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01월[정의] 정보에 기반한 동의와 의사결정지원

최현정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와 이를 기초로 한 자율적 의사 결정은 성과 재생산 건강권 확보의 핵심입니다. 이때 ‘정보 제공’은 매우 당연해 보이지만, 정보 제공을 받을 당사자의 연령, 장애 유무, 장애 유형과 정도, 사용하는 언어 등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습니다. 성과 재생산 건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려면, ‘정보 제공’이 단지 정보의 나열이나 기계적 전달에 그쳐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2018년 8월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와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장애여성을 포함한 모든 여성의 성과 재생산권리 보장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공동성명(번역문) 전문 보기] 두 위원회는, “정부 당국은 장애여성을 비롯해 여성들이 성과 재생산 건강에 관해서 자율적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효과적인 방식을 도입해야 하고, 이 분야와 관련해 여성들이 증거에 기반하고 편견이 배제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현실에서, 당사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이 결정하거나, 시술의 내용과 결과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낙태나 불임 시술을 자행하여 여성의 재생산 건강권을 침해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정부 당국은 비국가 행위자를 포함해 다른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불간섭 원칙을 보장해야 하고 여성들의 성과 재생산 건강에 관련해서 장애여성을 비롯한 여성의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성과 재생산 건강에 대한 접근성에 기반한 인권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관련해서 하는 결정은 개인적인 영역이라는 점을 인식한다. 그리고 임신 중지 서비스를 비롯한 성과 재생산 의료 서비스와 관련된 정책과 법 제정의 핵심에 여성의 자율성을 놓는다. 정부 당국은 장애여성을 비롯해 여성들이 성과 재생산 건강에 관해서 자율적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효과적인 방식을 도입해야 하고, 이 분야와 관련해 여성들이 증거에 기반하고 편견이 배제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모든 결정은 자유롭게 이뤄져야 하며, 장애여성을 비롯한 모든 여성들이 강제적인 낙태와 피임, 그들의 의지에 반해서 이뤄지거나 설명 동의없이 이뤄지는 불임 시술을 당하지 않게 보호해야 한다.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임신 중지를 진행했다고 낙인을 받아서도 안 되고, 그들의 의지에 반해서 이뤄지거나 정보에 근거한 동의 없이 이뤄지는 낙태나 불임 시술을 강요 받아서도 안 된다.

한국의 법률에도 의사결정권의 보장과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를 선언한 규정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인은 자신의 생활 전반에 관하여 자신의 의사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 “장애인은 장애인 아닌 사람과 동등한 선택권을 보장받기 위하여 필요한 서비스와 정보를 제공 받을 권리를 가진다.”(제7조)거 규정합니다.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발달장애인권리보장법’)도 “발달장애인은 자신의 주거지의 결정, 의료행위에 대한 동의나 거부, 타인과의 교류, 복지서비스의 이용 여부와 서비스 종류의 선택 등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규정을 두어 자기결정권을 확인합니다(제8조 제1항). 특히 발달장애인은 의사결정능력을 의심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누구든지 발달장애인에게 의사결정이 필요한 사항과 관련하여 충분한 정보와 의사결정에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지 아니하고 그의 의사결정능력을 판단하여서는 아니 된다.”(제8조 제2항)는 규정도 두고 있습니다. 다만 발달장애인이 스스로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충분하지 아니하다고 판단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보호자가 발달장애인의 의사결정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보호자는 발달장애인 당사자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제8조 제3항)

그러나 성과 재생산 권리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구체적인 영역에서는, 위 원칙을 실현할 수 있는 절차 규정이나 가이드라인이 부재하고, 심지어 위 규정들과 상충되는 규정들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특히 한국의 법률은 의사결정과정을 지원하는 절차를 두기보다는, ‘보호자’가 의사결정을 대신하도록 규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모자보건법은 ‘본인이나 배우자가 심신장애로 인공임신중절수술의 의사표시를 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친권자나 후견인의 동의로, 후견인이 없을 때에는 부양의무자의 동의로 각각 그 동의를 갈음할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제14조 제3항). ‘의사표시를 할 수 없을 때’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 본인이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공임신중절수술을 대신 동의해야 할 상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아무 기준이 없습니다. 사실상 장애인의 친권자나 후견인, 부양의무자가 일방적으로 인공임신중절을 결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신상에 관한 결정임에도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기도 합니다. 정신적 장애가 있어서 후견인(성년후견인)이 선임되어 있다면, 성인이라 하더라도 혼자서 약혼이나 혼인을 할 수 없고, 후견인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민법 제802조, 제808조 제2항). 동의 없이 혼인하였다면 후견인이 법원에 그 취소를 청구할 수도 있습니다(민법 제817조). 입양을 할 때도 원칙적으로 후견인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민법 제873조 제1항).

