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주의와 자유주의의 폭력으로서 <미국의 우생학>
나영정(타리) 에브리바디 플레져랩팀장
<미국의 우생학>이라는 제목의 번역서를 받아들고,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우생학 발발 100주년을 맞아 조직된 세계적인 반우생학 네트워크가 움직인지 몇년만에 올해 1월 멕시코시티에 모여서 콜로키움과 워크숍을 열었고, 셰어가 운이 좋게도 참석할 수 있게 되었던 즈음이었다.
특히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는데 한 부를 할애해서 우생학과 퀴어를 둘러싼 복잡한 역사와 모순된 입장, 특히 과오에 대해 면밀하게 짚어낸다. 이것만으로도 기존에 우생학을 다룬 책과의 변별점이 두드러졌고, 우생학 뿐만 아니라 이민 정책, 퀴어·젠더 규범, HIV/AIDS 정책을 비판적으로 다루며 반인종주의, 퀴어 해방, 경제적 정의, 페미니즘, 반국가주의 관점에 기반해 연구한다고 스스로 밝힌 저자가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머지 한 부는 자유주의적 선택이 권리에 기반이 되었을때 어떻게 우생학과 친연성을 맺는지, 그래서 왜 과학적 접근이 불평등을 해결하리라는 협소한 믿음이 불평등을 지속하고 있는지를 철저하게 검증해나간다. 이런 미친 멋진 책이라니! 우선 퀴어 부분부터 보자.

N. 오르도버 지음, [미국의 우생학], 김현지 옮김, 오월의봄, 2026. 표지
“생물학 결정론의 표적이 된 모든 집단 중에서도 퀴어는 주변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전하게 기대를 걸었던 유일한 사람들인 것 같다.”(166쪽) 퀴어들 진짜 왜 그랬을까? 이 질문은 개인적으로도 성소수자 정체성을 가지고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큰 의문이었고 너무나 해명하고 도전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유전학으로 정상성을 입증하고 싶었던 일부- 특히 주류에 속했던 성소수자들의 욕망은 사실 여전히 불가해한 영역이다. 물론 미국의 수정헌법 14조, 타고난 차이를 기반으로 하는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이 만들어지면서 이러한 욕망이 더욱 추동되었다는 사회적인 맥락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의 우생학>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이런 식의 평등의 열망은 정상성에 대한 욕망과 구별되기 어렵다. 또한 더이상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서 생물학 결정론으로 입증할 필요가 점점더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 90년대에 생물학 결정론이 부활했다는 점이 새삼 놀라운 지점이다. 90년대 뇌 연구가 활발해진 맥락, 에이즈 위기로 인해서 남성동성애자의 시신이 대거 연구에 활용된 조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175쪽) 하지만 우생학은 헌법을 바꾸지 않고도 효과적인 힘을 발휘했다. “우생학은 사람 사이에 놓인, 바꿀 수 없는 구분선 및 혈통 경계선의 심판자이자 수호자 노릇을 했다.”(159쪽) 단지 바꿀 수 없는 속성이라고 인정받으면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바꿀 수 없는 잘못된 속성을 가진 이들을 가둘 수용시설이 존재하는 한, 수용시설은 그들을 가둠으로써 사회를 보호한다. 수용시설에 가두어진 이들은 결국 없어질 존재가 된다. 평등한 접근권과 보상과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해도 시설을 폐쇄하지 못한다면, 타고난 차이를 주장하는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왜 시설에 수용되지 않아야 하는지를 입증하도록 요구받을 뿐이다.
일부 성소수자는 왜 ‘게이 유전자’에 집착하나
그래서 ‘게이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마음이 편해질까? 더이상 논쟁은 필요치 않을까? 장애의 의료화 모델이 결국은 권리를 추동하지 않고 진단과 예방, 결국 근절로 갈 수밖에 없다는 장애인권운동가들의 처절한 외침은 들리지 않았나 보다. 주류 성소수자들은 차별받는 다른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보다 전문가들을 향해있었고, 스스로 전문가가 되려고 했던 일부 성소수자들이 한 것의 결과를 보라. “관심의 초점은 권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쩌다 지금의 우리가 됐느냐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런 프로젝트는 분석 대상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안전하다. 그런 프로젝트는 현장에 대해 아무런 변화도 요구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소외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을 근절할 가능성을 약속하기 때문이다.”(177쪽) 그렇다, 스스로 근절하기로 갈 수밖에 없는 참담한 결과.
