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하는 몸, 쾌락의 몸짓들 – 퀴어 섹스는 결속을 비집어 다시 접촉하고야 말 것
남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1. 침대 위의 불평등을 질문하기
지난해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는 PL[ref]People living with HIV/AIDS의 줄임말로 'HIV/AIDS 감염인'을 다르게 일컫는 표현이다. PL과 HIV/AIDS 감염임은 어감이 다른데, 경우에 따라 PL이 더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People living with HIV/AIDS라는 표현은 'HIV/AIDS' 앞에 'People(사람)'이 먼저 나오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때로 ‘감염인’을 줄여 ‘감자’라고 부르기도 한다.[/ref] 자조모임과 HIV/AIDS 운동단체를 중심으로 섹스 교육과 워크샵을 진행했다. 에이즈예방법 19조 전파매개행위금지조항 폐지운동의 일환으로 기획된 프로그램이었다. ‘감염인이 혈액 또는 체액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법조항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부터 퀴어 개개인의 섹스를 살펴보자는 제안의 배경은 무엇일까. 이 글은 국가가 제정한 법과 제도, 그리고 개인이 수행하는 섹스 사이에 놓인 막연하고 아득한 거리로부터 시작한다.
아무리 퀴어가 섹스를 활발하게 할지라도(하고 있는가?) 멍석 깔고 사람들을 모으면 이야기 나누기가 쉬울 리 없다. 프로그램에 주로 참여했던 게이/MSM[ref]Men who have sex with men의 줄임말로 ‘남성과 섹스하는 남성’ 정도가 되겠다. 게이와 같은 성적지향과 정체성 보다는 특정 대상과 행위성에 초점을 맞춰 보다 넓은 범주를 아우를 수 있다.[/ref]을 대상으로 섹스를 말하는 것 역시 의외로 쉽지 않은데, 내밀한 이야기를 나눠주십사 요청하는 자리는 여느 때보다 긴장이 더한다. 시작은 신중하되 무겁지 않고 교육의 격식을 차리면서도 친근감을 심어줘야 한다. 자고로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맛있으려면 시원해야 인지상정. 하여 몇 가지 질문을 시작과 함께 던진다.
‘당신은 섹스하기 까지 어떤 경로와 과정을 거치나요?’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에브리바디 플래져랩팀 성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섹스 AtoZ’에 참여한 사람이 그린 그래프.
참여자들은 자신의 그래프를 그리면서 섹스의 시작과 끝 사이에 일어난 행위를 떠올리고 만족과 불만족, 동의의 이슈들을 체크해본다.
질문은 셰어에서 만든 교육프로그램 [에브리바디 플레져랩]의 일부를 참고했다. 기본적인 물음처럼 보이지만 본디 쉬운 질문은 갑자기 만들어지거나 튀어나오지 않는 법. 여기에는 섹스가 개인의 경험으로만 치부되고 평등하지 못한 관계의 요철들이 익명게시판 바깥을 나가지 못했던 곡절이 있다. 그럼에도 섹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망가지고 미끄러진 관계들이 그저 당신과 나의 결함이나 노력부족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자각이 따라야 한다. 그렇게 섹스는 함께 고민해야만 하는 사회적 의제지만, 입을 여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그가 선택한 침묵 또한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보통 질문에 답이 바로 나올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경우 강연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신은 말하지 않아도 좋으니 내 이야기부터 들어 달라. 당신이나 나나 예외는 없지 않겠는가, 섹스도 즐기지 못하는 지금 어째서 여러분들 앞에 나와서 교육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푸념하듯 고백하면 그제야 머뭇거리던 입들이 긴장을 놓으며 조금씩 만남과 섹스에 미끄러지고 실패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나이를 먹어서, 몸이 예쁘지 않아서, 당장 생업이 없어서, 돈과 감정을 쓰고 싶지 않아서, 관계의 과정을 이어나가기가 귀찮아서, 남자답지 않아서, 질병이 있어서, 오랫동안 연애를 못 해서, 아니면 오랫동안 한 사람과만 연애해서...이유는 차고 넘친다.
살펴보면 나이와 경제력, 질병과 장애 여부, 외모와 젠더표현 등은 기실 차별금지법 조항에 들어가 있는 항목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적 차별 요소들은 타인과 만나 교감하고 소통하는 데에도 문턱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내밀한 경험이 구조에 온전히 밀착할 리 없다. 더구나 퀴어들의 섹스는 다소 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 마련이다. 정상규범을 어느 정도 빗겨나는 만큼 위계에서 유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고, 접근의 문턱도 시스젠더 이성 간 관계보다는 낮다고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원한다면 데이팅 어플리케이션과 SNS, 게시판을 활용해 상대의 프로필을 살피며 쪽지를 보내고 말을 걸어 즉석으로 만날 수 있고, 합이 잘 맞으면 파트너가 되어 지속적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 술의 힘을 빌릴 수 있고, 술을 핑계로 술번개에 나가 재미없는 게임에 참여하다 눈이 맞으면 슬쩍 자리를 뜨는 것도 상책이다. 법적 금지와 위험을 담보해야겠지만 약물을 빌려 긴장을 조금 빨리 완화할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서로의 섹스 기호만 확인하고 자잘한 과정을 압축한 채 BDSM이든 돔섭[ref]Dominant와 Submissive를 축약한 개념이다. 상호 합의와 계약 하에 지배와 복종, 주종을 관계를 설정하고 플레이를 진행하는데, 항목들은 개인의 취향과 합의 내용에 따라 다르다.[/ref]이든 ‘플레이’를 상호간 설계할 수도 있고, 정말로 가볍게 섹스만 하고 싶다면 찜방이라도 가면 된다. 살아보자고 구르고 부딪혀온 궤적이 짧지 않은 성소수자에겐 의외로 섹스 할 기회와 통로가 적지 않으며, 음지의 역사라고 하지만 섹스 코드와 문화가 토끼 굴처럼 많은 통로를 열어낸다. 하지만 질문을 여기서 멈춘다면 섹스의 시작을 열기도 전에 던전 입구에서 발목이 묶이고 말 터. 하여 물음을 이어 간다. 불편한 질문을 계속 던져보겠다는 양해를 구하면서.
