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트랜스젠더 누구나”…‘색다른 환자’도 차별없는 병원

2022-10-15

[한겨레] “임신중지·트랜스젠더 누구나”…‘색다른 환자’도 차별없는 병원

산부인과. 명칭부터 논란이다. 임산부와 기혼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의료기관이라는 편견과 착시를 심어주기 때문이다. 2019년 11월 산부인과를 여성의학과로 바꾸자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와 4만2468명의 동의를 받았다. 2020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산부인과’를 ‘여성의학과’로 변경하는 내용의 의료법 일부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지난해 말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도 산부인과를 여성건강의학과로 명칭을 바꿔 의료접근권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간판에 아예 산부인과라고 밝히지 않았어요. ‘여성의학과’로 했을 때도 ‘여성’이란 단어 때문에 병원 접근이 어려워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최예훈(47·산부인과 전문의) 색다른의원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서울 동작구 장승배기로에 자리 잡은 이곳은 ‘국내 최초 성·재생산 건강 전문의원’을 표방한다. 아이를 낳을 목적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산부인과라기보다 훨씬 더 폭넓은 환자들의 선택과 의지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병원이다. 약 165㎡(50여평)의 크기에 진료실, 상담실, 처치실, ‘남·여’로 구분하지 않는 ‘성중립 화장실’과 장애인 화장실이 있다.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도록 복도를 넓혔고 경사로도 만들었다. 연노랑 천장에 아늑하고 포근한 실내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굴욕 의자’로 흔히 불리는 산부인과 의자에 앉은 환자에게 간호사는 폭신한 인형을 안겨주며 긴장을 풀도록 한다. 무엇보다 이 병원은 지정된 성별이나 장애에 상관없이 검진과 상세한 상담,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는 ‘차별 없는 병원’이다. 초기 임신중지, 월경 관련 생애주기적 상담과 관리, 갱년기 상담과 관리, 트랜스젠더 호르몬 치료 등 편견이나 낙인 없이 누구나 편하게 찾는 병원을 지향한다. 자세한 상담은 특히 환자의 불안을 잠재운다. 의료계의 관행이라는 ‘3분 진료’는커녕, 초진의 경우 상담 시간 30분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최 원장은 2017년 ‘서울시립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봄’에서 근무했고 2018년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에서 4년 동안 일했다. 페미니스트 의료인으로서 꾸준히 실천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기획운영위원 활동을 하면서 의료실천을 해온 최 원장을 11일 오전 동작구 색다른의원에서 만났다.

―초진 문진표가 다른 병원보다 상세하고 친절하네요.

“흔히 산부인과에서 그냥 성경험 유무를 묻잖아요. 그간의 경험과 외국 사례를 참조해서 저희는 조금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려 노력했습니다. 질경이나 초음파같이 질내 삽입되는 기구를 사용하기 위한 질문이라는 것을 먼저 밝히고 탐폰, 생리컵, 성기, 손가락 등 삽입의 경험이 있는지를 묻는 식으로요. 트랜지션 호르몬 치료로 오시는 분들 경우엔 지원이 필요한 때 가능한 방법을 상담하기 위해 개인적 상황을 상세히 질문하고 선택적으로 답할 수 있게 했습니다. 혈연과 혼인만을 전제로 하는 ‘가족’ 개념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가족관계를 묻는 대신 동거인이나 비상시 연락할 사람을 묻는 식으로 문진표를 바꾸었습니다.”

트랜지션과 호르몬 치료 관련 초진 문진표를 보면, 주민등록상 이름뿐만 아니라 병원에서 다르게 불리기 원하는 경우의 이름, 트랜지션(정신과 상담, 호르몬 치료, 수술 포함) 경험, 성적 지향, ‘스스로를 가장 잘 표현하는 성별’로서 남녀뿐만 아니라 논바이너리, 트랜스여성, 트랜스남성, 기타 정체화하는 성별 등을 포함해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흔히 유방절제술을 ‘탑 수술’로, 자궁절제술을 ‘바텀 수술’이라 부르는데, 의료진과 상담할 때 그렇게 일컫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뜻을 밝힐 수도 있다.

