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06월이제 처벌 반대를 넘어 세상을 바꿀 때가 왔다.-‘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 제안에 부쳐

나영

[기획의 글]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관련법의 개정 시한으로 제시했던 2020년 12월 31일이 이제 6개월 남았습니다. 2012년 당시의 결정과는 다르게 2019년 헌법재판소 결정문이 보여준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면 국가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해 온 ‘낙태죄’의 역사가 바로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의 침해이며, 따라서 국가가 사회경제적, 의료적 보장을 통해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여전히 개정 입법에 관한 논의는 형법과 모자보건법의 수준에서 다시 “어디까지를 허용하고, 어디서부터 처벌할지”의 차원으로만 반복되어 왔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수준의 논의를 넘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한 때는 ‘가족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이제는 다시 ‘저출산 위기 대응’이라는 명목으로 국가의 목적에 따라 인구를 관리하고 개인의 성과 재생산 권리를 침해해 온 시대를 이제 끝내야 합니다.
그래서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는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을 마련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차별이나 폭력, 낙인과 강요 없이 자신의 몸과 건강, 성관계, 파트너십과 가족구성,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에 관한 결정권을 보장받고,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언어, 장애, 국적 등에 관계없이 이에 필요한 자원과 교육, 의료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받으며, 일터와 교육기관, 여러 시설 등에서 또한 이러한 권리들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사회의 여러 기관들이 이를 적극적이고 실질적으로 실행하도록 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을 제안합니다.
7월 중순, 이 법안의 첫 공개를 앞두고 이번 이슈페이퍼에서는 <성·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의 필요성과 의미, 이 법이 변화시킬 우리의 삶에 대해 소개하는 글 네 편을 싣습니다. 곧 공개될 법안에 여러분도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고 함께 힘을 모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처벌도 허락도 거부한다”

“우리의 임신중지를 지지하라”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낙태죄’ 폐지와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를 요구하며 외쳐온 구호들이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의 죄’를 규정한 형법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제시했던 개정 입법 시한을 6개월 앞둔 지금, 누군가는 “언제까지 전면 비범죄화만 주장할 것이냐, 이제는 현실적으로 적절한 타협안도 필요한 것 아니냐”고 이야기한다. 또 누군가는 “이대로만 버티면 형법상의 처벌 조항은 없어지는 것이니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도 이야기한다. 그러나 처벌을 받지 않는 것으로 권리를 보장받았다 말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적절히 타협한다면 과연 그 현실은 누구의 현실이 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임신을 하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리는 현실에서 임신중지를 하게 되는 것은 선택이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2012년 11월 임신 23주차에 어렵게 찾아간 병원에서 임신중지 시술을 받던 청소년을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은 단지 ‘낙태죄’의 처벌 조항만이 아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임신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청소년이라는 위치, 성관계에서부터 임신중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을 혼자서 고민하고 감당하게 만들었던 파트너와의 불평등한 관계, 여성에게만 남겨지는 사회적 낙인, 돈을 받고 시술을 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담당 의사와, 임신중지를 다른 의료 행위처럼 환자의 시술 전후 건강과 삶의 질까지 고려하는 책임감 있는 행위로서 교육하고 실행하지 않게 만들어 온 보건의료 현실, 모두에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평등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가 고려되기 보다는 국가, 가족, 학교, 일터, 시설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임신을 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임신을 못 하는 것이 큰 일이 되어버리는 현실에서 동의와 존중은 그저 개인의 배려나 역량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협소한 의미로만 남을 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피해를 통해서야 권리를 인정받게 되는 일에만 너무 익숙해져 왔다. 그래서 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먼저 피해를 입증해야 했다. 흔히 말하는 ‘현실적 타협안’으로 임신 초기에는 누구나 임신중지가 가능하고 중기 또는 후기에는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등 특정한 사유에만 임신중지가 가능하게 된다고 생각해보자. 여전히 성폭력으로 인한 피해를 입증해야만 정당한 임신중지임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현실은 변하지 않거니와, 성폭력 피해자는 임신중지를 하는 것만이 당연하다는 인식 속에서 피해자가 자신의 삶을 계획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의 가능성은 쉽게 삭제되고 만다. 우리는 성폭력으로 인한 피해의 인정과 별개로 당사자가 출산 여부를 결정하고 이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임신중지를 하게 되는 상황도, 임신 유지를 결정하는 상황도 처벌은 물론 정당함을 인정받고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행위일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의 권리를 말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실함의 척도를 따져서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면 허락해 주겠다는 국가와 사회의 알량한 아량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든 강요나 폭력 없이 자신의 삶의 조건을 계획할 수 있도록 사회의 불평등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고, 국가와 사회 혹은 누군가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만이 삶의 형태를 결정짓는 조건이 되지 않도록 만들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모두에게 편견 없고 정확한 정보와 교육을 제공하고, 낙인이나 차별 없이 누구나 찾아가서 어려움 없이 의료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안전한 보건의료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임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형법에서 ‘낙태의 죄’를 삭제하고 임신중지를 전면 비범죄화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성관계, 임신, 임신중지, 출산 등 전 과정에 걸친 우리의 권리와 몸에 대한 권리를 명시하고 교육, 노동, 의료, 사회복지 등 전 영역에서 이를 보장해야 할 국가의 책임을 확인하는 기본법을 요구한다.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의 ‘성과 재생산 권리’이며, 성과 재생산 권리는 곧 삶에 대한 권리이다. 우리가 만들고 요구할 이 법의 이름은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이다.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은 평등과 차별금지의 원칙을 담는다. 차별이나 낙인, 폭력의 피해를 당하지 않을 권리, 피해를 보상받을 권리를 넘어 서로를 존중하고 존중 받는 관계 속에서 적극적으로 성적 즐거움을 추구할 권리를 명시한다. 성별, 나이, 장애, 질병, 성별정체성, 성적지향, 거주 지역, 소득 수준, 이주 지위 등이 권리를 제약하는 조건이 되지 않도록, 법을 통한 권리의 명시나 법적 보장 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 문화를 실질적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이 법을 제안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불임시술이나 임신중지를 강요받지 않는 사회, 이주 여성이 한국인 남성과의 결혼과 출산을 통해서만 자신의 삶의 조건을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 학교와 가정, 일터에서 쫓겨날까봐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회, HIV 감염인과 난민이 동등한 사회적 권리와 성적권리, 건강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사회, 난임에 대한 책임과 지원이 여성에게만 집중되지 않는 사회, 안정적인 노동과 주거를 보장받을 권리가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과 반드시 연결되어야 함을 잘 알고 실현하는 사회로의 첫걸음을 이제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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