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기후위기와 재생산의 정치: 미래에 대한 특정한 서사가 선별하는 생명의 위계를 철폐하는 투쟁
이유림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기획운영위원
어른들의 이기심이 자초한 기후 위기. 그 결과는 어린이를 비롯한 미래 세대들이 온전히 짊어진다는 레토릭은 어쩌면 기후 위기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투쟁의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법이다. 어린이라는 존재는 다음 세대에 대한 우려로서 기후 위기를 바라보도록 하는 인식론적 진입로이자, 아동의 모습은 기후 변화에 정치적으로 대처해나가는 과정에서 미래 세대를 환유적으로 대표하며, 동시에 우리가 공유하는 생태적 미래의 정서적, 정치적 상징으로 널리 사용된다.
이 글은 기후위기에 대한 각계의 논의 속에서 다음 세대, 미래, 어린이가 배치되고, 동원되는 구도와 문법을 재생산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환기해보고자 하는 의도로 작성되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다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이 글은 기후 위기의 당사자로서 어린이가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투쟁과 논의속에 적극적으로 관련되고, 함께 한다는 응당함에 깊게 동조한다. 오히려 특정한 ‘미래의 세대'를 그려내는 구도를 벗어남으로서, 기후 위기 이슈에서 미래, 어린이, 다음 세대가 제기하는 도전을 적극적으로 읽어내기를 모색한다. 또한 이 글은 ‘무엇이라도 해야하는’ 기후 위기 대응의 긴급성을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누구의 관점에서 이러한 긴급성이 정의되고, 실천되며, 의제화되는지를 톱아보고자 한다. [ref] 정치학자 채효정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누구의 목소리로 기후 위기를 말할 것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fdw1rFNU_uE 라는 질문으로 요약한 바 있다. 해당 강의에서 채효정은 자본주의 체제의 무분별한 형성과 착취를 탈역사화고 탈정치화하는 방식으로 가후 위기가 논의되는 방식을 비판하고, 기후 위기를 체제의 위기를 직면하는/직면 하고 있는 ‘목소리'들로 논의해야 함을 제언한다. [/ref]
2009년 영국 정부가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운영하는 Act on CO2에서 제작, 방영한 Bedtime Story (잠자리 동화)라는 제목의 캠페인은 기후 위기를 논의하는 문법과 서사 속에 ‘어린이'가 어떻게 배치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이다. [ref] 해당 캠페인은 유튜브를 통해 다시 볼 수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GJe4vKMUQ10 2009년 광고가 방영되었을 당시 해당 광고는 아동들에게 과도한 공포심과 두려움을 자극한다는 비판과 우려를 받았다. . http://news.bbc.co.uk/2/hi/8317998.stm [/ref] 해당 캠페인은 잠을 청하는 어린 딸에게 아버지가 "날씨가 아주, 아주 이상한 땅"에 대한 동화책을 읽어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동화속의 그림들은 애니메이션이 되어, 끔찍한 폭염, 폭풍, 가뭄과 홍수가 일어나는 곳을 그려낸다. 가뭄으로 인해 토끼가 눈물을 흘리고, 홍수가 난 중산층 동네에서 강아지가 물에 빠져 죽고, 하늘에는 검은 송곳니를 가진 탄소 괴물 등장한다. 동화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해 어른들의 일상적인 실천들이 (불끄기를 통해 전기 소비를 줄이는 것으로 묘사됨) "어린 아이들을 위해 땅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속상한 어린이가 이 이야기가 해피 엔딩이냐고 묻자, "이야기의 결말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라는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이미지 설명 아버지와 딸로 보이는 두 사람이 <베드 타임 스토리> 책을 보고 있다.
