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05월[국내이슈] 이동권은 재생산 정의다

이동권은 재생산 정의다


나영정


“장애인도 이동하고, 교육받고, 일하면서 함께 살고 싶습니다.”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타기로 뜨거운 봄을 보내고 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 탈시설지원법제정 등에 대한 약속 이행을 촉구하며 29일간 진행된 시위는 5월에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한편 전장연이라는 단체, 개별적인 활동가, 비마이너 언론사에 대한 혐오선동과 스토킹, 사이버테러가 점점 강해지고 있어서 매우 우려스럽다. 이 뜨거운 시간은 한국사회에 무엇을 남길까. 


장애인의 이동권이 가진 의미의 보편성은 장애인 운동의 투쟁을 통해 이미 ‘교통약자’라는 개념으로 확장되고 법적인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교통약자’는 2006년 제정된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제2조 제1호를 통해서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 어린이 등 일상생활에서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누군가는 질병이나 상해로 인해서 한시적으로 이동의 불편을 느끼기도 하고, 무거운 짐을 옮길 때에도 특별한 수단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동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은 상황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사회적인 토론이 활성화되자, 장애인운동이 이동권을 위해서 대표로 싸운 덕분에 나머지 교통약자들이 혜택을 입고 있다면서 엘리베이터 100% 설치 등과 같은 요구들이 장애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새삼스럽게 환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일반 시민들의 발목을 잡느냐, 왜 하필 출근길을 지연시키느냐, 시위로 인해 발생한 선량한 시민들의 손해를 어떻게 보상할 것이냐”는 논리의 반대의견은 매우 강고하다. 


이 시위는 지하철이라는 공간, 출근시간이라는 시간의 교차 속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노출시켰다. 하지만 셰어가 이동권 시위에 참여하고, 사회적인 논의가 진행되는 것을 살펴보면서 이동할 권리와 공공성에 대한 더 많은 확장된 이야기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장애인 이동권 안에 각자가 어떻게 이미 포함되고 연루되어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면서도, 운동과 운동간의 긴밀한 관계를 생산하면서 어떻게 이동권을 사회정의의 차원으로 가져오는가에 대해서 다양한 운동이 스스로 찾아나갈 필요를 느꼈다. 지금 일어나는 이 진동과 진통을 어떻게 공공성을 확장하고 접근성을 급진화하는 기획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결국 셰어가 하고자 하는 재생산 정의 운동과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연대하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2022년 3월 28일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 장면 ©전장연



이동하고 관계맺기: 공공성과 접근성


우리는 이동하고 관계맺는다. 이 두 가지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며, 필요충분조건이다. 또한 두가지 모두 수단과 방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저 자연히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의식적인 행위이고, 비용이 발생하며, 자본이 개입된다. 자유시장경제체제에서 누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가, 어떤 이동을 위해서 자원을 동원하고, 인프라를 구축할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누가 이동을 통해서 이익을 창출하거나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동 목적이 정당한가, 편의 제공이 마땅한가의 판단은 경제성장이라는 지향에 종속된다.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공공성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재원의 투자 필요성으로 교묘히 왜곡되어 왔다. 


65세 이상의 고령자에게 지하철 무료탑승을 제공하는 논리는 공공성이지만, 지금의 공공성은 역사 이름을 기업에 판매하고, 스크린 도어에 광고판을 설치하는 것으로 메워지고 있다.  고령자들은 단지 은퇴자가 아니라 여가를 위해서 소비하는 자이고, 새로운 불안정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노동자로서 재구성되어, 투자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 되었다(계속해서 수익을 내지 못하면 투자 철회도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고령자의 이동은 ‘좋은 것’, ‘사회에 이익이 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교통 약자로 묶이는 개인과 집단에 대해서도, 이들에게 기대되는 이윤 창출 혹은 소비 창출에 대한 정도는 명확히 다르다. 이것이 교통약자들 간의 연대를 해체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모양짓는 지배적인 관계 방식인 것이다. 장애인에게 출근시간 지하철 탑승을 불온시하는 태도는 장애인이 출근하는 ‘일반시민’과 달리 생산성이 없는 몸이라는 구별 속에서 가능해진다. 방희경과 류지현은 ‘서울 지하철 모빌리티와 여성경험’, [모빌리티와 생활세계의 생산](앨피, 2019)이라는 글을 통해서 서울 지하철이 근대화.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노동력을 수송하기 위해 국가의 기획으로 등장했고,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공조하는 면모를 보였다고 주장한다. 특히 “9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 경제가 서비스산업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여성들이 임금노동시장에 대량으로 유입되었을때 지하철 여성 이용객 숫자가 급속하게 증가했는데, 이런 사실은 여성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새롭게 위치 지어지는데 지하철이라는 결정적인 인프라가 자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198)고 하였다. 여성의 지하철 이용율이 높아지자 지하철내 성희롱 문제 또한 부각되었고, 이에 대한 공적인 대처도 시작되었으며, 여성전용칸의 도입까지 진행되었던 것이다. 여성전용칸 도입은 그 정책의 지향과 효과성의 문제가 있는 것과 별개로 여성승객이 지하철을 탑승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준다. 


