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교도소 폐지주의 트랜스-퀴어 운동: 작은 메모
화 퀴어연구활동가
미국은 교도소, 구치소, 소년원, 이민세관집행국 수용소 등 여러 시설을 통틀어 약 이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구금하고 있다. 세계 인구의 5퍼센트가 채 안 되는 나라가 세계 구금 인구의 20퍼센트에 이르는 사람을 가둬 놓았다. 대량 구금은 70년대 본격 시작된 이른바 마약과의 전쟁부터 80년대를 관통하며 “법과 질서”를 수호한다는 기치 아래 강화된 엄벌주의 및 교도소 증설에 이르는 흐름 속에서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중이다. 교도소 정책 이니셔티브(Prison Policy Initiative)가 최근 발간한 통계 보고서 “대량 구금: 2023년의 전체 파이(Mass Incarceration: The Whole Pie 2023)”는 팬데믹 시기 총 수용 인구가 이전보다 다소 줄긴 하였으나, 이는 의도치 않게 지연된 절차 등의 문제이지 정책 차원의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며, 투옥은 실제로 다시 증가세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미국 거주자의 12퍼센트에 불과한 흑인이 구금 인구에서는 38퍼센트를 차지한다.[ref]Prison Policy Initiative, “Mass Incarceration: The Whole Pie 2023.” https://www.prisonpolicy.org/reports/pie2023.html. 2023/3/14. (최근 접속일: 2023/3/17)[/ref]
대량 투옥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가운데 교도소 폐지 운동은 구금 시설의 전면 폐지를 주장한다. 여기서 폐지는 은유나 추상이 아니다. 직설적이고 구체적이고 비타협적인 지향이다. 있는 것을 없애자고 하므로 부재를 추구하는 부정(negative)의 운동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그것은 오해다. 폐지주의는 구금 시설 없는 사회를 상상한다. 격리와 추방과 감금이라는 형벌의 시설 없는 사회를 구상한다. 구금 없는 사회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궁리한다. 그런 사회로 나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색한다. 구금 시설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장치로 인식하는 감각을 탈피해서 폭력과 위해를 경감할 길을 닦자고 제안한다. 그러므로 폐지주의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창안하는 건설적인(positive) 운동이다. 궁극적 폐지를 장기적 목표로 견지하고 폐지의 원칙에 근거해 현안에 대응하며, 갈등과 폭력을 해결해 나가는 공동체의 역량 강화와 자원의 재분배에 몰두한다. 이는 안젤라 데이비스, 루스 윌슨 길모어, 그리고 마리엄 카바 등 폐지주의 담론과 실천의 한가운데서 활약해 온 인물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공히 강조하는 사실이다.[ref]Angela Y. Davis, Are Prisons Obsolete? (Seven Stories Press, 2003); Ruth Wilson Gilmore, Abolition Geography: Essays Towards Liberation (Verso, 2022); Mariame Kaba, We Do This ’Til We Free Us: Abolitionist Organizing and Transforming Justice (Haymarket Books, 2021).[/ref]
폐지주의 트랜스-퀴어 운동은 교도소 폐지를 트랜스-퀴어 해방에 필수 불가결한 기획으로 본다.[ref]Edited by Eric A. Stanley and Nat Smith, Captive Genders: Trans Embodiment and the Prison Industrial Complex, (AK Press, 2011); Eric A. Stanley, Dean Spade, and Queer (In)Justice, “Queering Prison Abolition, Now?” American Quarterly, March 2012, 64.1: 115-127. doi:10.1353/aq.2012.0003. (최근 접속일: 2023/3/17)[/ref] 교도소 폐지 운동을 트랜스-퀴어 해방의 기획으로 보는 것은 밀접히 연관된 두 가지 맥락에서다. 먼저, 트랜스-퀴어는 트랜스-퀴어가 아닌 사람들보다 더 많이 체포되고 더 많이 구금된다.