출처: https://namee.com/personalized-story-books-for-children/bedtime-stories/
이러한 재현은 죄가 있는 어른과 죄가 없는 미래 세대라는 이분법, 기후 위기라는 ‘악'과 순진하고 무해한 아동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전달한다. 하지만 어떠한 아동의 모습이 이러한 대비를 가장 극적으로 만들어내는가? 해당 캠페인의 수사적 전략은 백인 중산층 가정의 조건 내에서 구성된다. 응당 가족과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현재에도 받고 있는, 보호의 대상으로서 백인 아동이 등장하여 무지하고, 순수하며, 동시에 결백한 인간성을 한 축을 담당할 때 이러한 대비적 재현은 극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정한 순수성은 ‘모든 아이’를 통해서 재현되지 않는다. 만약 빈곤으로 인해 탄소 배출량이 높은 공장에서 노동해야 하는 어린이라면, 또는 순수함과 결백을 대표하기 보다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낙인을 감내해야 하는 유색인종의 아동이라면 이러한 극명한 대비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동은 제도적 불의와 고통에 대해 책임이 없기 이전에, 이러한 권력 관계와 연루되어 있고, 그로인한 혜택과 폭력을 각자의 맥락 속에서 경험하며, 순진한 보호의 대상이기 이전에 상호 의존적인 세계를 유지하기위한 관계적, 정서적, 물질적 노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이 구도의 다른 한 축에 있는 어른은 종말론적 재해에 대해 죄가 없는 존재인 아동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아동의 보호자로서 기후 위기 대응 행동을 요청받게 된다. 즉, 기후 위기에 대한 사회적 또는 개인적 책임은 이러한 수사 속에서 수많은 정치적 갈등과 글로벌 불평등이라는 난제를 빠져나가, 사회적 세계를 위축시키며, 잠자리에서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기후 위기에 대한 저항 행동은 무분별한 자본주의 발달에 대한 체제 저항일 수 밖에 없으나, 오히려 순수한 아동과 어른의 죄책감이라는 대비적 수사 속에서 (핵)가족을 중심으로 그 책임 개념을 구성한다. 이는 미래 세대에 대한 특정한 서사의 지배력을 보여준다.
이는 영문학자 리 에델만(Lee Edelman) [ref] Edelman Lee. No Future : Queer Theory and the Death Drive. Duke University Press 2004. [/ref] 이 비판적으로 제시한 재생산적 미래주의(reproductive futurism)라는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재생산적 미래주의는 미래의 시간, 미래의 사회를 현재의 이성애 가족의 연장선이자, 그러한 연장을 통해 확보되어야 하는 것으로 규범화하고, 이러한 규범에 도전하는 모든 것은 (예를 들면, 퀴어) 사회의 미래에 대한 위협으로 바라보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이러한 정치적 수사에서 ‘아이’는 국가와 사회의 유토피아적인 미래를 상징한다. 여성학자 김현미 [ref] 김현미,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내 삶과 세상을 바꾸는 페미니즘, 반비, 2021. [/ref] 는 한국의 저출산 대응, 즉 저출산을 현상이 아닌 이미 ‘위기'로 정의하는 지점에서 정치적 수사로서 재생산적 미래주의를 포착한다. 즉, 재생산적 미래주의는 “항상 미래가 ‘어떠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나서 현재의 형태를 바꾸려 하는 것"으로, 저출산이 ‘위기'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여성이 자신의 재생산 능력을 통해 (미래의) 아이를 낳아야 하며, 그러한 (미래의) 아이는 국가의 경제적 번영을 통해 (미래) 사회를 재생산해야 한다는 특정하고 선명한 정치인 것이다.
