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을 마지막으로 ‘낙태죄’는 효력을 다한다.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임신중지에 관한 새로운 입법은 없었다. 이른바 ‘입법공백’ 상태다. 이 시간을 입법공백이라 명명하는 것은 임신중지에 관한 새로운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해온 이들은 ‘낙태죄’의 폐지를 넘어 재생산권을 보장하는 방향의 대체 입법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전의 ‘낙태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임신중지 규제 법안을 내놓았다. 그마저도 2020년의 절반을 한참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그럼에도 '낙태죄'의 완전한 폐지와 전면적인 임신중지 권리보장을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낙태죄' 전면폐지라는 성과를 안고 2020년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이것은 '낙태죄' 폐지 운동의 분명한 승리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에 권리보장을 위한 대체법안은 아직까지 공백상태이다. 따라서 2021년은 재생산권 보장을 둘러싼 각축의 시간이 될 것이다. ‘낙태죄’ 유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임신중지를 규제하는 방향으로 힘을 쓰겠지만, 실질적이고 평등한 성적 권리, 그리고 재생산 권리를 요구하는 우리는 임신중지에 대한 각종 장벽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이 시간을 끌고 갈 것이다. 이제 ‘낙태죄’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끈질기게 해체해보자.
재생산권을 말하는 2021년으로
‘낙태죄’의 폐지는 ‘낙태죄’ 폐지 운동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낙태죄’ 폐지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임신중지의 경험이 대체로 불행으로 수렴되는 사회적 조건을 개선하려 했고, 궁극적으로는 재생산에 관련된 전반적인 권리가 보장되는 토대를 구축하고자 애썼다. ‘낙태죄’ 폐지 운동 과정에서 길어 올려진 수많은 사람의 말들은 우리를 ‘낙태죄’ 폐지보다 더 나아가게 했다. 다양한 정체성들이 임신중지라는 행위와 교차하며 빚어낸 통찰은 재생산권 보장의 요구가 임신중지 비범죄화에 그치지 않도록 했다. 재생산권이 임신중지를 선택할 권리로 치환되지 않도록, 그리하여 ‘내 몸은 내 선택(my body, my choice)’의 구호가 ‘네 몸은 네 책임’으로 함몰되지 않도록 재생산권 보장의 구체적 언어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어떤 권리이든, 권리는 완성형일 수 없으며 완전히 달성되었다고 선언할 수도 없다. 보다 나은 삶을 상상하면서 끝없이 권리의 언어를 만들고 권리의 구체적 형태를 빚어갈 뿐이다. ‘낙태죄’가 사라진 후 우리에게 권리의 언어가 더욱 중요한 까닭은 이제껏 ‘낙태죄’라는 죄목 앞에서 펼쳐보지 못했던 성적 권리, 그리고 재생산 권리에 대한 구체적 형태를 그려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임신중지의 비범죄화는 우리의 큰 성과임에 분명하지만, 임신중지의 비범죄화가 곧바로 임신중지에 대한 모든 장벽을 해소해주진 못한다. 여전히 병원에 가기 힘든 사람, 임신중지에 따른 죄책감에 짓눌리는 사람, 나이나 장애 여부 등에 따라 임신중지에 있어 차별받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장벽을 하나씩 무너뜨리는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대부분의 임신중지가 그동안 법으로 금지되면서 임신중지에 대한 부정적 규범도 강화되어 왔기에 우리는 사회적 규범 또한 적극적으로 해체해야 한다. 규범은 법보다 오래 살아남고 임신중지의 감정경제는 법의 규제가 필요 없을 만큼 스스로의 행동을 규제한다.[1] 그동안 ‘낙태죄’는 실효성이 없다고 자주 지적되었다. 임신중지 행위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낙태죄’ 및 모자보건법 등의 법적 체계는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부정적 규범을 강화해왔다. ‘낙태죄’가 사라진다고 해서 임신중지 행위에 대한 낙인과 규범도 함께 사라지진 않는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또 다른 상상력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2021년부터 ‘낙태죄’의 효력이 사라지기에 임신중지는 더이상 죄가 아니다. 이 시점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해 온 서로를 향해 축하와 환호를 보내자. 그리고 다음 장으로 함께 넘어가자. 안전하게 임신중지할 권리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요구하자. ‘입법공백’의 시간은 임신중지의 권리를 위한 법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 시간인 동시에 ‘낙태죄’라는 굴레를 벗어난다면 우리의 몸은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지, 나와 다른 몸들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지, 재생산의 의미는 어떻게 갱신될 수 있을지를 마음껏 상상해 보는 시간이다. 우리는 이제 임신중지의 새로운 서사를 써나갈, 무척 설레는 자리에 도착했다.
셰어의 <성·재생산권리 보장 기본법>(안)의 제5조는 “모든 사람은 성적 권리와 재생산 권리를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그리고 ‘평등하게’라는 짧은 단어를 쟁취하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법과 제도, 규범을 새로이 해야 한다. 무엇이 실질적인 것인지, 무엇이 평등한 보장인지에 대한 말을 지금껏 쌓아왔다면 이제는 우리가 쌓아온 말들을 구체적인 현장에서 하나씩 실현해 나가자.
끝으로 한국의 ‘낙태죄’ 폐지 운동의 성과는 ‘낙태죄’의 폐지를 위해 지구 곳곳에서 애쓰고 있는 동료들에게로 날아가 힘을 더해줄 것이라 믿는다. ‘낙태죄’의 폐지를 위해 애써온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앞으로 함께 더 멀리 나아갈 모든 사람에게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1] 에리카 밀러(2019), <<임신중지: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이민경 역, 아르테, p.251.