생물학은 정상성을 보증할 것 같지만 일탈을 병리화하도록 증명하는 역할을 하고, 저자의 지적처럼 처벌 담론과 병합된다. 애초에 ‘원인’이 사회가 아니라 몸(정신과 신체, 마음 모두)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때는 ‘몸’이 아니라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몸에 개입하고, 몸을 격리하고, 몸을 근절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생학이 반이민, 국경통제, 수용과 구금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일부 성소수자가 이러한 우생학 담론을 꽃피우는데 부채질을 했다는 사실이 조금 수치스럽다. (‘조금’인 이유는 내 책임이 아니고, 그들과 동일시하지도 않으며, 같은 부족이라고도 거의 상상한 적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우생학>이 중요한 책인 이유는 소수자가 처한 현실에 기반해있으면서 지금 의미있게 우생학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우생학은 “히드라를 닮은 전략이자 이데올로기다. 촉수 한쪽은 국가주의와 얽혀있고, 또 다른 촉수는 개혁 지향 자유주의를 향해 있으며 그 밖의 촉수들은 노골적인 동성애 혐오, 인종주의, 여성혐오, 백인우월주의를 향해있다.”(284쪽)고 지적한다. 우생학이 우익적, 반동적 국가주의의 산물만이 아니라는 점, 개혁 지향 자유주의를 향해있기 때문에 소수자들 스스로 말려들어가기도 한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가 “과학만으로 불평등과 빈곤을 재빨리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더 크고 더 장기적인 희망의 일부”(284쪽)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약속하는 선택의 권리는 권력의 해체와 재구성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작동해왔고, 과학을 통해서 땜질하듯 개혁하고, 그 혁신의 주도권을 계속 지배권력이 가지는 것을 통해서 질서를 현상유지 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유주의가 인민들에게 약속하는 선택의 자유는 소비할 자유로 한정된다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 지난 100년의 시간이고, 제국주의의 시간이자 우생학의 시간과 정확히 겹친다.
마가렛 생어와 결별하는 재생산 정의
이제 3부로 가자. 저자는 1930년대에서부터 본격화 된, 마가렛 생어로 대표되는 산아제한 정책이 결국 여성을 자유권을 보장하고,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에서 나아가 어떤 해악을 만들었는지 철저하게 평가하지 않는다면 우생학에 대한 도전과 청산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과학적 합리성이, 기술의 발달이, 전문가의 활약이 사회를 개혁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자유주의자들은 계몽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인권을 보장하리라 믿었다. 따라서 교육과 노동을 거부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보호’의 대상이 된다. 시설수용은 파시즘, 식민주의를 가능하게 했지만 민주주의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백인/중산층/이성애자의 정상성이 시민의 모델이 되어왔다는 비판이 규범적/문화적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은 곤란하다. 유색인, 빈곤층, 퀴어들이 어떻게 단종되었고, 미래를 박탈당했고, 생존을 위협받았는지 절절하게 외쳐왔던 그 목소리가 바로 우생학의 역사인 것이다.

마가릿 생어, [마거릿 생어의 여성과 새로운 인류 - 피임할 권리와 여성 해방의 시작 (1920년 초판 완역본)], 김용준 옮김, 동아시아, 2023. 표지
저자는 마가렛 생어와 그의 추종자들이 산아제한을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그 해소의 방식을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문제있는 자들-정신이상, 간질, 범죄성, 성매매, 빈곤, 정신적 결함을 가진 이들(311쪽)-을 태어나지 않게 함으로써 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 사회에 자리 매김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여전히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마가렛 생어를 여성의 선택권을 실현시킨 중대한 업적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에는 종교인과 의료인들조차 우생학과 다를바 없는 산아제한 캠페인에 반발했지만, 마가렛 생어와 추종자들은 이를 뚫고나가며 아이큐와 같은 통계학을 적용하고,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회사와 손잡고 미국 내 소수자들의 몸을 식민화하고, 미국으로부터 식민화된 영향을 받는 국가에 속한 몸을 통해서 임상실험을 해나가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우생학을 바탕으로 한 산아제한과 계급적 지위 같의 이데올로기적 연관성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지적한다. 단종수술이 복지 정책의 장 내부로 배치됐고,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신체적 후유증은 갈수록 유색인 여성 및 소녀들에게 떠안겨졌다는 것이다. 연방정부는 1978년 연방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내에서 단종 수술 목적의 자궁적출술 금지, 메디케이드나 복지와 관련된 암묵적 혹은 명시적 협박 금지, 자기 의지에 반해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에 대한 단종수술 중단을 포함했다. 이는 수천명의 인디언 여성에게 단종수술이 시행됐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나온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은 복지수급 자격을 얻기 위해, 임신중지를 하기 위해, 그저 인디언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종수술을 강요당했다. 여기에 저항한 ‘단종수술남용종식위원회’는 ‘자유선택’이라는 자유주의적 원리를 문제화했다. 단종수술에 강요당하는 이들은 이것에 대한 선택이 생존과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그러한 계급적, 인종적, 민족적인 요소가 불평등을 감내하는 구조 속에서 선택의 자유는 이미 실질적으로 박탈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류페미니스트인 전미여성기구는 즉시 단종수술을 받기 원하는 여성들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비판했다.(379쪽) 저자는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모든 여성에게 적용되는 오직 하나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비판하며, 이는 “사실상 불평등한 대우의 핵심 원인인 구조적 인종주의 및 경제적 협박을 단순히 “이상에서 벗어난 유감스러운 일탈(들)”로 취급하는, 자유주의 담론내에서만 가능한 논리”(381쪽)라고 지적한다.