[ref]Prison Policy Initiative, “Visualizing the Unequal Treatment of LGBTQ People in the Criminal Justice System.” https://www.prisonpolicy.org/blog/2021/03/02/lgbtq/. 2021/3/2. (최근 접속일: 2023/3/17)[/ref] 사회적 차별과 낙인과 폭력이 무수한 트랜스-퀴어를 취약한 삶의 조건으로 밀어 넣는다.[ref] Beth Richie, “Queering Antiprison Work: African American Lesbians in the Juvenile Justice System.” Global Lockdown: Race, Gender, and the Prison-Industrial Complex. Edited by Julia Sudbury: 73-85 (Routledge, 2005)[/ref] 이들은 마약 소지와 거래, 성노동, 정당방위로서의 대항 폭력 등 내몰려서 하게 되는 선택들로 인해 범죄자가 된다. 구금 상태서는 독방 감금과 성폭력 등의 위해를 더 많이 경험한다. 시설 바깥에서 이들을 취약하게 한 차별과 낙인과 폭력을 압축적인 형태로 거듭 겪는다. 유색인종 트랜스-퀴어의 경우는 당국의 인종 프로파일링과 젠더-섹슈얼리티 규제가 중첩되는 가운데 경찰과의 접촉부터 구금에 이르기까지 더욱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고 그만큼 가혹하게 취급된다. 그렇다면 체포와 구금의 절차며 집행을 인종차별적이지 않고 트랜스-퀴어 차별적이지 않게 바꾸어 나가면 되는 것 아닌지 물을 수 있다. 시스템 안에 성폭력 방지 대책이나 성소수자 수용자 인권 보장 기준 등의 개혁을 도입하고 제대로 실행하도록 감독하면 되는 것 아닌지 물을 수 있다. 폐지주의자는 그러한 조치 또한 시설 폐지를 궁극적인 목표로 실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안 그러면 대안적 구금의 외피가 되어 구금을 정당화하고 구금의 대안을 마련할 필요성을 소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폐지주의는 대안적 구금, 말하자면 보다 인권 친화적인 구금을 어불성설로 본다. 이것이 바로 교도소 폐지 운동이 트랜스-퀴어 해방의 기획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맥락이다. 구금의 인식론으로서의 교도소는 구금의 인식론으로서의 젠더와 유사할 뿐 아니라 바로 구금의 인식론으로서의 젠더 그 자체기도 하다.[ref]Marquis Bey and Jesse A. Goldberg, “Queer as in Abolition Now!” GLQ, 1 April 2022, 28.2: 159–163. doi: https://doi.org/10.1215/10642684-9608091. (최근 접속일: 2023/3/17)[/ref] 젠더 규범이 교도소를 지탱하고 교도소가 젠더 규범을 강화하는 한 트랜스-퀴어 해방은 교도소 폐지와 떼려야 뗄 수 없다. 폐지 운동은 구금이라는 처벌, 처벌로서의 구금이 없는 다른 시간 다른 장소를 찾아간다. 지금 여기의 자연화되고 정상화된 시설과 그것이 반영하고 재생산하는 규범을 한꺼번에 부수고자 한다. 그야말로 트랜스-퀴어 방법론이다. 체포와 구금의 절차 및 집행을 인종차별적이지 않고 트랜스-퀴어 차별적이지 않게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사회라면 애초에 유색인종 트랜스-퀴어가 유독 더 생존하기 어려운 취약한 상황에 내몰리게 두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적 차별과 낙인과 폭력이 사라져서 유색인종 트랜스-퀴어가 절박한 선택을 하지 않고도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형사사법 당국과 엮일 상황도 사라질 것이다. 구금할 필요가 없어지면 구금 시설이 필요하지 않아지고 구금 시설이 없어지면 구금 대상을 고르지 않아도 되게 된다. 교도소 폐지와 인종주의적 시스헤테로정상성의 폐지는 서로의 기획이고 같은 말이다. 구금의 인식론으로서 교도소는 젠더고 젠더는 교도소라고 할 때, 그것은 은유가 아니다. 교도소 폐지주의자가 말하는 폐지가 은유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교도소 폐지주의는 사회적 소수자를 사회의 위험 요소로 보던 데서 기존 사회를 사회적 소수자에게 위험한 곳으로 보도록 관점의 전환을 도모한다.
폐지주의는 무고하고 억울한 구금만 문제 삼지 않는다. 더 쉽게 구금되고 구금 시 더 가혹하게 취급되는 집단의 구금만을 부당하다 말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폐지주의는 평등한 구금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구금 자체의 철폐를 지향한다. 구금이 없어져야 하는 것은 아무도 국가 폭력에 희생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 처벌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다.