그렇다면, 적절한 정보의 제공과 의사결정의 지원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선 정신적 장애인을 중심으로 생각해본다면, 영국의 의사능력법(Mental Capacity Act 2005)과 그 가이드라인이 대안을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의사능력법은 “절대적 자기결정 영역”을 다음과 같이 명시합니다(Section 27). 한국 민법이 피성년후견인의 혼인, 입양에 대하여 후견인의 동의를 요건으로 둔 것과 대조적입니다. [Department of Constitutional Affairs (2007) Mental Capacity Act 2005: Code of Practice, London: TSO. 이하는 김은정님의 번역문을 인용하였습니다.]

절대적 자기결정 영역

가. 혼인, 동성간 결합에 대한 동의 (2013년 동성혼 허용)

나. 성행위에 대한 동의

다. 2년간의 별거를 이유로 한 이혼 선언, 동성간 결합의 해소에 대한 동의

라. 부모의 자녀 입양동의

마. 자녀의 재산과 관련 없는 사안에서 부모로서의 책임면제

바. 인간수정 및 배아발생에 관한 법률에 따른 동의

의사능력법은 다섯 가지 원칙을 세워두었습니다(Section 1). “모든 사람은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확고한 입증이 없는 한 능력이 있다고 추정”하며, “본인이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모든 실제적인 지원이 성공하지 못한 경우에만” 의사결정이 어려운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단지 현명하지 않은 결정을 한다고 해서 의사결정이 안 된다고 간주하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도 있습니다. [이하는 오호철(2015), 「장애인권리협약에 따른 성년후견제도의 의사결정지원 고찰- 영국의 Mental Capacity Act 2005를 중심으로-」142면을 참조, 일부 단어를 수정하여 인용하였습니다.]

5대원칙

1. 의사결정능력존재의 추정 : 모든 사람은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확고한 입증이 없는 한 능력이 있다고 추정해야 한다.
2. 자기결정지원 : 본인이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모든 실제적인 지원이 성공하지 못한 경우에만 그 사람은 의사결정이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3. 본인의 의사능력 존중 : 단지 현명하지 않은 결정을 한다고 하는 이유에 의하여 의사결정이 안 된다고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4. 최선의 이익 : 본법 하에서 능력을 결여한 자를 위한 행동, 혹은 결정이 내려질 때는 본인의 최선의 이익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필요최소한의 개입 : 행동이나 결정이 되기 전에 본인의 권리나 행동의 자유제한이 더 작은 방법으로 목적을 효과적으로 이룰 수 없는가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본인이 의사결정을 할 때 제공되어야 할 ‘실제적인 지원’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의사능력법 가이드라인에서 구체적으로 정리합니다. 적절한 방법의 의사소통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여야 하는데, 당사자를 잘 아는 사람이 쉬운 표현과 사진, 물품을 이용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설명합니다. 당사자가 이해하는지 반응을 살피면서 여러 번 설명하고, 당사자가 이해하고 의사표현을 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당사자가 신뢰하는 사람의 지원을 받거나, 필요한 경우 통역의 도움을 받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본인의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는 사안은 모두 설명하되, 혼란을 일으킬 만큼 필요 이상의 상세한 설명은 하지 않습니다. 의사결정의 결과와 그 결정을 하지 않는 경우의 결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하여야 합니다. 의사결정능력 없음에 대한 아무런 판단 기준도 두고 있지 않으면서, 그것이 추정되면 곧바로 ‘친권자’나 ‘후견인’이 대신 결정하도록 규정하는 한국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Department of Constitutional Affairs (2007) Mental Capacity Act 2005: Code of Practice, London: TSO. 이하는 김은정님의 번역문을 인용하였습니다.]

지원의 종류와 형태

가. 필요한 정보제공

나. 적절한 방법의 의사소통 : 잘 아는 사람, 단순한 표현, 사진, 물품 이용, 음량과 속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반응 살피며, 여러 번 설명하고 요점을 나누어. 기다림, 반복, 신뢰하는 사람으로부터 지원, 문화적 윤리적 종교적 요소 인식, 전문 통역필요 고려

다. 본인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지침

1)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본인의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는 사안은 모두 설명

2) 혼란을 일으키는 필요이상의 상세한 것 설명하지 않음.

3) 의사결정의 결과와 의사결정하지않는 경우 결과에 대해 설명.

4) 가까운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 설명. 지원사 포함.

5) 다른 방향으로부터 조언이 필요한 경우. (전문가, 친구 등)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결정 이후, 임신중지와 관련하여 필요한 정보를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장은 모자보건법의 개정 과정에서, 그리고 길게는 모든 성 재생산 건강 권리 보장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정보 제공 및 자율적 의사결정의 원칙과 절차는 더 세심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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