김보영
2020년을 마지막으로 ‘낙태죄’는 효력을 다한다.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임신중지에 관한 새로운 입법은 없었다. 이른바 ‘입법공백’ 상태다. 이 시간을 입법공백이라 명명하는 것은 임신중지에 관한 새로운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낙태죄’ 폐지를 주장해온 이들은 ‘낙태죄’의 폐지를 넘어 재생산권을 보장하는 방향의 대체 입법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전의 ‘낙태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임신중지 규제 법안을 내놓았다. 그마저도 2020년의 절반을 한참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그럼에도 '낙태죄'의 완전한 폐지와 전면적인 임신중지 권리보장을 요구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낙태죄' 전면폐지라는 성과를 안고 2020년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이것은 '낙태죄' 폐지 운동의 분명한 승리다.
하지만 정부와 국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에 권리보장을 위한 대체법안은 아직까지 공백상태이다. 따라서 2021년은 재생산권 보장을 둘러싼 각축의 시간이 될 것이다. ‘낙태죄’ 유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임신중지를 규제하는 방향으로 힘을 쓰겠지만, 실질적이고 평등한 성적 권리, 그리고 재생산 권리를 요구하는 우리는 임신중지에 대한 각종 장벽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이 시간을 끌고 갈 것이다. 이제 ‘낙태죄’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끈질기게 해체해보자.
재생산권을 말하는 2021년으로
‘낙태죄’의 폐지는 ‘낙태죄’ 폐지 운동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낙태죄’ 폐지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임신중지의 경험이 대체로 불행으로 수렴되는 사회적 조건을 개선하려 했고, 궁극적으로는 재생산에 관련된 전반적인 권리가 보장되는 토대를 구축하고자 애썼다. ‘낙태죄’ 폐지 운동 과정에서 길어 올려진 수많은 사람의 말들은 우리를 ‘낙태죄’ 폐지보다 더 나아가게 했다. 다양한 정체성들이 임신중지라는 행위와 교차하며 빚어낸 통찰은 재생산권 보장의 요구가 임신중지 비범죄화에 그치지 않도록 했다. 재생산권이 임신중지를 선택할 권리로 치환되지 않도록, 그리하여 ‘내 몸은 내 선택(my body, my choice)’의 구호가 ‘네 몸은 네 책임’으로 함몰되지 않도록 재생산권 보장의 구체적 언어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어떤 권리이든, 권리는 완성형일 수 없으며 완전히 달성되었다고 선언할 수도 없다. 보다 나은 삶을 상상하면서 끝없이 권리의 언어를 만들고 권리의 구체적 형태를 빚어갈 뿐이다. ‘낙태죄’가 사라진 후 우리에게 권리의 언어가 더욱 중요한 까닭은 이제껏 ‘낙태죄’라는 죄목 앞에서 펼쳐보지 못했던 성적 권리, 그리고 재생산 권리에 대한 구체적 형태를 그려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임신중지의 비범죄화는 우리의 큰 성과임에 분명하지만, 임신중지의 비범죄화가 곧바로 임신중지에 대한 모든 장벽을 해소해주진 못한다. 여전히 병원에 가기 힘든 사람, 임신중지에 따른 죄책감에 짓눌리는 사람, 나이나 장애 여부 등에 따라 임신중지에 있어 차별받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장벽을 하나씩 무너뜨리는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대부분의 임신중지가 그동안 법으로 금지되면서 임신중지에 대한 부정적 규범도 강화되어 왔기에 우리는 사회적 규범 또한 적극적으로 해체해야 한다. 규범은 법보다 오래 살아남고 임신중지의 감정경제는 법의 규제가 필요 없을 만큼 스스로의 행동을 규제한다.[1] 그동안 ‘낙태죄’는 실효성이 없다고 자주 지적되었다. 임신중지 행위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더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낙태죄’ 및 모자보건법 등의 법적 체계는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부정적 규범을 강화해왔다. ‘낙태죄’가 사라진다고 해서 임신중지 행위에 대한 낙인과 규범도 함께 사라지진 않는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또 다른 상상력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2021년부터 ‘낙태죄’의 효력이 사라지기에 임신중지는 더이상 죄가 아니다. 이 시점에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해 온 서로를 향해 축하와 환호를 보내자. 그리고 다음 장으로 함께 넘어가자. 안전하게 임신중지할 권리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요구하자. ‘입법공백’의 시간은 임신중지의 권리를 위한 법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 시간인 동시에 ‘낙태죄’라는 굴레를 벗어난다면 우리의 몸은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지, 나와 다른 몸들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지, 재생산의 의미는 어떻게 갱신될 수 있을지를 마음껏 상상해 보는 시간이다. 우리는 이제 임신중지의 새로운 서사를 써나갈, 무척 설레는 자리에 도착했다.
셰어의 <성·재생산권리 보장 기본법>(안)의 제5조는 “모든 사람은 성적 권리와 재생산 권리를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그리고 ‘평등하게’라는 짧은 단어를 쟁취하기 위해서 무수히 많은 법과 제도, 규범을 새로이 해야 한다. 무엇이 실질적인 것인지, 무엇이 평등한 보장인지에 대한 말을 지금껏 쌓아왔다면 이제는 우리가 쌓아온 말들을 구체적인 현장에서 하나씩 실현해 나가자.
끝으로 한국의 ‘낙태죄’ 폐지 운동의 성과는 ‘낙태죄’의 폐지를 위해 지구 곳곳에서 애쓰고 있는 동료들에게로 날아가 힘을 더해줄 것이라 믿는다. ‘낙태죄’의 폐지를 위해 애써온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앞으로 함께 더 멀리 나아갈 모든 사람에게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1] 에리카 밀러(2019), <<임신중지: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이민경 역, 아르테, p.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