구금 시설의 개혁이나 쇄신이 아닌 폐지를 추구하는 것은 형벌의 방식으로 구금을 활용하는 형사사법(criminal justice)을 부정의(injustice)하다고 보고 저항하는 것이다. 사형과 신체형이 가혹하다고 본 사람들은 물었다. 사람을 벌할 목적으로 죽여도 되는가. 사람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해도 되는가. 현재의 폐지주의자는 자유형이 덜 가혹하다 보지 않는다. 사람을 구금해도 되는가. 사람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감시와 통제의 위계 속에서 생활하며, 존엄과 건강을 박탈당하고 현재와 미래를 빼앗기는 잔혹한 경험을 해도 괜찮은가. 폐지주의는 단호하게 괜찮지 않다고 답한다. 가두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고 위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발성 질문을 마주한다. 살인, 강도, 강간과 같은 강력범죄의 가해자는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이들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위협적이지 않은가. 격리가 필수 아닌가. 폐지주의자는 질문을 바꾼다. 왜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가. 응보로는 폭력의 사이클을 지속하고 강화할 뿐이지 않은가. 어째서 이 사회에 폭력을 늘리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인가. 구금이라는 폭력으로 이들이 자신이 저지른 가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돌아보고 잘못을 절감하고 변화하게 할 수 있는가. 가해자 개인을 가두는 것에 그를 형성한 일련의 사회 문제 해결을 내던지듯 맡겨버려도 되는가. 길모어는 현재 미국의 대량 투옥 문제를 그것이 노예제와 인종분리정책의 최신판본인 것처럼 손쉽게 빗대어 이해하는 것도 곤란하다 본다. 원래 걱정해 줄 필요 없는 존재로 여겨져 온 범죄자를 걱정할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적용해버리는 이해의 틀이 역사적으로 폐지의 의의가 확인된 노예제와 인종분리정책이라는 것이다. 노예 노동의 착취와 구금의 폭력은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노예제나 인종분리정책에 빗대지 않고 현재 시설의 실상만을 그대로 살펴보아도 구금이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ref]Ruth Wilson Gilmore, “Is Prison Necessary? Ruth Wilson Gilmore Might Change Your Mind.” Interview by Rachel Kushner. The New York Times Magazine. 17 April 2019. https://www.nytimes.com/2019/04/17/magazine/prison-abolition-ruth-wilson-gilmore.html. (최근 접속일: 2023/3/17)[/ref]
폐지주의 트랜스-퀴어 운동은 혼인과 군복무의 평등을 추구해 온 중산층 백인 중심 동성애규범적 자유주의 운동 노선을 계급적 탈식민적 반인종차별적 국제연대적 관점에서 비판해 온 입장들과도 궤를 같이한다. 이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의 방지법도 반대해왔다.[ref]Dean Spade, “Their Laws Will Never Make You Safer: An Introduction,” Against Equality: Queer Revolution Not Mere Inclusion. Edited by Ryan Conrad: 165-175. (AK Press, 2014)[/ref] 트랜스-퀴어의 존재 양식과 삶의 수단을 범죄화해 온 당국의 손에 더 많은 행위를 범죄화하고 처벌할 권리를 쥐여주는 것이 트랜스-퀴어를 보호해 주리라 기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매튜 셰퍼드-제임스 버드 주니어 혐오범죄 방지법(2009)은 기존의 혐오범죄방지법을 확장해서 성별,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장애 등을 이유로 한 범죄도 혐오범죄로 다룰 수 있도록 하였는데, 당시 국방 예산에 얹혀서 통과되었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이는 전쟁에 쓰일 비용이 포함된 예산이었다. 성소수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의 감시와 처벌력을 강화하고 전쟁 수행 비용을 마련하는 형국이었다. 폐지주의 트랜스-퀴어 운동은 억압받아 온 트랜스-퀴어의 이름을 내세워 폭력을 재생산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가해와 폭력을 오로지 파렴치한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방식의 해결 아닌 해결을 경계하자고 당부한다. 보호와 존중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며 질서에 포섭되기보다 질서의 폭력을 폭로하고 질서 바깥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나가자고 제안한다. 보호받을 자격을 호소하는 태도는 결국 보호받을 자격 없는 존재와의 구분 짓기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이는 트랜스-퀴어 해방의 지향일 수 없다. 부도덕하고 병리적인 범죄자가 아님을 입증하는 방향으로 법적 평등을 쟁취하려는 운동은 소수자에 대한 병리화와 범죄화의 구조를 유지하고 커뮤니티의 쇠약화에 기여한다.
