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구조적인 젠더폭력으로 인한 죽음을 더이상 방치하지 말라.
사법적 대응을 넘어 성적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를 원한다.
-신당역 스토킹 살해 사건에 부쳐
지난 14일, 수 년에 걸쳐 스토킹 가해를 저질러 온 남성이 신당역에서 근무하던 여성 노동자를 살해했다. 피해자는 오랜 고통 끝에 경찰에 스토킹 피해와 불법촬영, 유포협박 건으로 가해자를 고소했으나 고소 이후에도 가해자는 계속해서 피해자를 스토킹하였다. 이후 피해자에게 계속해서 심각한 추가 범죄가 이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도주의 우려가 없다’며 구속수사 요청을 기각했고, 결국 가해자는 재판 선고일 하루 전에 살인을 저질렀다. 지난 일주일 간 추모와 규탄의 행동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하루하루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소식들을 보며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개탄스런 마음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스토킹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와 법 개정의 필요성이 요구되었고, 불법촬영 및 유포 협박의 심각성을 고발하며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와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했음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한 데 대해 정부와 정치권, 사법·수사당국의 대책 논의가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에 가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명백히 성적불평등으로 인해 발생한 젠더폭력 사건이다.
사건 이후 가장 공분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번 사건을 두고 근본적인 성찰과 예방·대응 체계 마련에 나서야 할 책임을 지닌 정부 기관의 장관과 정치인들이 정부와 여당에 미칠 정치적 비난의 여파만 신경쓰며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등 매우 심각한 수준의 인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건을 여성혐오라고 규정한 것은 현상에 대한 오독”이라는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의 발언이나, 여성에 대한 폭력에 구조적 원인이 있냐는 질문에 "젠더갈등으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한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의 발언,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 폭력적인 대응을 한 것 같다”며 가해자에 대해 "교통공사에 들어가기 위해 취업 준비를 열심히 했을 서울시민 청년이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현한 이상훈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의원의 발언 등이 모두 이러한 인식과 태도를 드러냈다.
이들의 발언과는 달리,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의 성적불평등이 여전히 심각한 상황에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젠더폭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젠더’는 ‘성별’과 동의어가 아니며, 한 사회에서 개인에 대한 규범이나 관계 방식, 기대하는 역할, 가치체계 등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부여되는 체계가 구조화 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건이 ‘젠더폭력’인 이유는 단지 피해자가 여성이기 때문이거나,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간 갈등으로 인해 벌어진 문제여서가 아니라, 사건의 발생부터 대응, 사건 이후의 반응까지 모든 과정이 우리 사회의 젠더에 따른 차별적 위계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가해자가 피해자를 불법촬영한 영상을 협박의 빌미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여성인 피해자의 사회적 관계를 어렵게 만들어 결국 자신의 요구를 듣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피해자의 신고 후에도 피해자는 가해자의 행동보다 피해자의 행실이나 신고 의도를 의심하는 주변인들의 인식을 걱정해야 했다는 점 등은 가해자가 젠더 위계를 이용하여 가해 행위를 저지르는 데에 중요한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9월 6일 발표된 ‘2022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서 나타난 지표만 보아도 스토킹 검거 건수 481건 중 남성이 가해자인 경우는 393건으로 전체 사건의 82%에 달한다. 가해자가 남성일 때 스토킹 행위를 남성의 적극적인 구애 행동 정도로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 고용 관계나 사회적 관계, 경제적 자원 등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 피해자들의 상황, 수사기관이나 사법기관에 문제를 제기해도 피해자를 먼저 의심하거나 가해자의 사회적 위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사건 신고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절차를 추진하지 않거나 구속을 미루는 관행 등은 이러한 젠더폭력의 양상을 강화해 왔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을 두고 굳이 구조적 원인에 대한 문제제기를 소거하고, 가해자 개인의 문제나 범죄 대응책의 문제로서만 해결하려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사건을 반복하게 만드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피해자 지원, 처벌 강화만이 아니라 성적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할 조건을 마련하라.
사건 이후 ‘반의사불벌죄’ 조항의 폐지나, 검·경의 ‘스토킹 범죄 대응 협의회’ 개최, 피해자 보호와 지원에 관한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응책들은 모두 사후적 대처에 불과하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가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기울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디서도 적극적인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의 구조적 원인에 젠더 불평등과 성적권리에 대한 불평등의 조건이 놓여있음에도 당장의 가시적인 대응책만을 내세우며 구조적 원인은 또다시 외면하려고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피해를 당하지 않을 권리’, ‘가해자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죽음을 피할 권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두려움 없이 자신의 성적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원한다. 누구든 자신의 성별이나 성적정체성, 신체적 조건, 사회경제적 여건 등에 의해 부당한 피해와 폭력을 겪지 않을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는 평등의 조건이 먼저 보장되어야 한다. 직장 내에서의 성차별적 근무 환경과 위계를 바꾸고 노동환경을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을 적극적으로 강구해야 하며, 관계 교육과 성 인식에 대한 교육을 중심으로 한 포괄적 성교육을 교육 기관 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자신의 성적 욕망이나 욕구를 표현하는 것과 이를 강요하는 폭력을 구분하지 않고, 성별에 따라 그 행위의 위계를 차별적으로 평가하는 인식과 관행을 공공기관과 수사·사법기관부터 바꿔나가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범죄 대응책에 대한 요구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평등한 성적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방향을 강구하며 계속해서 요구해 나갈 것이다. 피해자가 겪은 부당한 폭력에 분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이를 우리의 책임으로 가지고 나갈 것이다.
