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07월[국제이슈] 유산유도제와 PrEP의 공급과 커뮤니티 전략, 이윤과 통제를 넘어 약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기

유산유도제와 PrEP의 공급과 커뮤니티 전략, 이윤과 통제를 넘어 약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기


나영


“약에는 발이 없다. 약은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에게든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2018년에 참석했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 확보를 위한 국제포럼에서 한 발표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SMA(Self-Managed Abortion), 약을 이용해 스스로 진행하는 임신중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스스로’ 한다는 것은 약을 처방받기 위해 반드시 병원을 방문해야 하거나 초음파 검사 등 각종 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을 필요가 없이 직접 약을 구하고 복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의료기관이나 보건의료 전문가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안전한 SMA를 위해서는 복용법과 임신중지 전후에 확인해야 할 건강상태, 부작용, 후유증에 대해 정확한 정보 전달이 이루어져야 하고, 언제든 필요할 때는 가까운 보건의료 기관을 찾아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유산유도제의 공식 도입을 통해 성분과 용량이 확인된 좋은 품질의 유산유도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당연히 전제되는 조건이다. WHO는 2020년 11월에 SMA에 관한 권고 사항을 담아 낸 리플렛[ref] WHO, WHO recommendations on self-care interventions Self-management of medical abortion, 2020.11.[/ref]과 올해 3월 새로 발행한 임신중지 가이드[ref]WHO, Abortion care guideline, 2022.03.https://www.who.int/publications/i/item/9789240039483 [/ref]를 통해 각국에 이와 같은 내용을 권고하고, SMA를 지원하는 시스템 구축이 이루어지도록 법·제도적 제약을 제거하는 한편 성·재생산 건강에 관한 정책을 조정하라고 제안했다. 

이미 지난 몇 년 간 각국은 반드시 병원을 방문하고 의사의 관찰 하에서만 유산유도제를 복용하도록 하는 등의 제한 조치를 폐기하고, 처방이나 공급 주체도 산부인과 전문의에서 점차 일반의와 임상간호사 등으로 폭을 넓히는 등으로 유산유도제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해 왔다. 특히 코로나19 펜데믹 시기를 거치면서는 비대면 진료나 원격 상담, 처방전 발행 후 가이드에 따른 자가 복용과 사후 관리 정보 제공 등을 통해 SMA를 지원하는 다양한 시도가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졌다. 



WHO에서 이러한 방향이 권고되고 있는 이유는 이른 시기에 약을 이용해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임신중지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종 법·제도적, 사회경제적 제약으로 인해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임신중지가 완전히 불법인 국가는 물론, 제한적인 합법화가 이루어진  국가에서도 법적 통제와 의료 인프라 부족, 보건의료 시스템상의 제약, 진료 거부, 임신당사자에 대한 과도한 개입과 통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문제들로 인해 수많은 제약과 장벽이 존재하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여성의 요청만으로 합법적 임신중지가 가능한 시기는 12주-16주 정도로 제한되어 있고, 의무 숙려기간, 사전 상담 의무화, 두 명 이상 의료인의 승인 등 다양한 제약 조건을 두고 있거나, 의료인의 진료 거부권을 용인하여 거주지에서 가까운 병원을 찾는 데에 어려움이 크다. 이런 제약들로 인해 임신 초기에 결정 시기를 놓치게 되면 접근성에 대한 장벽은 더욱 높아지고, 더 많은 비용이 들며, 그만큼 의료기관을 찾기도 어려워져 위험만 커지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낙인이나, 거주지와 병원 간의 거리, 학교와 직장 등에서의 복합적인 상황들도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결국 이런 상황은 대부분 연령, 혼인상태, 국적, 이주지위, 장애, 성별정체성 등으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거나, 파트너/남편/가족 등과의 관계에서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조건에 놓인 이들이 더 많이 겪게 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유산유도제 자체는 이미 안전성이 확인되었고, 특히 10주 이내의 경우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이용하여 높은 성공율[ref]임신 9주 이전에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 95~99%의 성공률로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 미소프로스톨만 단독으로 사용하는 경우의 성공률은 84~96%이다. National Abortion Federation, 2020 Clinical Policy Guidelines for Abortion Care, 2020., Bixby Center for Global Reproductive Health, UCSF(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TEACH(Training in Early Abortion for Comprehensive Healthcare), Early Abortion Training Curriculum, 2020. [/ref]로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접근성을 확대할수록 효과가 높다. 불필요한 제약이 오히려 건강과 생명에 위험을 초래하지 않고 시기를 지연시키지 않도록 법과 정책을 바꾸는 것이 여러 측면에서 꼭 필요한 방향인 것이다. 