폐지주의가 형사사법(criminal justice)에 대항해 추구하는 것은 변화의 정의(transformative justice)다. 개인이 진공 상태에서 법을 위반하여 범죄자가 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어떤 행위가 사회의 지배적 규범과 작동 원리에 따라 범죄로 규정되는 거라면 범죄와 가해와 피해의 문제에 사회구조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피해자의 회복과 가해자의 재학습 그리고 가해자를 만들어낸 환경의 변화를 공동체가 같이 고민하고 이루어나가야 한다. 누구도 구금으로 고립시키지 않고 누구도 버리지 않고 공동체 안으로 재통합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폐지주의에 헌신해 온 사람들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이러한 변화의 정의적 원칙을 배워서 실천할 수 있도록 차곡차곡 툴킷을 마련해 왔다.[ref]Mia Mingus, “Transformative Justice: A Brief Description.” (2019/1/9) https://leavingevidence.wordpress.com/2019/01/09/transformative-justice-a-brief-description/; SOIL: A Transformative Justice Project. https://www.soiltjp.org/home; Interrupting Criminalization, Project Nia & Critical Resistance, “So Is This Actually and Abolitionist Proposal or Strategy?: A Collection of Resources to Aid in Evaluation and Reflection.” (2022) https://criticalresistance.org/resources/actually-an-abolitionist-strategy-binder/ (링크 모두 최근 접속일: 2023/3/19)[/ref] 구금된 사람과 출소한 사람을 조력하는 방법, 교도소 확장 또는 신설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는 방법, 공동체 안에서 가해자는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고 피해자는 회복해 나가도록 지원하는 방법, 경찰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계 속에서 갈등 상황을 풀어나가는 방법, 경찰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 등, 체계적인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쳐 일구어 온 집단 지성과 실천의 결과들이다.
폭이 넓고 유서가 깊은 운동을 간략히 소개하려니 미처 담지 못한 내용이 많다. 시설 폐쇄와 탈시설에 대한 문제의식을 고유하게 벼려온 한국 사회 운동 영역들과 교차하는 고민의 지점에서 작게나마 참고가 되면 좋겠다. 가능한지도 몰랐고 바라는지도 몰랐던 새로운 해방의 지평을 향해서 겁내지 않고 조금씩 같이 나아가고 싶다.
미국의 교도소 폐지주의 트랜스-퀴어 운동: 작은 메모
화 퀴어연구활동가
미국은 교도소, 구치소, 소년원, 이민세관집행국 수용소 등 여러 시설을 통틀어 약 이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구금하고 있다. 세계 인구의 5퍼센트가 채 안 되는 나라가 세계 구금 인구의 20퍼센트에 이르는 사람을 가둬 놓았다. 대량 구금은 70년대 본격 시작된 이른바 마약과의 전쟁부터 80년대를 관통하며 “법과 질서”를 수호한다는 기치 아래 강화된 엄벌주의 및 교도소 증설에 이르는 흐름 속에서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중이다. 교도소 정책 이니셔티브(Prison Policy Initiative)가 최근 발간한 통계 보고서 “대량 구금: 2023년의 전체 파이(Mass Incarceration: The Whole Pie 2023)”는 팬데믹 시기 총 수용 인구가 이전보다 다소 줄긴 하였으나, 이는 의도치 않게 지연된 절차 등의 문제이지 정책 차원의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며, 투옥은 실제로 다시 증가세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미국 거주자의 12퍼센트에 불과한 흑인이 구금 인구에서는 38퍼센트를 차지한다.[ref]Prison Policy Initiative, “Mass Incarceration: The Whole Pie 2023.” https://www.prisonpolicy.org/reports/pie2023.html. 2023/3/14. (최근 접속일: 2023/3/17)[/ref]