색다른의원은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의 연계 병원이다. 이 단체는 ‘누구도 차별받거나 배제되지 않고, 자유롭고 건강하게 성과 재생산의 권리를 누리며, 충분한 정보와 평등한 자원을 바탕으로 서로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사회’를 꿈꾸며 활동한다. 최 원장의 개인 의원이긴 하지만 페미니스트 의료 운동과 실천의 고민 끝에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만든 병원인 셈이다.

색다른의원은 임신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방법을 결정한 뒤 이후의 건강관리까지 함께한다. 낙태죄는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임신중지는 더 이상 불법이 아니게 됐다. 하지만 아이를 낳을 때 최고의 진료서비스를 받았던 병원에서 임신을 중지할 땐 정반대로 편견과 낙인에 시달렸다는 경험담도 여전하다.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병원 찾기부터가 난관인 것이다.

―임신중지 문제를 오래 고민하셨죠?

“2015년 ‘낙태죄’라는 단어만을 보고 우연히 ‘장애/여성 재생산권 새로운 패러다임 만들기’ 연속포럼에 참여하게 되면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낙태죄 폐지 운동에 함께했던 활동가들이고 ‘셰어’의 활동으로 이어진 거죠. 의사로서 트레이닝을 받은 뒤 현장에서 반복되는 일을 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때 페미니즘 공부를 하게 되었고 의료인으로서 고민을 깊게 하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은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전과 후로 나뉘어요.”

―수련 과정과 의료 현장은 많이 다르겠죠?

“사실 헌법재판소 결정 이전부터 많은 산부인과에서 임신중지를 해왔습니다. 의사도 트레이닝 과정에서 이것이 생명이라는 생각을 주입받고 금기시하다가 현장에 나가면 덜컥, 이른바 ‘중절시술’을 거듭해야 해요. 그걸 하기 싫거나 (임신중지를 하려는) 환자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으로 환자를 은근히 비난하거나 묻지도 않고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기도 하고요.”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변화가 느껴지시나요?

“제일 안도가 됐던 건, 이제 죽는 사람은 안 생기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병원에서 임신중지 시술을 하다가 뇌사 상태가 되고, 사망을 하는 이유가 낙태죄가 있는 상황에서는 큰 병원에 빨리 보내지 못하기 때문이거든요. 현실적으로 낙태죄가 없어지긴 했지만 의료인들이 스스로 임신중지가 ‘의료서비스’라는 것을 각인할 때까지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아요.”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선택권’이라고 흔히 얘기하지 않나요? 일부에서는 착상된 수정란이 ‘그저 세포일 뿐’이라고도 하고요.

“저는 견해가 다른 게, 단순한 세포라고 보지는 않아요. 다만 이것을 세포로 보느냐 생명으로 보느냐의 문제를 넘어 생각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거죠. 의료 현장 한편에서는 무감하게 ‘중절수술’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생명이 소중하다며 임신을 중지하려는 여성이 잘못됐다고 보는 건데요, 그 판단을 제가 할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죠.”

―의료인으로서 생각의 변화를 맞은 셈이네요.

“지금은 환자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는 행위 자체가 의료인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제가 의료인이고 임신중지가 의료서비스이기 때문에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지지해야 한다고, 제 안에서 이 문제를 소화하기까지 굉장히 시간이 걸렸어요. 저 역시 환자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던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다루는 산부인과 의사로서 윤리 문제도 얘기하는데요.

