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11월임신중지, 더 이상 혼자이지 않게 -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가이드북 「곁에, 함께」를 내며

나영

2018년 9월 각국의 낙태죄 폐지 운동 활동가들이 모인 포럼에서 아르헨티나 활동가들이 아주 인상적인 활동 단체를 소개했다. ‘구조자 네트워크 Socorritas en Red’라는 이름의 이 단체는 아르헨티나에 있는 32개 페미니스트 단체들의 네트워크로 2012년부터 아르헨티나 전국의 여성들에게 유산유도제를 이용한 임신중지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 단체의 활동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단지 유산유도제와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만이 아니라 지원을 요청한 여성이 약을 복용한 후 임신중지 과정을 끝낼 때까지 함께 있어주는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임신중지가 매우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임신중지를 할 경우 길게는 15년형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활동가들은 전화나 온라인 상담을 통해 지원이 필요한 여성들을 만나고 있다. 그리고 지원 방향이 정해지면 약물(미소프로스톨)과 필요한 키트를 준비한 후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해 동행해준다. 약을 복용한 후에는 많은 양의 출혈을 하게 되고 구토나 발열, 복통 등의 통증도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이 과정을 함께 지켜보며 몸의 상태도 확인하고 위로와 용기도 전해주는 것이다.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의 장점은 병원에 꼭 머물러 있을 필요 없이 자신에게 가장 편한 곳에서 혼자서도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는 점이지만, 안전하게 안정적으로 그 과정을 경험하는 것과 처벌과 낙인의 위험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혼자 견뎌내야 하는 경험은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처벌이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든 주변의 누군가-특히 불평등하거나 폭력적인 관계에 있는 상대 남성-가 고소를 할 수도 있다는 것, 이를 빌미로 한 폭력이나 학대의 위험도 있을 수 있다는 것, 혼자서 비위생적이거나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서 몰래 임신중지의 과정을 겪어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상황은 임신중지 사실을 누구에게도 상담하거나 말할 수 없기에 되도록 빨리 과정을 끝내고 (심지어 임신중지가 진행되는 과정에도) 다른 일을 하거나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한 돌봄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동행 활동이 ‘구조자들’이라는 이름을 걸고 많은 여성들에게 든든한 동료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임신중지의 시간들을 함께 한다는 것

2020년 12월 31일 이후의 한국 사회는 어떨까.

이제 겨우 한 달 여의 시간을 남겨둔 지금 정부는 끝내 처벌조항을 그대로 유지한 채 주수에 따라, 사유에 따라 허용 수준을 구분하는 조항을 넣은 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모자보건법 개정안에서는 상담과 숙려기간을 의무화했고, 의료인을 찾아가도 거부를 당할 수 있으며, 의료인이 거부하면 다시 상담기관으로 가도록 만들었다. 그 어떤 조항에서도 임신중지를 해야 하는 당사자의 현실에 대한 고려는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생각하는 상담은 단지 ‘허락할만한 임신중지’의 요건을 채우는 것, 그 뿐이다. 결국 임신중지가 필요한 여성들만이 상담기관과 의료기관을 전전하느라 의미 없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또 다른 형태의 처벌이 되어버린다.

물론 정부의 개정안이 그대로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국회에는 정부안 외에도 낙태죄 조항을 삭제한 형법 개정안과 권리 보장의 방향을 담은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권인숙 의원과 이은주 의원의 대표발의로 제출되어 있고, 국민동의청원도 이루어진 상태다. 연내에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현행 낙태죄 조항의 269조 1항과 270조 1항은 그대로 효력을 상실한다. 하지만 법이 어떻게 되든 이제부터 본격적인 준비가 이루어져야 할 곳은 구체적인 현장들이 될 것이다. 처벌이 사라진다 해도 임신중지를 둘러싼 다양한 현실적 조건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많은 여성들은 혼자서 임신중지를 견뎌내 왔다. 임신중지는 누구에게든 일어나는 경험이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제대로 몸을 회복할 여유도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누군가는 학교와 직장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고 누구 앞에서도 아픈 모습을 보일 수 없었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돌봄, 양육, 가사노동을 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 중에는 혼자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주거 환경이 열악한 사람도 있고, 폭력이나 학대 상황에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도 있고, 이주민, 난민도, 성소수자도 있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는 임신중지를 강요당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임신중지를 경험하는 여성들이 백 명이라면 여기에는 수백 개의 중첩된 상황들이 있다는 걸 보아야 한다.

임신중지에 상담이 필요한 부분은 바로 이러한 상황들을 함께 살피고 지원하기 위해, 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이런 상담이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충분히 힘들게 결정했을 마음을 억지로 되돌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누구든 언제라도 가까운 곳에서 상담과 지원을 요청할 수 있고 필요한 자원과 정보를 구할 수 있다면, 이제 더 이상 임신중지는 혼자 고민하고 견뎌내야 하는 시간만은 아니게 될 것이다.

단절되지 않은 경험이 되도록, <곁에, 함께>

셰어는 이런 생각으로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가이드북 <곁에, 함께>를 만들었다. 이 가이드북은 정보제공과 상담에서부터 사후관리까지 임신중지에 관한 포괄적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임신중지 자체만을 위한 의학적 조치를 넘어서, 임신당사자의 권리를 중심에 두고 정보제공, 상담, 역량강화, 피임, 사후관리, 성과 재생산 건강의 전반적인 관리와 지원을 통합적으로 연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이 중요한 이유는 임신중지가 한 사람의 삶에서 단절된 경험이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임신중지는 살아가는 동안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경험이고 삶의 연속된 과정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우리는 임신중지가 그 관계와 역량을 변화시키고 권리를 확장해 나가는 중요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제 임신중지는 ‘위기임신’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나 성과 재생산 권리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한편, 이 가이드북의 제목인 <곁에, 함께>는 임신당사자 뿐 아니라 상담자와 의료인의 ‘곁에’, 든든하게 ‘함께’ 있을 것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지금까지는 임신중지가 불법이었기에 임신중지를 지원하고자 하는 상담자와 의료인들도 각자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정보를 제공하고, 무엇을 지원해야 하며, 어디로 연계해야 할지, 정확한 의료정보와 가이드는 무엇인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부터 그 시작을 함께할 수많은 상담자와 의료인이 이미 현장 곳곳에 있으리라 믿는다. 두려움에 회피하는 대신, 더 많은 경험과 근거들을 쌓아나가며 이 가이드북을 계속해서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나가 주기를 기대한다. 변화는 그렇게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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