대량 투옥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가운데 교도소 폐지 운동은 구금 시설의 전면 폐지를 주장한다. 여기서 폐지는 은유나 추상이 아니다. 직설적이고 구체적이고 비타협적인 지향이다. 있는 것을 없애자고 하므로 부재를 추구하는 부정(negative)의 운동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그것은 오해다. 폐지주의는 구금 시설 없는 사회를 상상한다. 격리와 추방과 감금이라는 형벌의 시설 없는 사회를 구상한다. 구금 없는 사회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궁리한다. 그런 사회로 나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색한다. 구금 시설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장치로 인식하는 감각을 탈피해서 폭력과 위해를 경감할 길을 닦자고 제안한다. 그러므로 폐지주의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창안하는 건설적인(positive) 운동이다. 궁극적 폐지를 장기적 목표로 견지하고 폐지의 원칙에 근거해 현안에 대응하며, 갈등과 폭력을 해결해 나가는 공동체의 역량 강화와 자원의 재분배에 몰두한다. 이는 안젤라 데이비스, 루스 윌슨 길모어, 그리고 마리엄 카바 등 폐지주의 담론과 실천의 한가운데서 활약해 온 인물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공히 강조하는 사실이다.[ref]Angela Y. Davis, Are Prisons Obsolete? (Seven Stories Press, 2003); Ruth Wilson Gilmore, Abolition Geography: Essays Towards Liberation (Verso, 2022); Mariame Kaba, We Do This ’Til We Free Us: Abolitionist Organizing and Transforming Justice (Haymarket Books, 2021).[/ref]
폐지주의 트랜스-퀴어 운동은 교도소 폐지를 트랜스-퀴어 해방에 필수 불가결한 기획으로 본다.[ref]Edited by Eric A. Stanley and Nat Smith, Captive Genders: Trans Embodiment and the Prison Industrial Complex, (AK Press, 2011); Eric A. Stanley, Dean Spade, and Queer (In)Justice, “Queering Prison Abolition, Now?” American Quarterly, March 2012, 64.1: 115-127. doi:10.1353/aq.2012.0003. (최근 접속일: 2023/3/17)[/ref] 교도소 폐지 운동을 트랜스-퀴어 해방의 기획으로 보는 것은 밀접히 연관된 두 가지 맥락에서다. 먼저, 트랜스-퀴어는 트랜스-퀴어가 아닌 사람들보다 더 많이 체포되고 더 많이 구금된다.[ref]Prison Policy Initiative, “Visualizing the Unequal Treatment of LGBTQ People in the Criminal Justice System.” https://www.prisonpolicy.org/blog/2021/03/02/lgbtq/. 2021/3/2. (최근 접속일: 2023/3/17)[/ref] 사회적 차별과 낙인과 폭력이 무수한 트랜스-퀴어를 취약한 삶의 조건으로 밀어 넣는다.[ref] Beth Richie, “Queering Antiprison Work: African American Lesbians in the Juvenile Justice System.” Global Lockdown: Race, Gender, and the Prison-Industrial Complex. Edited by Julia Sudbury: 73-85 (Routledge, 2005)[/ref] 이들은 마약 소지와 거래, 성노동, 정당방위로서의 대항 폭력 등 내몰려서 하게 되는 선택들로 인해 범죄자가 된다. 구금 상태서는 독방 감금과 성폭력 등의 위해를 더 많이 경험한다. 시설 바깥에서 이들을 취약하게 한 차별과 낙인과 폭력을 압축적인 형태로 거듭 겪는다. 유색인종 트랜스-퀴어의 경우는 당국의 인종 프로파일링과 젠더-섹슈얼리티 규제가 중첩되는 가운데 경찰과의 접촉부터 구금에 이르기까지 더욱 위험한 존재로 여겨지고 그만큼 가혹하게 취급된다. 그렇다면 체포와 구금의 절차며 집행을 인종차별적이지 않고 트랜스-퀴어 차별적이지 않게 바꾸어 나가면 되는 것 아닌지 물을 수 있다. 시스템 안에 성폭력 방지 대책이나 성소수자 수용자 인권 보장 기준 등의 개혁을 도입하고 제대로 실행하도록 감독하면 되는 것 아닌지 물을 수 있다. 폐지주의자는 그러한 조치 또한 시설 폐지를 궁극적인 목표로 실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안 그러면 대안적 구금의 외피가 되어 구금을 정당화하고 구금의 대안을 마련할 필요성을 소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폐지주의는 대안적 구금, 말하자면 보다 인권 친화적인 구금을 어불성설로 본다. 이것이 바로 교도소 폐지 운동이 트랜스-퀴어 해방의 기획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맥락이다. 구금의 인식론으로서의 교도소는 구금의 인식론으로서의 젠더와 유사할 뿐 아니라 바로 구금의 인식론으로서의 젠더 그 자체기도 하다.[ref]Marquis Bey and Jesse A. Goldberg, “Queer as in Abolition Now!” GLQ, 1 April 2022, 28.2: 159–163. doi: https://doi.org/10.1215/10642684-9608091. (최근 접속일: 2023/3/17)[/ref] 젠더 규범이 교도소를 지탱하고 교도소가 젠더 규범을 강화하는 한 트랜스-퀴어 해방은 교도소 폐지와 떼려야 뗄 수 없다. 폐지 운동은 구금이라는 처벌, 처벌로서의 구금이 없는 다른 시간 다른 장소를 찾아간다. 지금 여기의 자연화되고 정상화된 시설과 그것이 반영하고 재생산하는 규범을 한꺼번에 부수고자 한다. 그야말로 트랜스-퀴어 방법론이다. 