데포-프로베라는 미국에서 1992년에 FDA에서 승인되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미국에 의해서 70년대부터 널리 사용됐는데 안정성 논란으로 본국에서는 20년 가까이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이 약은 발달지연여성, 약물의존중 여성, 수감중인 여성, 관타나모만의 미 해군기지에 억류된 HIV 양성인 아이티 여성들에게 단종 수술을 대신할 선택지로 강요되었다.(386쪽) 2년먼저 승인된 노플란트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임신중지 권리를 옹호하는 주류도 마가렛 생어가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인종적, 계급적 불평등의 효과에 대해서는 침묵했다고 지적한다. 단종수술의 효과는 이렇게 계속 지속되었다. 특히 노플란트는 팔뚝에 삽입한 흔적을 파악할 수 있어서 “다른 피임법들과 달리 아동학대로 유죄판결을 받은 여성, 에이즈에 걸린 여성, 또는 이미 공공 부조를 받고 있는 여성의 추가 임신을 막지 못해 안달하는 가석방 담당관이나 복지 공무원이 쉽게 감시 감독할 수 있다.”(397쪽) 저자는 단종 수술의 표적이 인종과 계급에서 복지 수급지위와 십대 임신 문제로 이동한 것처럼 보이지만 장애인에 대한 통제는 유구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점 또한 상기시킨다.
심지어 화학적인 요법으로 피임을 하도록 하는 퀴나크린을 둘러싼 역사는 매우 우려스럽다.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기때문에 한번도 승인된적이 없지만 베트남을 비롯한 미국의 영향아래 놓은 제3세계에 광범위하게 사용됐고, 이를 지원한 미국이민개혁 이사회나 플랜드패런트후드 기관은 90년대 반이민 작업에 매진하면서도 북경에서 열린 유엔세계여성회의에 참여한다. 여성을 식민화하고 건강을 해치면서도 여성의 선택권을 옹호하는 양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유주의가 유구한 세월 동안 우생학/인구 조절 정책을 추종하고 추진해왔기 때문이며 보수주의, 그리고 심지어 전면적인 파시즘도 이룰 수 없었던 것을 더 밀고 나갔다.”(430쪽)는 지적은 우생학에 대해 여전히 주목하고 우생학의 유산을 내파해야 할 책임감을 갖게 한다.