기후 위기는 전 지구라는 거대한 규모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자본주의 체제, 산업과 사회의 구조,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총체 속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기후 저항 행동은 과거와 현재를 급진적으로 재사유 하고, 의존과 생존의 관계를 다시 쓰며, 사회적 책임과 집단적인 환경적 상상력을 갱신해나가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이로 대표되는 미래 세대, 그리고 그를 보호하는 책임을 짊어진 어른(또는 부모)이라는 존재의 극적 대비는 단기적이고 전략적인 지점에서 어떠한 효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문법은 환경적 상상력, 대안적 미래, 체제에 대한 저항을 갱신해나가기 보다, 오히려 가족주의(그리고 그에 동반된 전통적인 성역할, 중산층 핵가족의 규범, 인종과 민족에 기반한 특정한 친화성)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수사학이 기후 위기를 미화하는 것을 용인한다. 이성애 가족을 사회 변화의 중심 장소로서 추어올리는 것은 구조화된 불공정을 옹호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미지 설명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피켓
“‘미래세대’를 위한다는 말은 그만! 지금 당장 기후 정의. 언제까지 미래취급? 우리는 지금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라고 쓰여있다.
나아가, 정치적 수사로서 아동과 미래주의의 결합은 이성애 핵가족의 가죽주의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구원자이자 구세주로서 아동을 도구화하는 상상력에 뿌리를 둔다는 점 역시 재고해보아야 한다. 해당 캠페인 영상에서 잠자리에 누워 기후 위기를 그리는 동화를 듣던 아동은, 어른의 보호를 요청하는 존재이지만, 이 문법 속에서 아이라는 상징은 변화의 행동을 촉진하는 희망과 구원의 서사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즉, 정치적 대의와 나침반으로서의 아이는 결백하고 순수한 인간성으로서, 파괴되되지 않은 자연의 목가적 풍경의 연장선에서, 위기에 봉착한 세상을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어른의 등대로 배치된다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 즉, 아동/아이/미래 세대를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디스토피아와 죄책감 속에서 어른이 자신을 재구성 하는 역할을 한다. 아동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가 고유의 순수성과 천진성을 지배적으로 배치하여 인간의 후손을 통한 (인간의) 각성 또는 변화라는 (인간 중심적) 판타지를 그릴 때, 결국 아동의 존재는 순수함의 도구 또는 미덕의 표본으로 도구화된다.
이미지 설명 유니세프에서 2014년 펴낸 기후변화의 과제 : 최전방의 어린이 보고서 표지
홍수가 난 듯한 강에서 흑인 어린이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뗏목을 타고 혼자 노를 젓고 있다.
불평등한 자본주의체제로 야기된 기후 위기는 그 영향 역시도 차별적이다. 유니세프에서 2014년 펴낸 기후변화의 과제: 최전방의 어린이(The Challenges of Climate Change: Children on the front line) 보고서는 어린이가 기후 변화의 최전선에서 그 영향을 경험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취약성의 과거와 현재, 미래는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구조, 즉, 글로벌 규모의 경제 불평등, 필수적 자원의 부족과 빈곤, 취약성을 보호하기 위한 인권적 제도의 부재, 소수의 국가가 다수의 국가의 노동력 및 환경 자원을 수탈하는 제국주의적 구조에서 생산된다. 기후 위기 담론 속에서 아동을 중심으로 한 재현들이 과연 이러한 부정의를 담아내고 있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미래 세대라는 이름으로 선택적으로 천진한 아동의 모습을 희망의 서사 속에 배치하고, 현재의 폭력과 규범을 재생산하며, 또는 기후 위기를 탈맥락화, 탈역사화하여 인도주의적 의제로 포장하는 도구적 역할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희망'이 기후 위기 운동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하기에는, 우리는 학살 당하고 있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겨우 숫자로 밖에 마주하고 있지 않다는 분열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 규모로 벌어지는 불평등한 수탈과 착취의 결과로 지탱되고 있는 나의 위치에서 지구상의 어느곳에서 이미 잇따른 기후 위기와 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아동을, 전쟁으로 삶과 죽음을 오가는 아동을 어떻게 직면하여 논의할 것인지는 기후 위기 운동의 과제이다. 아동의 취약성을 각성과 구원의 상징, 시혜와 보호의 대상이 아닌 체제의 문제로 정교하게 써나가는 것은 현 사회 체제의 근본적 전환으로서 기후 정의의 방향성을 노정하기 때문이다.
