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몸=국가의 몸?···공적 정보·유산유도제 없이는 안전도 없다

2023-03-10

② 입법 공백이라는 핑계

출산 억제 땐 ‘관대’ 장려 땐 ‘불법’

국가 필요 따라 ‘임신중지’ 이용돼

보건 의료 서비스로 자리 못 잡아

정부, 낙태죄 폐지 4년간 대책 ‘0’

유산유도제 도입, 청원에도 미적

권인숙 의원 “건강권 보장 조치 조속히 이뤄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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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지에 대한 국가의 입장은 필요에 따라 계속 변했다. 1990년대 들어 인구가 급격히 줄기 시작하자 2005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만들어졌다. 2010년엔 낙태죄로 고발되는 의사들이 줄을 이었다. 저출산 타개책으로 ‘생명 존중(낙태 방지) 분위기 조성’을 내세운 정부의 기조와 맞물린 것이었다. 병원들은 위험 부담을 이유로 시술비를 올렸다. 시술을 제공하는 병원도 줄었다. 2016년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는 출산율 제고 방안의 하나로 ‘대한민국 출산지도’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시·군·구별 가임기 여성 수, 합계 출산율, 출생아 수 등이 나오는 지도였다. 곧바로 ‘국가가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만 본다’는 비판이 일었다. 홈페이지는 하루 만에 폐쇄됐다.

필요에 따라 임신과 출산을 이용해 온 국가 아래 임신중지는 공적 의료서비스로 자리잡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국가는 출산 억제 시기에는 낙태죄를 ‘관대하게’ 다뤘고, 출산 장려 시기에는 임신중지의 불법성을 강조했다.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고, 관련 후속입법이 이뤄지지 않은 ‘무법’ 상태인 지금은 어떨까. 국가는 입법 공백을 핑계로 해야 할 일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건강권에 개입하고 있다.


문보라 간호사(오른쪽)가 지난달 13일 서울 동작구 색다른의원 접수 창구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문보라 간호사(오른쪽)가 지난달 13일 서울 동작구 색다른의원 접수 창구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 서성일 선임기자


여성임을 인증해야 가입할 수 있는 한 임신중지 정보 애플리케이션에는 익명으로 임신중지 병원과 가격 정보 공유를 요청하는 글들이 하루에도 수 건씩 올라온다. 시술을 마친 이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 장문의 후기를 남기기도 한다. 임신중지가 의료 체계에 들어와 있다면 모두 공적으로 안내되어야 할 정보들이다.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런 공간이 ‘커뮤니티’의 역할을 한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잘못된 정보나 병원 광고에 활용될 가능성 등 우려도 남는다.

공적 정보의 부재는 임신중지 당사자들의 주체성도 떨어뜨린다. 색다른의원에서 일하는 문보라 간호사는 임신중지 문의를 하는 이들이 “정말로 질문이 없다”고 말했다. “의료진이 제공하는 정보를 듣고, 대답만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어떻게 하겠다’ 같은 말도 없어요. 어떻게든 해결은 해야 하는데, 단순히 ‘임신이면 수술하겠다’ 정도까지만 생각하고 오시는 것 같아요.” 나영 셰어(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대표는 “병원마다 서로 다른 정보, 예컨대 ‘제3자 동의가 꼭 필요하다’ 는 식의 말을 해 혼선을 주는 경우도 많다. 한 병원에서 잘못된 정보를 얻으면 그 다음 병원을 찾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며 “해외의 경우 낙태죄 폐지 후 정보 체계를 제일 먼저 신경써서 구축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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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새롬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교수는 “불법 판매상들은 규제하면서 의약품 승인 허가는 안 해주잖아요. 기술이 존재하는데 한국에서 못 쓰는 건 진짜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독감 유행 시기에 타미플루 구하려고 엄청 노력했잖아요. 정부가 보기에 국민 건강에 중요하면 그렇게까지도 하는 거죠. 코로나 백신이나 관련 의약품은 3주 안에 승인 절차를 밟겠다고 홍보도 했어요. 그런데 미프진 도입하라고 국민 청원까지 했는데도 이러는 건 임신중지와 관련해 적극적 행정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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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권의 관점에서 임신중지와 관련한 정보 체계를 갖추는 것, 유산유도제를 도입하는 것은 관련 법 개정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일까. 꼭 그렇진 않다. 나영 대표는 “입법이 된다면 체계를 더 빠르게 갖출 수도 있겠지만, 입법이 안 됐다고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시스템 구축 과정에서 입법에 필요한 내용을 찾아내는 작업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고 했다. 


(전문읽기) https://www.khan.co.kr/national/health-welfare/article/2023031006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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