‘그렇게 성사된 섹스는 성공적인가요?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나요?’
‘성공하지 못했다면 무엇이 커뮤니티 안에서 당신의 만남과 섹스를 가로막고 있나요?’
불평등은 침대 위도 예외가 아니다. 상대의 기분과 기호를 맞춰주며 분위기를 깨지 않는 선에서 삽입섹스를 할지 말지, 하게 되면 누가 바터밍(bottoming, 삽입 당하는 위치를 점하는 것을 말한다.)을 할 것인지, 콘돔을 사용할지 말지 등에 대한 주도권을 나누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여기에도 누구의 외모가 더 출중하고 누가 대실/숙박비를 비롯한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지, 누가 더 늙었는지(반대로 더 어린지), 누가 좀 더 남자/여자다운지, 혹은 지정성별에 가까운 외양과 태도를 갖고 있는지 등의 계산이 관계를 좌우한다. 말인즉 섹스는 평등할 수 없다.
섹스의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속성은 긴장과 쾌락을 더한다. 하지만 그만큼 이야기하기 어려운 환경을 짚으며 기울어진 관계의 맥락을 살피고 그 속에서 어느 쪽이 무시당하며 거절당하는지 살피는 노력은 쉽게 지나칠 수 없다. 섹스의 현재를 자각하며 평등의 감각을 훈련하고 배우는 것이 적어도 인권운동이 펼쳐내고자 하는 섹스와 관계의 이야기는 아닐까.
2. '모든 성소수자가 문란한 건 아니거든요!'
애석하게도 인권운동의 관점에서 섹스를 이야기 나눌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유야 물어보면 차고 넘친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당사자를 성적 대상화하기 쉬운 여건은 공론장에 섹스를 이야기하는 시도 자체를 민감하게 만든다. 물론 여기에는 퀴어 커뮤니티에서 섹스의 공적 담론 자체가 부족했던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 섹스를 하면서 평등의 감수성을 익히고 개입하지 못한 상황이 논의를 어렵게 만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배경은 인권운동이 섹스를 이야기한 시간보다 성소수자가 문란하다는 공격을 방어하는데 많은 비중을 뒀던데 있다. 퀴어한 몸과 이들의 섹스가 정상성을 한참 벗어나는 비도덕적 행위라는 세간의 공격은 이내 사회를 오염시키고 망하게 하리라는 레퍼토리로 비약한다. 이들은 특정 키워드, 이를테면 청소년 바텀 알바를 말하고 문란한 성관계의 행태들을 노골적으로 묘사하며 곧장 죄악으로 연결 짓는다. 동성애자는 남들이 영위하는 일상의 구체적인 경험 대신 성애적인 존재로만 부각되어 조롱과 지탄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여기에 HIV/AIDS에 대한 낙인은 질병을 도덕적 단죄인양 해석하며 당사자의 섹스를 혐오와 공격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부정적인 여론몰이는 비시스젠더의 비이성애적인 섹스행위 자체에 이유를 불문하고 문제적이라는 판단을 내려 그것이 일상을 오염시키고 사회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편집증적 망상을 부추긴다.
2019년에 열린 ‘동성캉캉’이라는 제목의 전시 포스터.
“국내에서 활동하는 게이 아티스트 4인이 게이 공동체가 활동하고, 형성되는 과정을 "크루징"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전시를 개최했다고 소개한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HIV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범죄의 낙인을 씌우고 처벌하는 조항들은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과 두려움을 통제하기 위한 강제적 배제에 바탕 한다. 감염인이 주체적으로 치료에 참여하며 바이러스 수치를 제로에 가깝게 유지하고 전파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현 시점에도 에이즈가 위험한 전염병이라는 고착된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성적 낙인은 섹스 당사자들이 혼자서는 극복하기 어려웠을 복잡한 상황을 살피기보다 특정 행위를 부각하며 도덕적 판단과 단죄를 쉽게 내리도록 한다. 특히 인수공통감염병이 전지구적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온전히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성애자 확진자가 나올 때, 질병은 곧장 동성애자의 문란함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객관적인 예방과 치료가 필요한 공중보건의 자리에는 특정 집단에 대한 도덕적 공격이 쏟아진다. 이는 사회와 공동체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책임의 무게를 성소수자에게, HIV감염인에게, 지정성별과 다른 형태의 젠더를 갖는 이들에게, 성판매자에게, 약물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섹스의 모든 비난과 책임을 전가하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위험부담을 함께 안기보다 상대에게 응보와 범죄의 낙인을 찍고 삭제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은 재차 질병과 손상에 노출되기 쉬운 이들을 고립시킨다. 타인을 낙인찍는 방식으로 질병을 비롯한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은 사회를 불신과 적대로 잠식케 한다. 이는 사회일반 뿐 아니라 공격이 향하는 성소수자 당사자들에게까지 섹스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 성적 보수주의 공격에 대항하는 힘은 위축되고 그들의 논리에 포섭되기 쉬워진다. 하여 아래의 논리가 방어적으로 재생산된다.