법적 통제와 의료권력, 이윤 추구에 도전하는 커뮤니티 전략



사실 스스로 하는 임신중지는 그리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많은 이들이 스스로 약을 구해 임신중지를 하고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말처럼 “약에는 발이 없기 때문”이다. SMA라는 전략의 등장은 법·제도적 통제나 제약이 임신중지를 실제로 막거나 줄일 수 없으며 각국의 정부와 보건의료인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처벌과 제약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는 대신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지를 고민하는 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재생산정의를 위한 운동으로서의 SMA는 좀 더 나아가서, 임신중지에 대한 법적 통제와 의료 권력에 도전하고, 제약회사의 이윤 추구 행위에 맞서 약의 이용자인 개인들과 커뮤니티의 역량을 키워나가기 위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각국의 정부와 보수적인 의료인들, 제약회사가 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약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기 위해 다양한 제약과 장벽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경우 약의 처방 자격을 매우 좁게 제한하거나 약을 복용할 수 있는 장소를 지정하기도 하고, 약의 유통에 관한 조건을 까다롭게 만드는 식으로 제약을 가한다. 한국에서 위민온웹 Women on web 사이트를 차단한 것처럼 오히려 안전하게 약을 구할 수 있는 경로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기도 한다. 보수적인 의료인/의료집단의 경우에는 진료 거부, 필수적이지 않은 검사 요구, 부작용이나 안전성 또는 임상 사례 등에 대한 왜곡된 정보 제공 등으로 위험성을 강조하고 약에 대한 통제권을 쥐려 한다. 제약회사들은 시장의 수익성을 파악해서 도입 시기부터 가격이 높게 책정되도록 만들고, 적절한 이윤이 나지 않을거라 생각하면 공식 진입을 미루거나 시장에서 철수해버리는 방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피해는 온전히 약의 이용자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당연히 차별과 낙인, 경제적 여건 등으로 인해 취약한 여건에 있는 이들일수록 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정부와 의료권력, 제약회사의 이러한 ‘환장의 콜라보’에 맞서려면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가 공식 의료 체계에서 다뤄지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공식 의료체계를 이용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지역사회와 단체, 커뮤니티 차원에서도 정보 제공과 약의 공급이 가능하도록 역량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옹호하는 시민사회 단체나 지역 단체, 가까이에서 서로를 지원할 수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에서 유산유도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숙지하고 최대한 다양한 사람들이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어서 배포하는 한편, 미리 약을 구해두고 있다가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Socorristas en Red[ref] https://socorristasenred.org/ [/ref]같은 단체의 경우 핫라인을 구축하고 정보와 상담, 유산유도제를 직접  제공하며 필요한 경우 임신중지 과정에 동행하거나 의료기관으로 연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보건의료인들은 이러한 커뮤니티 전략을 지원하기 위해 정보 제공과 트레이닝을 함께 하고, 가까운 의료기관과의 연계 체계를 만드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들은 임신중지가 반드시 법이나 의료적 권위의 통제 하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과 낙인을 깨고, 보건의료인과 시민사회가 함께 접근성을 높여 나가면서 임신중지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PrEP의 커뮤니티 공급 전략


유산유도제 뿐만 아니라 약을 이용한 HIV의 노출 전 예방요법을 의미하는 PeEP(Pre-Exposure Prophylaxis) 또한 커뮤니티 전략이 적극적으로 모색되고 있다. 현재 국가에 따라 약의 공급 방식과 처방 받을 수 있는 자격 요건이 다른데, 한국의 경우 PrEP 약물 중에 길리어드의 트루바다만이 독점 공급되고 있으며 'HIV 감염인의 성관계 파트너'임이 확인되는 경우에만 약에 대한 보험 급여 적용을 받을 수 있어 접근성에 제약이 매우 크다. (급여 적용을 하여 처방 받을 경우에는 한 달에 12만원 수준이지만, 비급여로 처방받을 경우의 약값은 한 달에 40만원에 달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점차 처방과 공급 주체를 확대하여 지역사회 클리닉 뿐만 아니라 약국이나 모바일 처방을 통해서도 약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등 접근성을 높여나가고 있다. 태국의 경우에는 접근성에 대한 제약이 매우 낮고 약의 가격도 저렴해서 보다 쉽게 이용할 수 있으며, 캐나다는 주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공공 보험이나 민간 보험, 주 정부의 공적 재정 지원 등을 통해 트루바다를 처방받을 수 있다. 

PrEP의 커뮤니티 전략이 적극적으로 모색되는 이유는 약의 복용을 잘 유지하면 90% 수준까지 HIV 감염의 예방이 가능한데 처방 요건이나 가격 등의 문제 때문에 약을 처방받는 것 자체가 어렵거나, 주기적으로 약을 복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전히 심각한 HIV에 대한 낙인 또한 의료기관을 통한 접근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특히 한국처럼 'HIV 감염인의 성관계 파트너’를 대상으로만 지원을 제한하거나, 특정 ‘고위험군’만을 대상으로 약을 공급하는 경우가 많아 HIV에 대한 편견을 더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여성들과 트랜스젠더의 경우 약의 이용에 상대적으로 제약을 더 크게 받고 있다. 