“길 밖으로Wayward”와 “도깨비 도로”를 가는 이들을 따라
저자 오르도버가 힘주어 이야기하듯 우생학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오가며 매우 모호한 형태를 띤다. “우생학을 구성하는 언어적, 물질적 요소들은 법률, 공공 정책, 의료 담론의 상호작용에 의존했으며, 계속 의존하고 있다.”(438~439쪽) 우리는 본성 대 양육 대립 패러다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는가? 환경 대 생물학의 이분법을 통해서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타고난 성인 섹스와 구성된 성인 젠더에 대한 ‘여성학적’ 설명을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계속 따져물어야 하는 것은 누가 왜 무엇을 입증하도록 요구받는 가에 대한 것이다. 개혁론자나 자유주의가 우생학에 의존하는 것이 위험한 것은 혐오 선동이 아니라 오히려 권리를 제도화하는 과정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오르도버가 재인용한 케이트 본스타인의 말에 진실이 있다. “지배문화는 하위문화들을 다루기 쉬운 단위들로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다.” “동성애자와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 입법적 판단들은 사람들을 다루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과 전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가능한 한 제멋대로인 존재, 다루기 힘든 존재로 계속 남는 것이다.”(445쪽)
사디야 하트만은 Wayward라는 저서를 통해서 1910년대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한 흑인여성들의 비순응적 삶에 대해 생생하게 그려낸다. 길에서 어슬렁거려도, 집에 남성을 초대하기만 해도 경찰에 단속당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들은 경찰에 대응하고, 가부장을 거부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퀴어한 사랑과 돌봄을 실천했다. 이들 또한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서 오르도버가 찾아냈던 것처럼 강제 피임을 강요받았을 수 있고, 통계적으로는 미혼모 잡혔을 테지만 이들은 노동자였고 퀴어였다. 유전적으로 정체성을 타고나 사회로부터 보호받고자 했던 동성애자들과는 만난 적도 없을 것이다. 임신중지를 위해서 국가의 그 어떤 규제도 필요치 않다는 중산층 페미니즘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한국 사회의 도깨비 도로 목격자들], 2025. 표지
청소년성/노동연대 부라자 활동가 다른은 [한국 사회의 도깨비 도로 목격자들]을 통해서 ‘누구도 되기를 바라지 않고 바람직하다고 여기지 않는’ 성매매에 연루된 십대 청소년 여성의 목소리를 전한다. “가족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탈성매매하면 되잖아, 시설에 가면 되잖아, 지원을, 보호를 받으면 되잖아”라는 말들은 이 말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사회 시스템 안에 발 붙이기 어렵다. 우범소년으로 판명되고, 이들을 수용하는 논리는 과학적인 평가에 기반하고 교화를 목표로 하며, 그것을 전제로 보호와 지원이 제공된다.
우생학과 지금, 진정으로 결별한다는 것은 시설과 교도소 안에서 강제로 불임과 피임시술을 강요받았던 피해자들을 찾아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전히 사람들은 사회가 정한 길과 다른 도깨비 도로에 서있다. 왜 그들이 소수자의 역사에서 재현되지 않았는지, 왜 그들을 이제야 찾아내야 하는지, 그동안 여성, 성소수자와 장애인 인권의 프레임으로 대표성을 갖지 못했던 이유가 그렇게 하길 원하지 않았던 ‘우리’ 때문인지, ‘우리’는 권리를 얻기 위해서 스스로 다루기 쉬운 존재가 되기로 타협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시설 없는 사회를 상상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목표로 권리를 사유하지 않는 것은 우생학에 대해 침묵하고 공모한다는 사실이 처연히 놓여있다.
이 침묵과 공모로부터 떠나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마침 최근에 번역된 [차별하는 데이터]는 기존의 통계학이 데이타 과학으로 이행하면서 상관관계와 동종선호를 강력하게 강화한다고 입증한다. AI가 학습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차별적인 구조를 자연스러운 상관관계로 또다시 자연화하고, 비슷한 데이타에 계속 노출되면서 ‘우리’가 동일하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낙인은 강화되고, 타자는 사라진다. 운동의 근거 또한 통계나 데이터에서 삼는데 이러한 상관관계와 동종선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운동이 누구에게 가까이 갈것인가, 어떤 현장을 기반으로 할 것인가, 무엇과 동일시 할 것인가는 ‘과학적 근거’가 아니라 무엇과 싸울 것인가에 대한 의지와 결단이다.

웬디 희경 전 지음, [차별하는 데이터: 상관관계, 이웃, 새로운 인식의 정치], 김지훈 옮김, 워크룸, 2025. 표지
셰어는 청소년과 이주민, 난민의 임신중지를 지원한다. 하지만 우리 운동의 계보는 우생학을 이유로 낳지 못하게 하는 것에 저항한 흑인, 유색인, 선주민 사람들, 범죄자, 약물사용자, HIV 감염인 여성, 복지 수급자, 시설 수용자, 감옥 수감자가 존엄과 권리를 요구했던 외침과 연결된다. 지금 임신중지를 위해서 조력이 필요한 사람들은 생존의 위협속에서 임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체포되었던 사람들과 비슷한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생학은 삶의 자리를 빼앗기고, 생존을 위한 공공적 인프라에서 제외되고, 성적 낙인과 강하게 결합된 재생산 통제를 당하는 사람들의 몸 위에서 힘을 여전히 발휘한다. 반우생학과 재생산정의를 연결하는 작업은 이들의 몸의 경험과 역사를 우리 운동의 맨 앞으로 가져오게 한다.