‘모든 성소수자가 문란한 건 아니거든요!’
‘모든 게이가 항문섹스 하는 건 아니거든요!’
3. 국가에 의해 세워진 침대 사이의 위계
성소수자가 문란하다는 비난에 그렇지 않다고 단순히 응대하는 것은 사실여부야 어떻든 저들이 설정한 도덕적 프레임에 휘말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섹스는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행위이기에 앞서 그 자체 공격받기 쉬운 개념으로, 언급조차 꺼려지는 단어로 음지의 문화가 되고 바깥으로 나오면 곧장 벌거벗겨지는 수치심의 주홍글씨로 전락한다. 섹스에 대해 경계하고 구분 지으며 올바름을 강조하고 교조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태도는 퀴어 섹슈얼리티 담론을 정상성 규범으로 채워 넣곤 한다. 나아가 커뮤니티 당사자들마저 내부 검열과 감시를 가동시켜 의심과 불신, 적대의 골을 깊게 만들어 섹스에 관한 어떤 논의도 할 수 없게 만든다. 혐오를 기반으로 쏟아지는 공격은 트위터 뒷계[ref] 자신의 신분과 정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으면서 성적 뉘앙스가 강한 문장들을 게재하고, 자신의 몸과 타인과의 관계를 기록하고 인증하며 전시하는 계정을 일컫는다. SNS 이용자들은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막론하고 계정을 생성하며 텍스트와 이미지를 유통하는데, 이들은 섹스 행위와 관련된 코드들을 언어로 기술하는 동시에 직접적인 실천으로 수행하며 관계와 네트워크를 만들어간다. 사회의 수면 위로 올라오기 어려운 성적 대상화의 방식들과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관계의 수행이 상호 합의 하에 이뤄지는 것을 암묵적인 룰로 삼는다.[/ref]와 이태원의 성판매 트랜스여성 등 ‘하위문화’로 부를 수 있는 섹스 문화를 살펴보기에 앞서 비판의 대상으로 표적되며 이들을 비가시화하고 접근할 가능성마저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사정에는 국가가 동성애자와 HIV감염인의 일상을 제약하며 법으로 금지하고 통제해온 역사가 있다. 단적으로 군형법 92조 6 추행죄 조항은 소도미법(Sodomy law)의 오랜 논리를 따른다. 동성 간 성관계는 합의된 관계일지라도, 심지어 강제적인 관계 속에 피해당한 이가 동성애자임이 밝혀진 상황이면 처벌 받을 수 있다. 에이즈예방법 상 전파매개행위금지조항은 감염인이 예방 없이 체액을 옮기는 행위를 할 경우 징역 3년 이하의 처벌을 받는다고 명시한다. 섹스 전 자신의 감염 사실을 확인하고 합의를 했을지라도 콘돔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는 언제라도 고발 대상으로, 가해자로 지목되어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것이다.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가 제작한 “범죄가 아니다” 캠페인 영상.
HIV감염인의 섹스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없애고, 퀴어 커뮤니티에서부터 신뢰에 기반한 보통의 관계를 만들어가나자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국가의 개입은 사회 전반에 혐오 논리를 도구 삼는 성적보수주의의 명분이 된다. 누군가 동성애자고 HIV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처벌을 가중하거나 범죄의 낙인을 찍는 태도는 규범적 섹스에 국가안보의 정당성을 연결시키는 데 나아가 ‘섹스 할 자격이 있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존재를 구분하고 줄 세운다. 위계 아래 개인을 종속시키는 상황은 사회 전반 섹스 문화에 작동하는 위계와 불평등을 논하기 어렵게 한다. 더구나 특정 질병과 장애를 갖고 있거나 다른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국가에 등록되지 않은 외국인을 혐오하고 부정하는 논리에 무게를 실어주며 혐오의 언사를 의견이자 민원으로 취급하며 혐오를 여론으로 확장시키기도 한다. 성적 보수주의의 언어와 질서가 공론을 잠식하는 가운데 규범을 벗어나는 섹스는 비난하고 부정하기 위한 가십과 음모로 전락한다.
성적 권리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빈약한 상황은 섹스 문화를 향한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2020년 5월 코로나 확산 초기 이태원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온 상황만 하더라도 성소수자는 질병 전파 여부와 상관없이 비난받았다. 언론·미디어와 여론은 그들이 제한된 공간을 점하며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만나는 환경의 제약을 살피기보다 이 시국에 바깥에 나와서 문란하게 놀다가 코로나를 전파하고 사회에 해를 끼친다는 식의 낙인을 자행했다. 개인의 성적 만남이 르포와 특종 대상으로 노출되고 노골적인 볼거리로 전락하는 상황은 퀴어 당사자로 하여금 자신들이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 동료를 감시하고 조롱하며 배척하게 함으로써 커뮤니티 내부의 비난과 검열을 재생산하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이 상황은 2년이 지난 지금 ‘원숭이 두창’이 게이들의 ‘광란파티’에서 전파되었다는 언론의 문구로 반복하며 성원들을 계속해서 위축시킨다. 우리에겐 어떤 대항언어가 필요할까. 대항언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들을 전제해야 할까.