[이슈] 기후위기와 재생산의 정치: 미래에 대한 특정한 서사가 선별하는 생명의 위계를 철폐하는 투쟁
이유림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기획운영위원
어른들의 이기심이 자초한 기후 위기. 그 결과는 어린이를 비롯한 미래 세대들이 온전히 짊어진다는 레토릭은 어쩌면 기후 위기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투쟁의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법이다. 어린이라는 존재는 다음 세대에 대한 우려로서 기후 위기를 바라보도록 하는 인식론적 진입로이자, 아동의 모습은 기후 변화에 정치적으로 대처해나가는 과정에서 미래 세대를 환유적으로 대표하며, 동시에 우리가 공유하는 생태적 미래의 정서적, 정치적 상징으로 널리 사용된다.
이 글은 기후위기에 대한 각계의 논의 속에서 다음 세대, 미래, 어린이가 배치되고, 동원되는 구도와 문법을 재생산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환기해보고자 하는 의도로 작성되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다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이 글은 기후 위기의 당사자로서 어린이가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투쟁과 논의속에 적극적으로 관련되고, 함께 한다는 응당함에 깊게 동조한다. 오히려 특정한 ‘미래의 세대'를 그려내는 구도를 벗어남으로서, 기후 위기 이슈에서 미래, 어린이, 다음 세대가 제기하는 도전을 적극적으로 읽어내기를 모색한다. 또한 이 글은 ‘무엇이라도 해야하는’ 기후 위기 대응의 긴급성을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누구의 관점에서 이러한 긴급성이 정의되고, 실천되며, 의제화되는지를 톱아보고자 한다. [ref] 정치학자 채효정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누구의 목소리로 기후 위기를 말할 것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fdw1rFNU_uE 라는 질문으로 요약한 바 있다. 해당 강의에서 채효정은 자본주의 체제의 무분별한 형성과 착취를 탈역사화고 탈정치화하는 방식으로 가후 위기가 논의되는 방식을 비판하고, 기후 위기를 체제의 위기를 직면하는/직면 하고 있는 ‘목소리'들로 논의해야 함을 제언한다. [/ref]
2009년 영국 정부가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운영하는 Act on CO2에서 제작, 방영한 Bedtime Story (잠자리 동화)라는 제목의 캠페인은 기후 위기를 논의하는 문법과 서사 속에 ‘어린이'가 어떻게 배치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이다. [ref] 해당 캠페인은 유튜브를 통해 다시 볼 수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GJe4vKMUQ10 2009년 광고가 방영되었을 당시 해당 광고는 아동들에게 과도한 공포심과 두려움을 자극한다는 비판과 우려를 받았다. . http://news.bbc.co.uk/2/hi/8317998.stm [/ref] 해당 캠페인은 잠을 청하는 어린 딸에게 아버지가 "날씨가 아주, 아주 이상한 땅"에 대한 동화책을 읽어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동화속의 그림들은 애니메이션이 되어, 끔찍한 폭염, 폭풍, 가뭄과 홍수가 일어나는 곳을 그려낸다. 가뭄으로 인해 토끼가 눈물을 흘리고, 홍수가 난 중산층 동네에서 강아지가 물에 빠져 죽고, 하늘에는 검은 송곳니를 가진 탄소 괴물 등장한다. 동화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해 어른들의 일상적인 실천들이 (불끄기를 통해 전기 소비를 줄이는 것으로 묘사됨) "어린 아이들을 위해 땅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속상한 어린이가 이 이야기가 해피 엔딩이냐고 묻자, "이야기의 결말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라는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이미지 설명 아버지와 딸로 보이는 두 사람이 <베드 타임 스토리> 책을 보고 있다.