따라서 PrEP도 유산유도제처럼 커뮤니티를 통한 교육과 공급 전략이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낙인 없이 상담과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동료 그룹이나 지지 그룹과 연계 클리닉, 약국 등을 통해서 PrEP에 관한 정보 제공과 약의 공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유산유도제의 커뮤니티 전략과 마찬가지로 보건의료인들은 커뮤니티와 함께 협력하여 정보와 교육을 제공하고, 적절한 의료적 지원을 연계하거나 이동클리닉 같은 방식으로 접근성을 높여나갈 수 있다. 일례로 현재 캐나다 앨버타 주의 경우 다양한 커뮤니티 기반 조직, 커뮤니티 클리닉 또는 커뮤니티 약국을 통해 PrEP에 관한 정보와 약이 제공되도록 지원하고 있다.[ref] https://www.prepalberta.ca/community-supports [/ref] PrEP의 커뮤니티 전략이 좋은 이유는 다른 의료기관에서 마주하게 될 수 있는 차별과 낙인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내의 소문이나 낙인에 대응하는 데에도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서로를 지원할 수 있는 그룹 안에서 이런 활동이 이루어지고 역량을 키워나감으로써 제약회사의 이윤 추구에 함께 대응할 힘을 구축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시작할 일들


앞서 소개한 유산유도제의 SMA 전략이나 PrEP의 커뮤니티 공급 전략은 아직 한국에서는 적극적으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는 진행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법·제도적 제약을 뚫고 약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되고 이용되어 왔으며 보건당국의 가이드 없이도 관련 정보 또한 꽤 오래 전부터 서로에게 전달되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약의 안전성과 접근성을 동시에 높이기 위해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우선 우리는 약이 공식 의료 체계를 통해 승인되고 안정적으로 공급되며, 보다 폭넓은 보건의료 기관을 통해 제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험 급여의 적용은 필수다. 보건의료인들은 약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낙인 없이 필요한 정보와 의료 지원이 제 때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가이드를 마련하고 정기적인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 보건 당국은 이러한 책임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정기적인 실태조사와 모니터링을 통해 보장 방안을 개선하고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법과 제도, 의료 시스템이 장벽이 되거나, 필요한 사람들에게 닿지 않는 다양한 틈새를 발견하고 파고들어 적극적으로 접근성을 확장해낼 필요가 있다. 임신중지가 비범죄화 되고 추후 유산유도제가 공식 의료 체계를 통해 공급된다고 해도 여러 사회경제적 이유로 의료 기관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계속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커뮤니티 전략을 함께 시도할 수 있는 동료와 지지 그룹을 만들고, 보건의료인들과 함께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 보면 좋을 것이다. 합법과 불법, 공식과 비공식의 경계를 넘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낙인 없이 안전하게 성 건강과 재생산 건강, 성적 즐거움을 향유할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더 많은 상상력과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 




[참고자료]

-WHO, WHO recommendations on self-care interventions Self-management of medical abortion, 2020.11.
https://apps.who.int/iris/handle/10665/332334

-WHO, Abortion care guideline, 2022.03. https://www.who.int/publications/i/item/9789240039483

-National Abortion Federation, 2020 Clinical Policy Guidelines for Abortion Care, 2020.,

-Bixby Center for Global Reproductive Health, UCSF(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TEACH(Training in Early Abortion for Comprehensive Healthcare), Early Abortion Training Curriculum, 2020.

-https://socorristasenred.org/

-Megan K. Donovan, Self-Managed Medication Abortion: Expanding the Available Options for U.S. Abortion Care, Guttmacher Policy Review, October 17, 2018

-Abigail R.A. Aiken, Evdokia P. Romanova, Julia R. Morber, Rebecca Gomperts, Safety and effectiveness of self-managed medication abortion provided using online telemedicine in the United States: A population based study, The Lancet Regional Health - Americas, Volume 10, 2022,

-Etowa, J., Tharao, W., Mbuagbaw, L. et al. Community perspectives on addressing and responding to HIV-testing, pre-exposure prophylaxis (PrEP) and post-exposure prophylaxis (PEP) among African, Caribbean and Black (ACB) people in Ontario, Canada, BMC Public Health 22, 913 (2022)

-Reza-Paul S, Lazarus L, Jana S, Ray P, Mugo N, Ngure K, Folayan MO, Durueke F, Idoko J, Béhanzin L, Alary M, Gueye D, Sarr M, Mukoma W, Kyongo JK, Bothma R, Eakle R, Dallabetta G, Presley J, Lorway R. Community Inclusion in PrEP Demonstration Projects: Lessons for Scaling Up, Gates Open Research, 2019. 3.

-Kennedy CE, Yeh PT, Atkins K, et al. PrEP distribution in pharmacies: a systematic review, BMJ Open 2022

-https://www.prepmap.org/

-https://www.pulse-clinic.com/

-https://www.cbrc.net/

-https://www.prepalberta.ca/community-suppo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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