체포와 구금의 절차 및 집행을 인종차별적이지 않고 트랜스-퀴어 차별적이지 않게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사회라면 애초에 유색인종 트랜스-퀴어가 유독 더 생존하기 어려운 취약한 상황에 내몰리게 두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적 차별과 낙인과 폭력이 사라져서 유색인종 트랜스-퀴어가 절박한 선택을 하지 않고도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형사사법 당국과 엮일 상황도 사라질 것이다. 구금할 필요가 없어지면 구금 시설이 필요하지 않아지고 구금 시설이 없어지면 구금 대상을 고르지 않아도 되게 된다. 교도소 폐지와 인종주의적 시스헤테로정상성의 폐지는 서로의 기획이고 같은 말이다. 구금의 인식론으로서 교도소는 젠더고 젠더는 교도소라고 할 때, 그것은 은유가 아니다. 교도소 폐지주의자가 말하는 폐지가 은유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교도소 폐지주의는 사회적 소수자를 사회의 위험 요소로 보던 데서 기존 사회를 사회적 소수자에게 위험한 곳으로 보도록 관점의 전환을 도모한다.
폐지주의는 무고하고 억울한 구금만 문제 삼지 않는다. 더 쉽게 구금되고 구금 시 더 가혹하게 취급되는 집단의 구금만을 부당하다 말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폐지주의는 평등한 구금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구금 자체의 철폐를 지향한다. 구금이 없어져야 하는 것은 아무도 국가 폭력에 희생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 처벌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다.
구금 시설의 개혁이나 쇄신이 아닌 폐지를 추구하는 것은 형벌의 방식으로 구금을 활용하는 형사사법(criminal justice)을 부정의(injustice)하다고 보고 저항하는 것이다. 사형과 신체형이 가혹하다고 본 사람들은 물었다. 사람을 벌할 목적으로 죽여도 되는가. 사람에게 육체적 고통을 가해도 되는가. 현재의 폐지주의자는 자유형이 덜 가혹하다 보지 않는다. 사람을 구금해도 되는가. 사람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감시와 통제의 위계 속에서 생활하며, 존엄과 건강을 박탈당하고 현재와 미래를 빼앗기는 잔혹한 경험을 해도 괜찮은가. 폐지주의는 단호하게 괜찮지 않다고 답한다. 가두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고 위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반발성 질문을 마주한다. 살인, 강도, 강간과 같은 강력범죄의 가해자는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이들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위협적이지 않은가. 격리가 필수 아닌가. 폐지주의자는 질문을 바꾼다. 왜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가. 응보로는 폭력의 사이클을 지속하고 강화할 뿐이지 않은가. 어째서 이 사회에 폭력을 늘리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인가. 구금이라는 폭력으로 이들이 자신이 저지른 가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돌아보고 잘못을 절감하고 변화하게 할 수 있는가. 가해자 개인을 가두는 것에 그를 형성한 일련의 사회 문제 해결을 내던지듯 맡겨버려도 되는가. 길모어는 현재 미국의 대량 투옥 문제를 그것이 노예제와 인종분리정책의 최신판본인 것처럼 손쉽게 빗대어 이해하는 것도 곤란하다 본다. 원래 걱정해 줄 필요 없는 존재로 여겨져 온 범죄자를 걱정할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적용해버리는 이해의 틀이 역사적으로 폐지의 의의가 확인된 노예제와 인종분리정책이라는 것이다. 노예 노동의 착취와 구금의 폭력은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노예제나 인종분리정책에 빗대지 않고 현재 시설의 실상만을 그대로 살펴보아도 구금이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충분히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ref]Ruth Wilson Gilmore, “Is Prison Necessary? Ruth Wilson Gilmore Might Change Your Mind.” Interview by Rachel Kushner. The New York Times Magazine. 17 April 2019. https://www.nytimes.com/2019/04/17/magazine/prison-abolition-ruth-wilson-gilmore.html. (최근 접속일: 2023/3/17)[/ref]
