 내 과거의 피해를 말하게 된 계기는 1999년 김홍신 의원실이 다수의 집단수용시설에서 자행된 강제불임수술 실태를 조사 발표하여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1999년 김홍신 의원의 장애인 강제불임수술 실태와 대책에 관한 보고서 표지(15대 국회 김홍신 1999년 의정활동 자료집)
박정희 정권이 1973년 비상국무회의를 통해 제정한 <모자보건법>은 정부가 우생학적 사유로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 등에 대한 강제불임수술을 명령할 수 있는 조항(제9조)을 담고 있었다. 또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군부 체제는 일관되게 사회정화를 내세우며 ‘부랑인’, ‘불구자’, ‘걸인’ 등으로 호명되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을 거리에서 쓸어내 각종 수용시설에 감금했으며, 수용시설에서는 강제불임수술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국가의 용인 하에 자행되었다. 가난, 장애, 질병, 가족·집의 부재 등으로 ‘비생산적’이고 ‘열등’하다고 낙인찍힌 인구는 오랜 독재 국가 체제에서의 국가폭력 및 젠더, 장애, 계층이 교차하는 사회 부정의의 산물이었음에도, 오히려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해 수용시설에 감금하고 성과 재생산을 금지하는 것이 사회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인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으로 권위주의 체제가 종식된 이후 과거의 국가폭력과 사회적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지만, 불행히도 사회적 소수자에게 자행된 수용시설 감금과 강제불임수술의 폭력은 문제로조차 인식되지 않았다. 김홍신 의원실이 1999년 최초로 수용시설 내 강제불임수술 피해를 공론화하고 정부의 피해 전수조사와 피해자 보상을 촉구한 바 있지만, 이후 아무런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부와 사회의 이 같은 무관심은 오늘도 많은 소수자들이 폐쇄적인 수용시설 담장 안에서 동일한 피해에 노출되도록 부추겨왔다.
2025년 폭로된, 목포시 노숙인시설(구 부랑아시설) 동명원에서 벌어진 강제피임시술(루프 삽입), 강제 자녀입양 등 사건은 시설수용과 성‧재생산의 부정의가 현재 진행 중인 문제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김애정씨는 1989년 부터 25년간 시설에 수용된 동안 강제노역, 시설장 등의 안마 강요와 이를 빙자한 성폭력, 정신병원 강제입원, 출산 후 강제 입양 조치, 강제피임시술 등의 범죄 행위에 노출되었다고 증언했다. 김애정 씨 외에도 다수의 수용 장애여성이 유사한 피해를 겪었었지만, 시설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아무런 자원이 없어 여전히 시설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명원에서의 강제피임시술 등을 제보한 피해당사자 김애정씨의 인터뷰 기사(한겨레, 2025.8.20.)
더 커다란 얽힘과 연대를 통해 도래할 다른 미래
2019년 낙태죄 폐지 운동은 비/장애 여성운동의 상호 얽힘과 연대를 통해 ‘재생산 정의’라는 보다 근본적인 정치학을 창출해냈기에 가능했다. 비/장애 여성들은 단지 기존의 임신중지 ‘허용’ 사유를 넓혀달라고 요구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애초에 다양한 여성의 몸을 합법과 불법으로 나누어 통제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보았다. 국가의 허용 또는 처벌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거부하고, 모두의 성·재생산 자유와 권리를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보았다. 여성들의 더 크고 담대한 변혁에의 요구는 낙태죄가 사라진 세상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그 역사적 경험과 연대의 힘을 발판삼아 강제불임수술대책위의 활동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1999년 강제불임수술 피해를 제보한 유모씨, 그리고 2025년 강제피임시술과 강제입양 피해 사실을 폭로한 김애정씨는 시간적 간극을 초월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소수자에 대한 부정의가 무관심 속에 잊혀버리는 데 저항하며 우리 사회를 향해 말을 건넨 용기있는 시민이다. 그들의 용기와 저항에 응답하고자 16개 시민단체와 개별 시민들이 모였다. 대책위는 국내외에 피해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한국의 국가폭력과 성·재생산 부정의의 실태를 적극 알리고, 책임있는 주체들의 진정성 있는 응답을 끈질기게 요구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시민사회와 얽히고 연대해 나갈 것이며, 그렇게 다른 미래는 조금씩 도래해 있을 것이다.
지난 3월 6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강제불임수술진상규명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