지하철은 대표적인 공공 교통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현재의 공공성은 평등성과 분리되어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 복무하는 정도로 축소되거나 왜곡되고 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율 92%면 충분하다’는 논리는 대중들에게 이 정도면 대략의 편의를 제공한다고 만족하는 논리에 그칠 수밖에 없다. 사회 운동은 대중교통과 공공교통을 구분하고, 공공성의 의미를 비차별성, 모두의 접근가능성, 시장논리와 독립적인 것으로 확보하려고 애쓴다. 이런 점에서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은 이윤의 위계에 따라 차별과 배제로 이루어진 사회관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지향을 담고 있다. 따라서 출근길이라는 시간과 지하철이라는 장소는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시공간이 되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누구나 임금노동을 하지 않아도 이동해야 할 이유가 마땅하다고 존중받고, 화폐를 매개로 하지 않는 동료관계, 우정과 사랑을 생산하는 관계를 맺도록 이동하는 것을 가능하는 힘이다. 



재생산 정의는 모두의 이동과 관계를 추동한다. 


이동권 투쟁이 드러내는 공공성의 의미, 이동과 관계의 상호의존성을 새삼느끼면서 재생산 정의 운동의 지평을 다시 가늠하게 된다. 정상성의 규범으로 자연화된 ‘생식’을 노동과 의지가 개입되고 정치적인 투쟁의 지평으로 확장시킨 재생산의 개념은 그렇기 때문에 사회정의에 관한 지향과 실현을 논의하는 장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 


김보영은 '재생산은 권리이지 '인구정치'의 도구가 아니다'라는 글을 통해서 “재생산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다시’ 만들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재생산이 첨예한 문제인 까닭은 무엇이 다시 생산될 만한 것이고, 무엇이 다시 생산되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가치체계가 드러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특정 인구의 재생산은 환영받고 장려되는 와중에 다른 특정 인구의 재생산은 금지되고 비난받는다. 즉 재생산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사회가 어떤 가치의 재생산을 추구해 왔는지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시도해볼 수도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이러한 독해를 위해서 국가가 이동과 관련해 펼치는 통치 기조와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생산정의 실현을 위해 체제전환을 요구하는 셰어 활동 



국가는 개인의 차원에서 어떤 몸이 일상적으로 이동하도록 인프라를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것에 대한 것부터 바이러스나 화학적인 물질의 전파와 이동을 관리한다. 정보통신의 발달이 이동성을 더욱 추동하면서 어떤 움직임들은 국가의 경계를 쉽게 넘나든다. 코로나19로 인하여 한시적으로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 제한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권리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이들이며 자본은 금새 적응하며 오히려 새로운 이윤을 창출했다. 미생물에서부터 물류까지, 결국은 사람의 신체를 매개로 이동하기 때문에 누구의 이동권을 우선적으로 부여하고 보장할 것인가는 국가통치의 지향 속에서 몸들은 위계적으로 매겨진다. 결국에는 이 이동의 문제는 재생산의 영역과 깊이 개입된다. 발전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려는 국가 기조하에서 어떤 이들의 활동을 환영할 것인가는 어떤 이들의 재생산을 환영하고 지원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재생산은 세대간의 이동으로(혈연으로 상상되는 핏줄의 연결로 한정되지 않는) 상상해볼 수 있다. 발전주의 체제에서 노골화되었던 우생학과 가족계획 정책,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노골화된 각자도생과 공공성의 축소지향은 수십년간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사회재생산을 파괴하며, 차별과 불평등의 모양새를 만들어왔다.


재생산 정의 운동은 재생산 권리와 재생산 건강권을 포괄하면서도 이러한 권리에 접근할 수 없거나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조건에 있게 만드는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사회정의를 확장해 나가는 운동을 목표로 한다. 재생산 정의를 인구정치와 자본의 이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시민적인 권리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때, 다음과 같은 노력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모든 지역에 공공병원을 만들고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 포괄적인 내용과 방식으로 성교육이 전세대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 성적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정보와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성매개감염에 대한 낙인과 두려움 없이 검진과 치료의 기회를 얻는 것, 임신중지와 출산에 대한 강요없는 결정을 하고 그 결정에 따라 수단을 제공받는 것, 이 모든 권리가 청소년과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 노인 등에게도 차별없이 제공되는 것 등이다. 현재 이 일련의 과정에 존재하는 차별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동권 투쟁에서 노출된 공공성 개념의 훼손을 직시하고,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보다 근본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감염병 예방과 국경에 대한 문제까지 계속 연결해서 고민해나가야 한다. 시설에 거주하는 사람이 지역사회로 이동하고, 시설화된 삶을 강요받는 고립된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관계를 새롭게 맺어나가야 한다. 은폐된 존재들이 드러나고, 이들이 이동하고 관계맺을 수 있도록 마땅한 교통수단과 모두를 위한 공중화장실, 일터와 주거 등이 최대한 조성되고 그것을 통해 공공성을 재형성하는 것이 재생산 정의를 실현해나갈 수 있는 조건이라는 점을 되새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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