4. 공동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변화
만남과 섹스의 어려움을 말하는 건 나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결함과 손상, 불안의 요소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호명되고 위계 지어지는지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적어도 타인을 만나고 그와 사랑을 나눌 수 있기 위한 여건이 무엇인지 따져볼 때, 관계는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문제로만 수렴하지 않으며 사회 안보와 복지, 공중보건, 노동, 교육, 가족제도 등에 걸친 사회 분야들에 내재한 차별의 구조가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등한 섹스를 위해 섹스를 행하는 개인에게 전적인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의도여부와 상관없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섹스를 하거나 질병 사실을 밝히지 않을 때, 질병이 있어도 치료에 제대로 응하지 않는 선택을 할지라도 사회는 그를 지탄하기에 앞서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범죄 여부를 묻기에 앞서 타인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회에 무엇이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찾아야 한다. 설령 위험을 쾌락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감수할지라도 공동체는 그를 무조건적으로 낙인찍고 불평등한 대우를 가하기에 앞서 그들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면서도 언제라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취약한 상황에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평등에 기반 하는 섹스의 공동체는 당신이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 배경을 살피며 함께 안전을 도모하고 서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숙고하는 과정을 통해 성적 담론의 ‘근력’을 높인다.
함께 섹스를 이야기하는 시도는 성원들로 하여금 금지와 범죄화의 방식으로 구분 짓는 자구책이 정작 위험을 회피함으로써 위험을 재생산해왔음을 체감케 한다. 더불어 특정 집단에 낙인을 찍어 공격하고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한시적으로 방어하며 배타적 규범을 공고히 해왔음을 일깨우며, 성적 실천들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공론장을 한계 짓고 성원이 될 수 있는 자격 여부를 판단해왔음을 반성할 수 있다. 그렇게 인권운동은 성적 지향과 질병여부 자체가 범죄라고 낙인찍는 악법들을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나아가 자원의 평등한 분배와 차별하지 않기 위한 제도가 만남의 방식과 만남의 대상을 고려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배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계하고 검열해온 기제들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서로의 결함이 낙인이 되지 않도록 그의 삶을 지지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가운데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아닐까. 권리를 박탈하는 규범에 저항하는 섹스는 당신과 나를 취약함으로 몰아가는 사회의 강압적 질서에 질문을 던지며 우리의 행복을 찾아가는 공동의 행위임을 몸으로 마음으로 쓴다.
2021년에 열린 ‘몸이 선언이 될 때’ 전시 작품 중 하나.
일렉트라 케이비, 핵친족주의 이후의 퀴어적 변화들: 돌봄과 상호 원조의 급진적 가족 구조, 사이보그와 여성 신을 중심으로 2021. https://thebodymanifesto.xyz/
그리고 우리에게는 비범죄화와 즐거운 섹스 너머 좀 더 많은 상상이 필요함을 적는다. 계층과 직업, 외모와 나이, 인종과 장애/질병 여부, 젠더정체성과 표현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차별이 드리운 관계의 생태계에서 차별금지법과 같은 제도는 사랑과 우정을 구획하는 위계적이고 제한적인 환경에 어떤 파열음을 낼 수 있을까. 좀 더 세속적으로 말해보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배타적인 ‘식’[ref] ‘식’, 또는 ‘식성’은 게이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이상형’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행위를 먹는 행위로 은유해온 관행에서 파생된 것으로 접근하는 경우들이 많다.[/ref] 문화와 관계의 습속들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사회의 인권감수성이 높아지며 삶을 지지할 수 있는 권리와 장치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때, 섹스의 척박한 환경과 잔인하리만큼 위계적인 식의 세계, 그로부터 온전한 연애를 꿈꾸는 거절의 공동체, 재산 증식과 재생산을 위한 결속의 배타적인 울타리로 소급되는 파트너십 관계는 어떤 변화를 열어낼 수 있을까. 요컨대 사회를 변화시키는 정치적 실천은 개인의 미적 기준과 판단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틈새의 이야기와 관계들을 발굴하고 빚어내야 할까. 장애 및 이주민 정책의 변화는 관계와 섹스에 있어 어떤 변화를 상상할 수 있을까. 트위터 뒷계를 운영하면서 음지의 플레이를 즐기며 전시하는 이들과 트랜스 업장 안팎에서 일하는 이들, 탈가정 위기에 놓인 청소년 성소수자와 미등록 거주 중인 퀴어 성원들과는 어떻게 성적 권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쾌락은 개인이 실천하고 감각하는 영역에 있지만, 개인과 개인 간 관계는 제도의 제한을 받고 사회적 여론에 영향 받을 수 있기에 모든 책임을 개인의 역량으로만 갈음할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개인의 관계는 서로를 연결시켜 사회에 관행처럼 고착된 관계의 질서를 구성하고 변화시킬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인권운동을 하는 중요한 이유를 꼽는다면 낯선 이들을 만나고 그의 세계와 조우하며 관계 맺고 그로부터 쾌락을 발견하여 관계의 관행을 비트는 실천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아니었나를 새삼 곱씹는다. 인권 친화적 제도와 장치들을 공동이 향유할 수 있는 지복(至福)으로 연결하고, 쾌락을 향유할 수 있기 위해 삶을 지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상상을 함께 해나가는 것은,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목전에서 당신 곁을 두드리고 있다.