출처: https://namee.com/personalized-story-books-for-children/bedtime-stories/
이러한 재현은 죄가 있는 어른과 죄가 없는 미래 세대라는 이분법, 기후 위기라는 ‘악'과 순진하고 무해한 아동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전달한다. 하지만 어떠한 아동의 모습이 이러한 대비를 가장 극적으로 만들어내는가? 해당 캠페인의 수사적 전략은 백인 중산층 가정의 조건 내에서 구성된다. 응당 가족과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현재에도 받고 있는, 보호의 대상으로서 백인 아동이 등장하여 무지하고, 순수하며, 동시에 결백한 인간성을 한 축을 담당할 때 이러한 대비적 재현은 극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정한 순수성은 ‘모든 아이’를 통해서 재현되지 않는다. 만약 빈곤으로 인해 탄소 배출량이 높은 공장에서 노동해야 하는 어린이라면, 또는 순수함과 결백을 대표하기 보다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낙인을 감내해야 하는 유색인종의 아동이라면 이러한 극명한 대비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동은 제도적 불의와 고통에 대해 책임이 없기 이전에, 이러한 권력 관계와 연루되어 있고, 그로인한 혜택과 폭력을 각자의 맥락 속에서 경험하며, 순진한 보호의 대상이기 이전에 상호 의존적인 세계를 유지하기위한 관계적, 정서적, 물질적 노동에 참여하고 있다.
또한 이 구도의 다른 한 축에 있는 어른은 종말론적 재해에 대해 죄가 없는 존재인 아동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아동의 보호자로서 기후 위기 대응 행동을 요청받게 된다. 즉, 기후 위기에 대한 사회적 또는 개인적 책임은 이러한 수사 속에서 수많은 정치적 갈등과 글로벌 불평등이라는 난제를 빠져나가, 사회적 세계를 위축시키며, 잠자리에서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기후 위기에 대한 저항 행동은 무분별한 자본주의 발달에 대한 체제 저항일 수 밖에 없으나, 오히려 순수한 아동과 어른의 죄책감이라는 대비적 수사 속에서 (핵)가족을 중심으로 그 책임 개념을 구성한다. 이는 미래 세대에 대한 특정한 서사의 지배력을 보여준다.
이는 영문학자 리 에델만(Lee Edelman) [ref] Edelman Lee. No Future : Queer Theory and the Death Drive. Duke University Press 2004. [/ref] 이 비판적으로 제시한 재생산적 미래주의(reproductive futurism)라는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재생산적 미래주의는 미래의 시간, 미래의 사회를 현재의 이성애 가족의 연장선이자, 그러한 연장을 통해 확보되어야 하는 것으로 규범화하고, 이러한 규범에 도전하는 모든 것은 (예를 들면, 퀴어) 사회의 미래에 대한 위협으로 바라보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이러한 정치적 수사에서 ‘아이’는 국가와 사회의 유토피아적인 미래를 상징한다. 여성학자 김현미 [ref] 김현미,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내 삶과 세상을 바꾸는 페미니즘, 반비, 2021. [/ref] 는 한국의 저출산 대응, 즉 저출산을 현상이 아닌 이미 ‘위기'로 정의하는 지점에서 정치적 수사로서 재생산적 미래주의를 포착한다. 즉, 재생산적 미래주의는 “항상 미래가 ‘어떠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나서 현재의 형태를 바꾸려 하는 것"으로, 저출산이 ‘위기'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여성이 자신의 재생산 능력을 통해 (미래의) 아이를 낳아야 하며, 그러한 (미래의) 아이는 국가의 경제적 번영을 통해 (미래) 사회를 재생산해야 한다는 특정하고 선명한 정치인 것이다.