식민주의와 자유주의의 폭력으로서 <미국의 우생학>
나영정(타리) 에브리바디 플레져랩팀장
<미국의 우생학>이라는 제목의 번역서를 받아들고,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우생학 발발 100주년을 맞아 조직된 세계적인 반우생학 네트워크가 움직인지 몇년만에 올해 1월 멕시코시티에 모여서 콜로키움과 워크숍을 열었고, 셰어가 운이 좋게도 참석할 수 있게 되었던 즈음이었다.
특히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는데 한 부를 할애해서 우생학과 퀴어를 둘러싼 복잡한 역사와 모순된 입장, 특히 과오에 대해 면밀하게 짚어낸다. 이것만으로도 기존에 우생학을 다룬 책과의 변별점이 두드러졌고, 우생학 뿐만 아니라 이민 정책, 퀴어·젠더 규범, HIV/AIDS 정책을 비판적으로 다루며 반인종주의, 퀴어 해방, 경제적 정의, 페미니즘, 반국가주의 관점에 기반해 연구한다고 스스로 밝힌 저자가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머지 한 부는 자유주의적 선택이 권리에 기반이 되었을때 어떻게 우생학과 친연성을 맺는지, 그래서 왜 과학적 접근이 불평등을 해결하리라는 협소한 믿음이 불평등을 지속하고 있는지를 철저하게 검증해나간다. 이런 미친 멋진 책이라니! 우선 퀴어 부분부터 보자.
N. 오르도버 지음, [미국의 우생학], 김현지 옮김, 오월의봄, 2026. 표지
“생물학 결정론의 표적이 된 모든 집단 중에서도 퀴어는 주변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전하게 기대를 걸었던 유일한 사람들인 것 같다.”(166쪽) 퀴어들 진짜 왜 그랬을까? 이 질문은 개인적으로도 성소수자 정체성을 가지고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가장 큰 의문이었고 너무나 해명하고 도전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유전학으로 정상성을 입증하고 싶었던 일부- 특히 주류에 속했던 성소수자들의 욕망은 사실 여전히 불가해한 영역이다. 물론 미국의 수정헌법 14조, 타고난 차이를 기반으로 하는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이 만들어지면서 이러한 욕망이 더욱 추동되었다는 사회적인 맥락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의 우생학>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이런 식의 평등의 열망은 정상성에 대한 욕망과 구별되기 어렵다. 또한 더이상 권리를 요구하기 위해서 생물학 결정론으로 입증할 필요가 점점더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 90년대에 생물학 결정론이 부활했다는 점이 새삼 놀라운 지점이다. 90년대 뇌 연구가 활발해진 맥락, 에이즈 위기로 인해서 남성동성애자의 시신이 대거 연구에 활용된 조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175쪽) 하지만 우생학은 헌법을 바꾸지 않고도 효과적인 힘을 발휘했다. “우생학은 사람 사이에 놓인, 바꿀 수 없는 구분선 및 혈통 경계선의 심판자이자 수호자 노릇을 했다.”(159쪽) 단지 바꿀 수 없는 속성이라고 인정받으면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바꿀 수 없는 잘못된 속성을 가진 이들을 가둘 수용시설이 존재하는 한, 수용시설은 그들을 가둠으로써 사회를 보호한다. 수용시설에 가두어진 이들은 결국 없어질 존재가 된다. 평등한 접근권과 보상과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해도 시설을 폐쇄하지 못한다면, 타고난 차이를 주장하는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왜 시설에 수용되지 않아야 하는지를 입증하도록 요구받을 뿐이다.
일부 성소수자는 왜 ‘게이 유전자’에 집착하나
그래서 ‘게이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면 어쩔 것인가. 마음이 편해질까? 더이상 논쟁은 필요치 않을까? 장애의 의료화 모델이 결국은 권리를 추동하지 않고 진단과 예방, 결국 근절로 갈 수밖에 없다는 장애인권운동가들의 처절한 외침은 들리지 않았나 보다. 주류 성소수자들은 차별받는 다른 소수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보다 전문가들을 향해있었고, 스스로 전문가가 되려고 했던 일부 성소수자들이 한 것의 결과를 보라. “관심의 초점은 권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쩌다 지금의 우리가 됐느냐에 관한 것이다. 물론, 이런 프로젝트는 분석 대상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안전하다. 그런 프로젝트는 현장에 대해 아무런 변화도 요구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는 소외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을 근절할 가능성을 약속하기 때문이다.”(177쪽) 그렇다, 스스로 근절하기로 갈 수밖에 없는 참담한 결과.