연대하는 몸, 쾌락의 몸짓들 – 퀴어 섹스는 결속을 비집어 다시 접촉하고야 말 것
남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
1. 침대 위의 불평등을 질문하기
지난해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는 PL[ref]People living with HIV/AIDS의 줄임말로 'HIV/AIDS 감염인'을 다르게 일컫는 표현이다. PL과 HIV/AIDS 감염임은 어감이 다른데, 경우에 따라 PL이 더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People living with HIV/AIDS라는 표현은 'HIV/AIDS' 앞에 'People(사람)'이 먼저 나오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때로 ‘감염인’을 줄여 ‘감자’라고 부르기도 한다.[/ref] 자조모임과 HIV/AIDS 운동단체를 중심으로 섹스 교육과 워크샵을 진행했다. 에이즈예방법 19조 전파매개행위금지조항 폐지운동의 일환으로 기획된 프로그램이었다. ‘감염인이 혈액 또는 체액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법조항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부터 퀴어 개개인의 섹스를 살펴보자는 제안의 배경은 무엇일까. 이 글은 국가가 제정한 법과 제도, 그리고 개인이 수행하는 섹스 사이에 놓인 막연하고 아득한 거리로부터 시작한다.
아무리 퀴어가 섹스를 활발하게 할지라도(하고 있는가?) 멍석 깔고 사람들을 모으면 이야기 나누기가 쉬울 리 없다. 프로그램에 주로 참여했던 게이/MSM[ref]Men who have sex with men의 줄임말로 ‘남성과 섹스하는 남성’ 정도가 되겠다. 게이와 같은 성적지향과 정체성 보다는 특정 대상과 행위성에 초점을 맞춰 보다 넓은 범주를 아우를 수 있다.[/ref]을 대상으로 섹스를 말하는 것 역시 의외로 쉽지 않은데, 내밀한 이야기를 나눠주십사 요청하는 자리는 여느 때보다 긴장이 더한다. 시작은 신중하되 무겁지 않고 교육의 격식을 차리면서도 친근감을 심어줘야 한다. 자고로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맛있으려면 시원해야 인지상정. 하여 몇 가지 질문을 시작과 함께 던진다.
‘당신은 섹스하기 까지 어떤 경로와 과정을 거치나요?’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에브리바디 플래져랩팀 성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섹스 AtoZ’에 참여한 사람이 그린 그래프.
참여자들은 자신의 그래프를 그리면서 섹스의 시작과 끝 사이에 일어난 행위를 떠올리고 만족과 불만족, 동의의 이슈들을 체크해본다.
질문은 셰어에서 만든 교육프로그램 [에브리바디 플레져랩]의 일부를 참고했다. 기본적인 물음처럼 보이지만 본디 쉬운 질문은 갑자기 만들어지거나 튀어나오지 않는 법. 여기에는 섹스가 개인의 경험으로만 치부되고 평등하지 못한 관계의 요철들이 익명게시판 바깥을 나가지 못했던 곡절이 있다. 그럼에도 섹스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망가지고 미끄러진 관계들이 그저 당신과 나의 결함이나 노력부족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자각이 따라야 한다. 그렇게 섹스는 함께 고민해야만 하는 사회적 의제지만, 입을 여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그가 선택한 침묵 또한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보통 질문에 답이 바로 나올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경우 강연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신은 말하지 않아도 좋으니 내 이야기부터 들어 달라. 당신이나 나나 예외는 없지 않겠는가, 섹스도 즐기지 못하는 지금 어째서 여러분들 앞에 나와서 교육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푸념하듯 고백하면 그제야 머뭇거리던 입들이 긴장을 놓으며 조금씩 만남과 섹스에 미끄러지고 실패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나이를 먹어서, 몸이 예쁘지 않아서, 당장 생업이 없어서, 돈과 감정을 쓰고 싶지 않아서, 관계의 과정을 이어나가기가 귀찮아서, 남자답지 않아서, 질병이 있어서, 오랫동안 연애를 못 해서, 아니면 오랫동안 한 사람과만 연애해서...이유는 차고 넘친다.
살펴보면 나이와 경제력, 질병과 장애 여부, 외모와 젠더표현 등은 기실 차별금지법 조항에 들어가 있는 항목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적 차별 요소들은 타인과 만나 교감하고 소통하는 데에도 문턱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내밀한 경험이 구조에 온전히 밀착할 리 없다. 더구나 퀴어들의 섹스는 다소 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기 마련이다. 정상규범을 어느 정도 빗겨나는 만큼 위계에서 유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고, 접근의 문턱도 시스젠더 이성 간 관계보다는 낮다고 이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원한다면 데이팅 어플리케이션과 SNS, 게시판을 활용해 상대의 프로필을 살피며 쪽지를 보내고 말을 걸어 즉석으로 만날 수 있고, 합이 잘 맞으면 파트너가 되어 지속적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 술의 힘을 빌릴 수 있고, 술을 핑계로 술번개에 나가 재미없는 게임에 참여하다 눈이 맞으면 슬쩍 자리를 뜨는 것도 상책이다. 법적 금지와 위험을 담보해야겠지만 약물을 빌려 긴장을 조금 빨리 완화할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서로의 섹스 기호만 확인하고 자잘한 과정을 압축한 채 BDSM이든 돔섭[ref]Dominant와 Submissive를 축약한 개념이다. 상호 합의와 계약 하에 지배와 복종, 주종을 관계를 설정하고 플레이를 진행하는데, 항목들은 개인의 취향과 합의 내용에 따라 다르다.[/ref]이든 ‘플레이’를 상호간 설계할 수도 있고, 정말로 가볍게 섹스만 하고 싶다면 찜방이라도 가면 된다. 살아보자고 구르고 부딪혀온 궤적이 짧지 않은 성소수자에겐 의외로 섹스 할 기회와 통로가 적지 않으며, 음지의 역사라고 하지만 섹스 코드와 문화가 토끼 굴처럼 많은 통로를 열어낸다. 하지만 질문을 여기서 멈춘다면 섹스의 시작을 열기도 전에 던전 입구에서 발목이 묶이고 말 터. 하여 물음을 이어 간다. 불편한 질문을 계속 던져보겠다는 양해를 구하면서.