“사실 국가는 인구관리로써 생명을 굉장히 선별적으로 선택해왔죠. 장애인이 임신을 할 때 그 생명은 비장애인이 임신했을 때와 다르게 인식돼요. 청소년이 임신을 하면, 그 전에 문란한 성행위가 있었다고 연상합니다. 특정 여성이 임신한 특정 생명에만 가치를 두는 거죠. 그런 가치판단을 국가나 의료인이 대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엄청난 오만이라 생각합니다. 그 바탕에는 ‘여성’에 대한 신뢰 없음이 깔려 있는 것이고요.”

―지금도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유산유도제를 승인하지 않아 인터넷에서 높은 가격에 밀거래되는 일이 많아서 국정감사에서도 지적이 나왔는데요.

“예를 들어 미소프로스톨의 경우엔 자궁을 수축시켜 유산을 유도하는 제제로서 자연유산에도 국내에서 오래전부터 사용을 해왔어요. 그런데 이 약물조차 지금 승인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프지미소(미프진)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1년 넘게 허가 심사를 보류하고 있고요. 미페프리스톤은 프로게스테론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부작용이 크지 않아요. 이런 유산유도제들이 카톡 같은 데서 은밀히 유통되는데, 보관이 어땠는지, 어떤 유통경로로 들어왔는지를 모르고 그냥 먹는 거예요.”

―안전한 사용이 안 되는 거군요.

“지금은 얼마든지 병원에서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가 있거나 청소년이거나 사회적 낙인을 받는 사람들이 병원을 찾지 못해 이런 경로를 찾는 거죠. 결국 의료체계를 개선해야 하는 문제예요.”

―낙태죄 폐지 이후 법적 공백이 현장에 혼란을 준다는 지적도 합니다.

“2020년에도 정부가 후속 조처로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면서 임신 14주까지 임신중지가 가능하도록 제한해서 논란이 됐죠. 지금은 법적으로 몇주까지 임신중지를 허용하고 말고 논쟁할 타이밍이 아니라 건강보험에 임신중지를 포함시키는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그렇게 해야 불평등한 의료 격차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줄어듭니다. 낙태죄가 있었을 때도 누가 위험한 임신중지를 하고 죽음까지 가느냐 생각해보면, 청소년이나 어려운 처지의 외국인 여성 같은 사회적 소수자나, 사회적으로 임신을 허용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거든요. 재생산 정의와 관련된 문제인 거죠.”

이곳에서는 트랜지션의 경우 ‘여성화 호르몬 치료’와 ‘남성화 호르몬 치료’에 관한 비용과 부작용 등 자세한 안내문을 제공한다. 호르몬 치료의 시간에 따른 기대효과, 치료에 의해 영구적으로 생기는 변화, 성생활 변화, 위험성, 장기적인 건강관리를 상담하고 안내하는 것이다. 호르몬 치료를 통해 얻는 전반적인 이득이 위험성보다 더 크다고 환자 스스로 판단했을 때 치료를 시작한다.

또 환자를 상담하고 교육하며 긴밀히 소통하는 간호사의 역할을 중시한다. 사회적 소수자인 환자의 인권이나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 최 원장과 문보라(41)·이혜림(36) 간호사는 개원 전부터 함께 세미나를 했다. 임신중지와 성교육 그리고 트랜지션 호르몬 치료에 대한 집중적인 공부를 해온 것이다. 문보라 간호사는 ‘서울시립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봄’에서, 이혜림 간호사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서 근무하면서 최 원장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다. 이혜림 간호사는 “에티오피아에서 해외봉사단 코이카 활동을 통해 현지 의료인, 지역주민과 교감하는 경험을 하고 돌아와 한국 의료 현장에서도 간호사로서 주체적이고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없는지 고민했다”고 색다른의원에 합류한 계기를 설명했다. 역시 코이카 활동 경력이 있는 문보라 간호사는 “병원을 찾는 분들이 차별이나 불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걱정 없이 편안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며 “누구라도 몸에 관한 궁금증이나 질병 증상이 있을 땐 인터넷으로 검색하기보다 주저없이 병원을 방문해 전문 의료진과 적절히 상의를 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전문 보기) https://naver.me/5MCX3B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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