생물학은 정상성을 보증할 것 같지만 일탈을 병리화하도록 증명하는 역할을 하고, 저자의 지적처럼 처벌 담론과 병합된다. 애초에 ‘원인’이 사회가 아니라 몸(정신과 신체, 마음 모두)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때는 ‘몸’이 아니라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몸에 개입하고, 몸을 격리하고, 몸을 근절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생학이 반이민, 국경통제, 수용과 구금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일부 성소수자가 이러한 우생학 담론을 꽃피우는데 부채질을 했다는 사실이 조금 수치스럽다. (‘조금’인 이유는 내 책임이 아니고, 그들과 동일시하지도 않으며, 같은 부족이라고도 거의 상상한 적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우생학>이 중요한 책인 이유는 소수자가 처한 현실에 기반해있으면서 지금 의미있게 우생학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우생학은 “히드라를 닮은 전략이자 이데올로기다. 촉수 한쪽은 국가주의와 얽혀있고, 또 다른 촉수는 개혁 지향 자유주의를 향해 있으며 그 밖의 촉수들은 노골적인 동성애 혐오, 인종주의, 여성혐오, 백인우월주의를 향해있다.”(284쪽)고 지적한다. 우생학이 우익적, 반동적 국가주의의 산물만이 아니라는 점, 개혁 지향 자유주의를 향해있기 때문에 소수자들 스스로 말려들어가기도 한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가 “과학만으로 불평등과 빈곤을 재빨리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더 크고 더 장기적인 희망의 일부”(284쪽)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약속하는 선택의 권리는 권력의 해체와 재구성을 가로막는 방식으로 작동해왔고, 과학을 통해서 땜질하듯 개혁하고, 그 혁신의 주도권을 계속 지배권력이 가지는 것을 통해서 질서를 현상유지 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유주의가 인민들에게 약속하는 선택의 자유는 소비할 자유로 한정된다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 지난 100년의 시간이고, 제국주의의 시간이자 우생학의 시간과 정확히 겹친다.
마가렛 생어와 결별하는 재생산 정의
이제 3부로 가자. 저자는 1930년대에서부터 본격화 된, 마가렛 생어로 대표되는 산아제한 정책이 결국 여성을 자유권을 보장하고,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에서 나아가 어떤 해악을 만들었는지 철저하게 평가하지 않는다면 우생학에 대한 도전과 청산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과학적 합리성이, 기술의 발달이, 전문가의 활약이 사회를 개혁하고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자유주의자들은 계몽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인권을 보장하리라 믿었다. 따라서 교육과 노동을 거부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보호’의 대상이 된다. 시설수용은 파시즘, 식민주의를 가능하게 했지만 민주주의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백인/중산층/이성애자의 정상성이 시민의 모델이 되어왔다는 비판이 규범적/문화적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은 곤란하다. 유색인, 빈곤층, 퀴어들이 어떻게 단종되었고, 미래를 박탈당했고, 생존을 위협받았는지 절절하게 외쳐왔던 그 목소리가 바로 우생학의 역사인 것이다.
마가릿 생어, [마거릿 생어의 여성과 새로운 인류 - 피임할 권리와 여성 해방의 시작 (1920년 초판 완역본)], 김용준 옮김, 동아시아, 2023. 표지
저자는 마가렛 생어와 그의 추종자들이 산아제한을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그 해소의 방식을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문제있는 자들-정신이상, 간질, 범죄성, 성매매, 빈곤, 정신적 결함을 가진 이들(311쪽)-을 태어나지 않게 함으로써 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 사회에 자리 매김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여전히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마가렛 생어를 여성의 선택권을 실현시킨 중대한 업적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에는 종교인과 의료인들조차 우생학과 다를바 없는 산아제한 캠페인에 반발했지만, 마가렛 생어와 추종자들은 이를 뚫고나가며 아이큐와 같은 통계학을 적용하고,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회사와 손잡고 미국 내 소수자들의 몸을 식민화하고, 미국으로부터 식민화된 영향을 받는 국가에 속한 몸을 통해서 임상실험을 해나가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우생학을 바탕으로 한 산아제한과 계급적 지위 같의 이데올로기적 연관성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지적한다. 단종수술이 복지 정책의 장 내부로 배치됐고,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신체적 후유증은 갈수록 유색인 여성 및 소녀들에게 떠안겨졌다는 것이다. 연방정부는 1978년 연방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내에서 단종 수술 목적의 자궁적출술 금지, 메디케이드나 복지와 관련된 암묵적 혹은 명시적 협박 금지, 자기 의지에 반해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에 대한 단종수술 중단을 포함했다. 이는 수천명의 인디언 여성에게 단종수술이 시행됐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나온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은 복지수급 자격을 얻기 위해, 임신중지를 하기 위해, 그저 인디언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종수술을 강요당했다. 여기에 저항한 ‘단종수술남용종식위원회’는 ‘자유선택’이라는 자유주의적 원리를 문제화했다. 단종수술에 강요당하는 이들은 이것에 대한 선택이 생존과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그러한 계급적, 인종적, 민족적인 요소가 불평등을 감내하는 구조 속에서 선택의 자유는 이미 실질적으로 박탈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류페미니스트인 전미여성기구는 즉시 단종수술을 받기 원하는 여성들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비판했다.(379쪽) 저자는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모든 여성에게 적용되는 오직 하나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비판하며, 이는 “사실상 불평등한 대우의 핵심 원인인 구조적 인종주의 및 경제적 협박을 단순히 “이상에서 벗어난 유감스러운 일탈(들)”로 취급하는, 자유주의 담론내에서만 가능한 논리”(381쪽)라고 지적한다.