‘그렇게 성사된 섹스는 성공적인가요?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나요?’
‘성공하지 못했다면 무엇이 커뮤니티 안에서 당신의 만남과 섹스를 가로막고 있나요?’
불평등은 침대 위도 예외가 아니다. 상대의 기분과 기호를 맞춰주며 분위기를 깨지 않는 선에서 삽입섹스를 할지 말지, 하게 되면 누가 바터밍(bottoming, 삽입 당하는 위치를 점하는 것을 말한다.)을 할 것인지, 콘돔을 사용할지 말지 등에 대한 주도권을 나누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여기에도 누구의 외모가 더 출중하고 누가 대실/숙박비를 비롯한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는지, 누가 더 늙었는지(반대로 더 어린지), 누가 좀 더 남자/여자다운지, 혹은 지정성별에 가까운 외양과 태도를 갖고 있는지 등의 계산이 관계를 좌우한다. 말인즉 섹스는 평등할 수 없다.
섹스의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속성은 긴장과 쾌락을 더한다. 하지만 그만큼 이야기하기 어려운 환경을 짚으며 기울어진 관계의 맥락을 살피고 그 속에서 어느 쪽이 무시당하며 거절당하는지 살피는 노력은 쉽게 지나칠 수 없다. 섹스의 현재를 자각하며 평등의 감각을 훈련하고 배우는 것이 적어도 인권운동이 펼쳐내고자 하는 섹스와 관계의 이야기는 아닐까.
2. '모든 성소수자가 문란한 건 아니거든요!'
애석하게도 인권운동의 관점에서 섹스를 이야기 나눌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유야 물어보면 차고 넘친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당사자를 성적 대상화하기 쉬운 여건은 공론장에 섹스를 이야기하는 시도 자체를 민감하게 만든다. 물론 여기에는 퀴어 커뮤니티에서 섹스의 공적 담론 자체가 부족했던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 섹스를 하면서 평등의 감수성을 익히고 개입하지 못한 상황이 논의를 어렵게 만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배경은 인권운동이 섹스를 이야기한 시간보다 성소수자가 문란하다는 공격을 방어하는데 많은 비중을 뒀던데 있다. 퀴어한 몸과 이들의 섹스가 정상성을 한참 벗어나는 비도덕적 행위라는 세간의 공격은 이내 사회를 오염시키고 망하게 하리라는 레퍼토리로 비약한다. 이들은 특정 키워드, 이를테면 청소년 바텀 알바를 말하고 문란한 성관계의 행태들을 노골적으로 묘사하며 곧장 죄악으로 연결 짓는다. 동성애자는 남들이 영위하는 일상의 구체적인 경험 대신 성애적인 존재로만 부각되어 조롱과 지탄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여기에 HIV/AIDS에 대한 낙인은 질병을 도덕적 단죄인양 해석하며 당사자의 섹스를 혐오와 공격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부정적인 여론몰이는 비시스젠더의 비이성애적인 섹스행위 자체에 이유를 불문하고 문제적이라는 판단을 내려 그것이 일상을 오염시키고 사회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편집증적 망상을 부추긴다.
2019년에 열린 ‘동성캉캉’이라는 제목의 전시 포스터.
“국내에서 활동하는 게이 아티스트 4인이 게이 공동체가 활동하고, 형성되는 과정을 "크루징"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전시를 개최했다고 소개한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HIV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범죄의 낙인을 씌우고 처벌하는 조항들은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과 두려움을 통제하기 위한 강제적 배제에 바탕 한다. 감염인이 주체적으로 치료에 참여하며 바이러스 수치를 제로에 가깝게 유지하고 전파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현 시점에도 에이즈가 위험한 전염병이라는 고착된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성적 낙인은 섹스 당사자들이 혼자서는 극복하기 어려웠을 복잡한 상황을 살피기보다 특정 행위를 부각하며 도덕적 판단과 단죄를 쉽게 내리도록 한다. 특히 인수공통감염병이 전지구적으로 등장하는 가운데 온전히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성애자 확진자가 나올 때, 질병은 곧장 동성애자의 문란함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객관적인 예방과 치료가 필요한 공중보건의 자리에는 특정 집단에 대한 도덕적 공격이 쏟아진다. 이는 사회와 공동체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책임의 무게를 성소수자에게, HIV감염인에게, 지정성별과 다른 형태의 젠더를 갖는 이들에게, 성판매자에게, 약물을 사용하는 이들에게 섹스의 모든 비난과 책임을 전가하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위험부담을 함께 안기보다 상대에게 응보와 범죄의 낙인을 찍고 삭제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은 재차 질병과 손상에 노출되기 쉬운 이들을 고립시킨다. 타인을 낙인찍는 방식으로 질병을 비롯한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은 사회를 불신과 적대로 잠식케 한다. 이는 사회일반 뿐 아니라 공격이 향하는 성소수자 당사자들에게까지 섹스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 성적 보수주의 공격에 대항하는 힘은 위축되고 그들의 논리에 포섭되기 쉬워진다. 하여 아래의 논리가 방어적으로 재생산된다.