기후 위기는 전 지구라는 거대한 규모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자본주의 체제, 산업과 사회의 구조, 자연과 인간의 관계의 총체 속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따라서 기후 저항 행동은 과거와 현재를 급진적으로 재사유 하고, 의존과 생존의 관계를 다시 쓰며, 사회적 책임과 집단적인 환경적 상상력을 갱신해나가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이로 대표되는 미래 세대, 그리고 그를 보호하는 책임을 짊어진 어른(또는 부모)이라는 존재의 극적 대비는 단기적이고 전략적인 지점에서 어떠한 효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문법은 환경적 상상력, 대안적 미래, 체제에 대한 저항을 갱신해나가기 보다, 오히려 가족주의(그리고 그에 동반된 전통적인 성역할, 중산층 핵가족의 규범, 인종과 민족에 기반한 특정한 친화성)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수사학이 기후 위기를 미화하는 것을 용인한다. 이성애 가족을 사회 변화의 중심 장소로서 추어올리는 것은 구조화된 불공정을 옹호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미지 설명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피켓
“‘미래세대’를 위한다는 말은 그만! 지금 당장 기후 정의. 언제까지 미래취급? 우리는 지금 여기서 세상을 바꾼다”라고 쓰여있다.
나아가, 정치적 수사로서 아동과 미래주의의 결합은 이성애 핵가족의 가죽주의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구원자이자 구세주로서 아동을 도구화하는 상상력에 뿌리를 둔다는 점 역시 재고해보아야 한다. 해당 캠페인 영상에서 잠자리에 누워 기후 위기를 그리는 동화를 듣던 아동은, 어른의 보호를 요청하는 존재이지만, 이 문법 속에서 아이라는 상징은 변화의 행동을 촉진하는 희망과 구원의 서사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즉, 정치적 대의와 나침반으로서의 아이는 결백하고 순수한 인간성으로서, 파괴되되지 않은 자연의 목가적 풍경의 연장선에서, 위기에 봉착한 세상을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어른의 등대로 배치된다 (어린이는 어른의 거울). 즉, 아동/아이/미래 세대를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디스토피아와 죄책감 속에서 어른이 자신을 재구성 하는 역할을 한다. 아동을 중심으로 하는 서사가 고유의 순수성과 천진성을 지배적으로 배치하여 인간의 후손을 통한 (인간의) 각성 또는 변화라는 (인간 중심적) 판타지를 그릴 때, 결국 아동의 존재는 순수함의 도구 또는 미덕의 표본으로 도구화된다.
이미지 설명 유니세프에서 2014년 펴낸 기후변화의 과제 : 최전방의 어린이 보고서 표지
홍수가 난 듯한 강에서 흑인 어린이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뗏목을 타고 혼자 노를 젓고 있다.
불평등한 자본주의체제로 야기된 기후 위기는 그 영향 역시도 차별적이다. 유니세프에서 2014년 펴낸 기후변화의 과제: 최전방의 어린이(The Challenges of Climate Change: Children on the front line) 보고서는 어린이가 기후 변화의 최전선에서 그 영향을 경험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취약성의 과거와 현재, 미래는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구조, 즉, 글로벌 규모의 경제 불평등, 필수적 자원의 부족과 빈곤, 취약성을 보호하기 위한 인권적 제도의 부재, 소수의 국가가 다수의 국가의 노동력 및 환경 자원을 수탈하는 제국주의적 구조에서 생산된다. 기후 위기 담론 속에서 아동을 중심으로 한 재현들이 과연 이러한 부정의를 담아내고 있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미래 세대라는 이름으로 선택적으로 천진한 아동의 모습을 희망의 서사 속에 배치하고, 현재의 폭력과 규범을 재생산하며, 또는 기후 위기를 탈맥락화, 탈역사화하여 인도주의적 의제로 포장하는 도구적 역할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희망'이 기후 위기 운동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하기에는, 우리는 학살 당하고 있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겨우 숫자로 밖에 마주하고 있지 않다는 분열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 규모로 벌어지는 불평등한 수탈과 착취의 결과로 지탱되고 있는 나의 위치에서 지구상의 어느곳에서 이미 잇따른 기후 위기와 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아동을, 전쟁으로 삶과 죽음을 오가는 아동을 어떻게 직면하여 논의할 것인지는 기후 위기 운동의 과제이다. 아동의 취약성을 각성과 구원의 상징, 시혜와 보호의 대상이 아닌 체제의 문제로 정교하게 써나가는 것은 현 사회 체제의 근본적 전환으로서 기후 정의의 방향성을 노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