폐지주의 트랜스-퀴어 운동은 혼인과 군복무의 평등을 추구해 온 중산층 백인 중심 동성애규범적 자유주의 운동 노선을 계급적 탈식민적 반인종차별적 국제연대적 관점에서 비판해 온 입장들과도 궤를 같이한다. 이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의 방지법도 반대해왔다.[ref]Dean Spade, “Their Laws Will Never Make You Safer: An Introduction,” Against Equality: Queer Revolution Not Mere Inclusion. Edited by Ryan Conrad: 165-175. (AK Press, 2014)[/ref] 트랜스-퀴어의 존재 양식과 삶의 수단을 범죄화해 온 당국의 손에 더 많은 행위를 범죄화하고 처벌할 권리를 쥐여주는 것이 트랜스-퀴어를 보호해 주리라 기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매튜 셰퍼드-제임스 버드 주니어 혐오범죄 방지법(2009)은 기존의 혐오범죄방지법을 확장해서 성별,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장애 등을 이유로 한 범죄도 혐오범죄로 다룰 수 있도록 하였는데, 당시 국방 예산에 얹혀서 통과되었다.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이는 전쟁에 쓰일 비용이 포함된 예산이었다. 성소수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의 감시와 처벌력을 강화하고 전쟁 수행 비용을 마련하는 형국이었다. 폐지주의 트랜스-퀴어 운동은 억압받아 온 트랜스-퀴어의 이름을 내세워 폭력을 재생산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가해와 폭력을 오로지 파렴치한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방식의 해결 아닌 해결을 경계하자고 당부한다. 보호와 존중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하며 질서에 포섭되기보다 질서의 폭력을 폭로하고 질서 바깥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나가자고 제안한다. 보호받을 자격을 호소하는 태도는 결국 보호받을 자격 없는 존재와의 구분 짓기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이는 트랜스-퀴어 해방의 지향일 수 없다. 부도덕하고 병리적인 범죄자가 아님을 입증하는 방향으로 법적 평등을 쟁취하려는 운동은 소수자에 대한 병리화와 범죄화의 구조를 유지하고 커뮤니티의 쇠약화에 기여한다.
폐지주의가 형사사법(criminal justice)에 대항해 추구하는 것은 변화의 정의(transformative justice)다. 개인이 진공 상태에서 법을 위반하여 범죄자가 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어떤 행위가 사회의 지배적 규범과 작동 원리에 따라 범죄로 규정되는 거라면 범죄와 가해와 피해의 문제에 사회구조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피해자의 회복과 가해자의 재학습 그리고 가해자를 만들어낸 환경의 변화를 공동체가 같이 고민하고 이루어나가야 한다. 누구도 구금으로 고립시키지 않고 누구도 버리지 않고 공동체 안으로 재통합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폐지주의에 헌신해 온 사람들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이러한 변화의 정의적 원칙을 배워서 실천할 수 있도록 차곡차곡 툴킷을 마련해 왔다.[ref]Mia Mingus, “Transformative Justice: A Brief Description.” (2019/1/9) https://leavingevidence.wordpress.com/2019/01/09/transformative-justice-a-brief-description/; SOIL: A Transformative Justice Project. https://www.soiltjp.org/home; Interrupting Criminalization, Project Nia & Critical Resistance, “So Is This Actually and Abolitionist Proposal or Strategy?: A Collection of Resources to Aid in Evaluation and Reflection.” (2022) https://criticalresistance.org/resources/actually-an-abolitionist-strategy-binder/ (링크 모두 최근 접속일: 2023/3/19)[/ref] 구금된 사람과 출소한 사람을 조력하는 방법, 교도소 확장 또는 신설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는 방법, 공동체 안에서 가해자는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하고 피해자는 회복해 나가도록 지원하는 방법, 경찰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계 속에서 갈등 상황을 풀어나가는 방법, 경찰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 등, 체계적인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쳐 일구어 온 집단 지성과 실천의 결과들이다.
폭이 넓고 유서가 깊은 운동을 간략히 소개하려니 미처 담지 못한 내용이 많다. 시설 폐쇄와 탈시설에 대한 문제의식을 고유하게 벼려온 한국 사회 운동 영역들과 교차하는 고민의 지점에서 작게나마 참고가 되면 좋겠다. 가능한지도 몰랐고 바라는지도 몰랐던 새로운 해방의 지평을 향해서 겁내지 않고 조금씩 같이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