‘모든 성소수자가 문란한 건 아니거든요!’
‘모든 게이가 항문섹스 하는 건 아니거든요!’
3. 국가에 의해 세워진 침대 사이의 위계
성소수자가 문란하다는 비난에 그렇지 않다고 단순히 응대하는 것은 사실여부야 어떻든 저들이 설정한 도덕적 프레임에 휘말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섹스는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행위이기에 앞서 그 자체 공격받기 쉬운 개념으로, 언급조차 꺼려지는 단어로 음지의 문화가 되고 바깥으로 나오면 곧장 벌거벗겨지는 수치심의 주홍글씨로 전락한다. 섹스에 대해 경계하고 구분 지으며 올바름을 강조하고 교조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태도는 퀴어 섹슈얼리티 담론을 정상성 규범으로 채워 넣곤 한다. 나아가 커뮤니티 당사자들마저 내부 검열과 감시를 가동시켜 의심과 불신, 적대의 골을 깊게 만들어 섹스에 관한 어떤 논의도 할 수 없게 만든다. 혐오를 기반으로 쏟아지는 공격은 트위터 뒷계[ref] 자신의 신분과 정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으면서 성적 뉘앙스가 강한 문장들을 게재하고, 자신의 몸과 타인과의 관계를 기록하고 인증하며 전시하는 계정을 일컫는다. SNS 이용자들은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막론하고 계정을 생성하며 텍스트와 이미지를 유통하는데, 이들은 섹스 행위와 관련된 코드들을 언어로 기술하는 동시에 직접적인 실천으로 수행하며 관계와 네트워크를 만들어간다. 사회의 수면 위로 올라오기 어려운 성적 대상화의 방식들과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관계의 수행이 상호 합의 하에 이뤄지는 것을 암묵적인 룰로 삼는다.[/ref]와 이태원의 성판매 트랜스여성 등 ‘하위문화’로 부를 수 있는 섹스 문화를 살펴보기에 앞서 비판의 대상으로 표적되며 이들을 비가시화하고 접근할 가능성마저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사정에는 국가가 동성애자와 HIV감염인의 일상을 제약하며 법으로 금지하고 통제해온 역사가 있다. 단적으로 군형법 92조 6 추행죄 조항은 소도미법(Sodomy law)의 오랜 논리를 따른다. 동성 간 성관계는 합의된 관계일지라도, 심지어 강제적인 관계 속에 피해당한 이가 동성애자임이 밝혀진 상황이면 처벌 받을 수 있다. 에이즈예방법 상 전파매개행위금지조항은 감염인이 예방 없이 체액을 옮기는 행위를 할 경우 징역 3년 이하의 처벌을 받는다고 명시한다. 섹스 전 자신의 감염 사실을 확인하고 합의를 했을지라도 콘돔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는 언제라도 고발 대상으로, 가해자로 지목되어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것이다.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가 제작한 “범죄가 아니다” 캠페인 영상.
HIV감염인의 섹스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없애고, 퀴어 커뮤니티에서부터 신뢰에 기반한 보통의 관계를 만들어가나자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국가의 개입은 사회 전반에 혐오 논리를 도구 삼는 성적보수주의의 명분이 된다. 누군가 동성애자고 HIV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처벌을 가중하거나 범죄의 낙인을 찍는 태도는 규범적 섹스에 국가안보의 정당성을 연결시키는 데 나아가 ‘섹스 할 자격이 있는’ 국민과 그렇지 않은 존재를 구분하고 줄 세운다. 위계 아래 개인을 종속시키는 상황은 사회 전반 섹스 문화에 작동하는 위계와 불평등을 논하기 어렵게 한다. 더구나 특정 질병과 장애를 갖고 있거나 다른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국가에 등록되지 않은 외국인을 혐오하고 부정하는 논리에 무게를 실어주며 혐오의 언사를 의견이자 민원으로 취급하며 혐오를 여론으로 확장시키기도 한다. 성적 보수주의의 언어와 질서가 공론을 잠식하는 가운데 규범을 벗어나는 섹스는 비난하고 부정하기 위한 가십과 음모로 전락한다.
성적 권리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빈약한 상황은 섹스 문화를 향한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2020년 5월 코로나 확산 초기 이태원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온 상황만 하더라도 성소수자는 질병 전파 여부와 상관없이 비난받았다. 언론·미디어와 여론은 그들이 제한된 공간을 점하며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만나는 환경의 제약을 살피기보다 이 시국에 바깥에 나와서 문란하게 놀다가 코로나를 전파하고 사회에 해를 끼친다는 식의 낙인을 자행했다. 개인의 성적 만남이 르포와 특종 대상으로 노출되고 노골적인 볼거리로 전락하는 상황은 퀴어 당사자로 하여금 자신들이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 동료를 감시하고 조롱하며 배척하게 함으로써 커뮤니티 내부의 비난과 검열을 재생산하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이 상황은 2년이 지난 지금 ‘원숭이 두창’이 게이들의 ‘광란파티’에서 전파되었다는 언론의 문구로 반복하며 성원들을 계속해서 위축시킨다. 우리에겐 어떤 대항언어가 필요할까. 대항언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들을 전제해야 할까.