데포-프로베라는 미국에서 1992년에 FDA에서 승인되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미국에 의해서 70년대부터 널리 사용됐는데 안정성 논란으로 본국에서는 20년 가까이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이 약은 발달지연여성, 약물의존중 여성, 수감중인 여성, 관타나모만의 미 해군기지에 억류된 HIV 양성인 아이티 여성들에게 단종 수술을 대신할 선택지로 강요되었다.(386쪽) 2년먼저 승인된 노플란트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임신중지 권리를 옹호하는 주류도 마가렛 생어가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인종적, 계급적 불평등의 효과에 대해서는 침묵했다고 지적한다. 단종수술의 효과는 이렇게 계속 지속되었다. 특히 노플란트는 팔뚝에 삽입한 흔적을 파악할 수 있어서 “다른 피임법들과 달리 아동학대로 유죄판결을 받은 여성, 에이즈에 걸린 여성, 또는 이미 공공 부조를 받고 있는 여성의 추가 임신을 막지 못해 안달하는 가석방 담당관이나 복지 공무원이 쉽게 감시 감독할 수 있다.”(397쪽) 저자는 단종 수술의 표적이 인종과 계급에서 복지 수급지위와 십대 임신 문제로 이동한 것처럼 보이지만 장애인에 대한 통제는 유구하게 유지되어 왔다는 점 또한 상기시킨다.
심지어 화학적인 요법으로 피임을 하도록 하는 퀴나크린을 둘러싼 역사는 매우 우려스럽다.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기때문에 한번도 승인된적이 없지만 베트남을 비롯한 미국의 영향아래 놓은 제3세계에 광범위하게 사용됐고, 이를 지원한 미국이민개혁 이사회나 플랜드패런트후드 기관은 90년대 반이민 작업에 매진하면서도 북경에서 열린 유엔세계여성회의에 참여한다. 여성을 식민화하고 건강을 해치면서도 여성의 선택권을 옹호하는 양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유주의가 유구한 세월 동안 우생학/인구 조절 정책을 추종하고 추진해왔기 때문이며 보수주의, 그리고 심지어 전면적인 파시즘도 이룰 수 없었던 것을 더 밀고 나갔다.”(430쪽)는 지적은 우생학에 대해 여전히 주목하고 우생학의 유산을 내파해야 할 책임감을 갖게 한다.