4. 공동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변화
만남과 섹스의 어려움을 말하는 건 나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결함과 손상, 불안의 요소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호명되고 위계 지어지는지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적어도 타인을 만나고 그와 사랑을 나눌 수 있기 위한 여건이 무엇인지 따져볼 때, 관계는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문제로만 수렴하지 않으며 사회 안보와 복지, 공중보건, 노동, 교육, 가족제도 등에 걸친 사회 분야들에 내재한 차별의 구조가 강력한 기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평등한 섹스를 위해 섹스를 행하는 개인에게 전적인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의도여부와 상관없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섹스를 하거나 질병 사실을 밝히지 않을 때, 질병이 있어도 치료에 제대로 응하지 않는 선택을 할지라도 사회는 그를 지탄하기에 앞서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범죄 여부를 묻기에 앞서 타인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회에 무엇이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찾아야 한다. 설령 위험을 쾌락의 방식으로 선택하고 감수할지라도 공동체는 그를 무조건적으로 낙인찍고 불평등한 대우를 가하기에 앞서 그들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면서도 언제라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취약한 상황에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평등에 기반 하는 섹스의 공동체는 당신이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 배경을 살피며 함께 안전을 도모하고 서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숙고하는 과정을 통해 성적 담론의 ‘근력’을 높인다.
함께 섹스를 이야기하는 시도는 성원들로 하여금 금지와 범죄화의 방식으로 구분 짓는 자구책이 정작 위험을 회피함으로써 위험을 재생산해왔음을 체감케 한다. 더불어 특정 집단에 낙인을 찍어 공격하고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한시적으로 방어하며 배타적 규범을 공고히 해왔음을 일깨우며, 성적 실천들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공론장을 한계 짓고 성원이 될 수 있는 자격 여부를 판단해왔음을 반성할 수 있다. 그렇게 인권운동은 성적 지향과 질병여부 자체가 범죄라고 낙인찍는 악법들을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나아가 자원의 평등한 분배와 차별하지 않기 위한 제도가 만남의 방식과 만남의 대상을 고려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배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계하고 검열해온 기제들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서로의 결함이 낙인이 되지 않도록 그의 삶을 지지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가운데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아닐까. 권리를 박탈하는 규범에 저항하는 섹스는 당신과 나를 취약함으로 몰아가는 사회의 강압적 질서에 질문을 던지며 우리의 행복을 찾아가는 공동의 행위임을 몸으로 마음으로 쓴다.
2021년에 열린 ‘몸이 선언이 될 때’ 전시 작품 중 하나.
일렉트라 케이비, 핵친족주의 이후의 퀴어적 변화들: 돌봄과 상호 원조의 급진적 가족 구조, 사이보그와 여성 신을 중심으로 2021. https://thebodymanifesto.xyz/
그리고 우리에게는 비범죄화와 즐거운 섹스 너머 좀 더 많은 상상이 필요함을 적는다. 계층과 직업, 외모와 나이, 인종과 장애/질병 여부, 젠더정체성과 표현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차별이 드리운 관계의 생태계에서 차별금지법과 같은 제도는 사랑과 우정을 구획하는 위계적이고 제한적인 환경에 어떤 파열음을 낼 수 있을까. 좀 더 세속적으로 말해보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배타적인 ‘식’[ref] ‘식’, 또는 ‘식성’은 게이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이상형’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행위를 먹는 행위로 은유해온 관행에서 파생된 것으로 접근하는 경우들이 많다.[/ref] 문화와 관계의 습속들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사회의 인권감수성이 높아지며 삶을 지지할 수 있는 권리와 장치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때, 섹스의 척박한 환경과 잔인하리만큼 위계적인 식의 세계, 그로부터 온전한 연애를 꿈꾸는 거절의 공동체, 재산 증식과 재생산을 위한 결속의 배타적인 울타리로 소급되는 파트너십 관계는 어떤 변화를 열어낼 수 있을까. 요컨대 사회를 변화시키는 정치적 실천은 개인의 미적 기준과 판단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틈새의 이야기와 관계들을 발굴하고 빚어내야 할까. 장애 및 이주민 정책의 변화는 관계와 섹스에 있어 어떤 변화를 상상할 수 있을까. 트위터 뒷계를 운영하면서 음지의 플레이를 즐기며 전시하는 이들과 트랜스 업장 안팎에서 일하는 이들, 탈가정 위기에 놓인 청소년 성소수자와 미등록 거주 중인 퀴어 성원들과는 어떻게 성적 권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쾌락은 개인이 실천하고 감각하는 영역에 있지만, 개인과 개인 간 관계는 제도의 제한을 받고 사회적 여론에 영향 받을 수 있기에 모든 책임을 개인의 역량으로만 갈음할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개인의 관계는 서로를 연결시켜 사회에 관행처럼 고착된 관계의 질서를 구성하고 변화시킬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인권운동을 하는 중요한 이유를 꼽는다면 낯선 이들을 만나고 그의 세계와 조우하며 관계 맺고 그로부터 쾌락을 발견하여 관계의 관행을 비트는 실천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아니었나를 새삼 곱씹는다. 인권 친화적 제도와 장치들을 공동이 향유할 수 있는 지복(至福)으로 연결하고, 쾌락을 향유할 수 있기 위해 삶을 지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상상을 함께 해나가는 것은,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목전에서 당신 곁을 두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