“길 밖으로Wayward”와 “도깨비 도로”를 가는 이들을 따라
저자 오르도버가 힘주어 이야기하듯 우생학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를 오가며 매우 모호한 형태를 띤다. “우생학을 구성하는 언어적, 물질적 요소들은 법률, 공공 정책, 의료 담론의 상호작용에 의존했으며, 계속 의존하고 있다.”(438~439쪽) 우리는 본성 대 양육 대립 패러다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는가? 환경 대 생물학의 이분법을 통해서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타고난 성인 섹스와 구성된 성인 젠더에 대한 ‘여성학적’ 설명을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계속 따져물어야 하는 것은 누가 왜 무엇을 입증하도록 요구받는 가에 대한 것이다. 개혁론자나 자유주의가 우생학에 의존하는 것이 위험한 것은 혐오 선동이 아니라 오히려 권리를 제도화하는 과정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오르도버가 재인용한 케이트 본스타인의 말에 진실이 있다. “지배문화는 하위문화들을 다루기 쉬운 단위들로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다.” “동성애자와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 입법적 판단들은 사람들을 다루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과 전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가능한 한 제멋대로인 존재, 다루기 힘든 존재로 계속 남는 것이다.”(445쪽)
사디야 하트만은 Wayward라는 저서를 통해서 1910년대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한 흑인여성들의 비순응적 삶에 대해 생생하게 그려낸다. 길에서 어슬렁거려도, 집에 남성을 초대하기만 해도 경찰에 단속당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들은 경찰에 대응하고, 가부장을 거부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퀴어한 사랑과 돌봄을 실천했다. 이들 또한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서 오르도버가 찾아냈던 것처럼 강제 피임을 강요받았을 수 있고, 통계적으로는 미혼모 잡혔을 테지만 이들은 노동자였고 퀴어였다. 유전적으로 정체성을 타고나 사회로부터 보호받고자 했던 동성애자들과는 만난 적도 없을 것이다. 임신중지를 위해서 국가의 그 어떤 규제도 필요치 않다는 중산층 페미니즘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른, [한국 사회의 도깨비 도로 목격자들], 2025. 표지
청소년성/노동연대 부라자 활동가 다른은 [한국 사회의 도깨비 도로 목격자들]을 통해서 ‘누구도 되기를 바라지 않고 바람직하다고 여기지 않는’ 성매매에 연루된 십대 청소년 여성의 목소리를 전한다. “가족으로 돌아가면 되잖아, 탈성매매하면 되잖아, 시설에 가면 되잖아, 지원을, 보호를 받으면 되잖아”라는 말들은 이 말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사회 시스템 안에 발 붙이기 어렵다. 우범소년으로 판명되고, 이들을 수용하는 논리는 과학적인 평가에 기반하고 교화를 목표로 하며, 그것을 전제로 보호와 지원이 제공된다.
우생학과 지금, 진정으로 결별한다는 것은 시설과 교도소 안에서 강제로 불임과 피임시술을 강요받았던 피해자들을 찾아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전히 사람들은 사회가 정한 길과 다른 도깨비 도로에 서있다. 왜 그들이 소수자의 역사에서 재현되지 않았는지, 왜 그들을 이제야 찾아내야 하는지, 그동안 여성, 성소수자와 장애인 인권의 프레임으로 대표성을 갖지 못했던 이유가 그렇게 하길 원하지 않았던 ‘우리’ 때문인지, ‘우리’는 권리를 얻기 위해서 스스로 다루기 쉬운 존재가 되기로 타협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시설 없는 사회를 상상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목표로 권리를 사유하지 않는 것은 우생학에 대해 침묵하고 공모한다는 사실이 처연히 놓여있다.
이 침묵과 공모로부터 떠나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마침 최근에 번역된 [차별하는 데이터]는 기존의 통계학이 데이타 과학으로 이행하면서 상관관계와 동종선호를 강력하게 강화한다고 입증한다. AI가 학습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차별적인 구조를 자연스러운 상관관계로 또다시 자연화하고, 비슷한 데이타에 계속 노출되면서 ‘우리’가 동일하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낙인은 강화되고, 타자는 사라진다. 운동의 근거 또한 통계나 데이터에서 삼는데 이러한 상관관계와 동종선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운동이 누구에게 가까이 갈것인가, 어떤 현장을 기반으로 할 것인가, 무엇과 동일시 할 것인가는 ‘과학적 근거’가 아니라 무엇과 싸울 것인가에 대한 의지와 결단이다.
웬디 희경 전 지음, [차별하는 데이터: 상관관계, 이웃, 새로운 인식의 정치], 김지훈 옮김, 워크룸, 2025. 표지
셰어는 청소년과 이주민, 난민의 임신중지를 지원한다. 하지만 우리 운동의 계보는 우생학을 이유로 낳지 못하게 하는 것에 저항한 흑인, 유색인, 선주민 사람들, 범죄자, 약물사용자, HIV 감염인 여성, 복지 수급자, 시설 수용자, 감옥 수감자가 존엄과 권리를 요구했던 외침과 연결된다. 지금 임신중지를 위해서 조력이 필요한 사람들은 생존의 위협속에서 임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체포되었던 사람들과 비슷한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생학은 삶의 자리를 빼앗기고, 생존을 위한 공공적 인프라에서 제외되고, 성적 낙인과 강하게 결합된 재생산 통제를 당하는 사람들의 몸 위에서 힘을 여전히 발휘한다. 반우생학과 재생산정의를 연결하는 작업은 이들의 몸의 경험과 역사를 우리 운동의 맨 앞으로 가져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