2022년 9월 22일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성명]
구조적인 젠더폭력으로 인한 죽음을 더이상 방치하지 말라.
사법적 대응을 넘어 성적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를 원한다.
-신당역 스토킹 살해 사건에 부쳐
지난 14일, 수 년에 걸쳐 스토킹 가해를 저질러 온 남성이 신당역에서 근무하던 여성 노동자를 살해했다. 피해자는 오랜 고통 끝에 경찰에 스토킹 피해와 불법촬영, 유포협박 건으로 가해자를 고소했으나 고소 이후에도 가해자는 계속해서 피해자를 스토킹하였다. 이후 피해자에게 계속해서 심각한 추가 범죄가 이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은 ‘도주의 우려가 없다’며 구속수사 요청을 기각했고, 결국 가해자는 재판 선고일 하루 전에 살인을 저질렀다. 지난 일주일 간 추모와 규탄의 행동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하루하루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소식들을 보며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개탄스런 마음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스토킹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와 법 개정의 필요성이 요구되었고, 불법촬영 및 유포 협박의 심각성을 고발하며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와 근본적인 대책을 요구했음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한 데 대해 정부와 정치권, 사법·수사당국의 대책 논의가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에 가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명백히 성적불평등으로 인해 발생한 젠더폭력 사건이다.
사건 이후 가장 공분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번 사건을 두고 근본적인 성찰과 예방·대응 체계 마련에 나서야 할 책임을 지닌 정부 기관의 장관과 정치인들이 정부와 여당에 미칠 정치적 비난의 여파만 신경쓰며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등 매우 심각한 수준의 인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건을 여성혐오라고 규정한 것은 현상에 대한 오독”이라는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의 발언이나, 여성에 대한 폭력에 구조적 원인이 있냐는 질문에 "젠더갈등으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한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의 발언,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 폭력적인 대응을 한 것 같다”며 가해자에 대해 "교통공사에 들어가기 위해 취업 준비를 열심히 했을 서울시민 청년이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현한 이상훈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의원의 발언 등이 모두 이러한 인식과 태도를 드러냈다.
이들의 발언과는 달리,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의 성적불평등이 여전히 심각한 상황에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젠더폭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젠더’는 ‘성별’과 동의어가 아니며, 한 사회에서 개인에 대한 규범이나 관계 방식, 기대하는 역할, 가치체계 등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부여되는 체계가 구조화 되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건이 ‘젠더폭력’인 이유는 단지 피해자가 여성이기 때문이거나,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 간 갈등으로 인해 벌어진 문제여서가 아니라, 사건의 발생부터 대응, 사건 이후의 반응까지 모든 과정이 우리 사회의 젠더에 따른 차별적 위계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가해자가 피해자를 불법촬영한 영상을 협박의 빌미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여성인 피해자의 사회적 관계를 어렵게 만들어 결국 자신의 요구를 듣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 피해자의 신고 후에도 피해자는 가해자의 행동보다 피해자의 행실이나 신고 의도를 의심하는 주변인들의 인식을 걱정해야 했다는 점 등은 가해자가 젠더 위계를 이용하여 가해 행위를 저지르는 데에 중요한 구조적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9월 6일 발표된 ‘2022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서 나타난 지표만 보아도 스토킹 검거 건수 481건 중 남성이 가해자인 경우는 393건으로 전체 사건의 82%에 달한다. 가해자가 남성일 때 스토킹 행위를 남성의 적극적인 구애 행동 정도로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 고용 관계나 사회적 관계, 경제적 자원 등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 피해자들의 상황, 수사기관이나 사법기관에 문제를 제기해도 피해자를 먼저 의심하거나 가해자의 사회적 위치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사건 신고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절차를 추진하지 않거나 구속을 미루는 관행 등은 이러한 젠더폭력의 양상을 강화해 왔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을 두고 굳이 구조적 원인에 대한 문제제기를 소거하고, 가해자 개인의 문제나 범죄 대응책의 문제로서만 해결하려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사건을 반복하게 만드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피해자 지원, 처벌 강화만이 아니라 성적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할 조건을 마련하라.
사건 이후 ‘반의사불벌죄’ 조항의 폐지나, 검·경의 ‘스토킹 범죄 대응 협의회’ 개최, 피해자 보호와 지원에 관한 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응책들은 모두 사후적 대처에 불과하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가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어떻게 기울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디서도 적극적인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의 구조적 원인에 젠더 불평등과 성적권리에 대한 불평등의 조건이 놓여있음에도 당장의 가시적인 대응책만을 내세우며 구조적 원인은 또다시 외면하려고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피해를 당하지 않을 권리’, ‘가해자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죽음을 피할 권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두려움 없이 자신의 성적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원한다. 누구든 자신의 성별이나 성적정체성, 신체적 조건, 사회경제적 여건 등에 의해 부당한 피해와 폭력을 겪지 않을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는 평등의 조건이 먼저 보장되어야 한다. 직장 내에서의 성차별적 근무 환경과 위계를 바꾸고 노동환경을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을 적극적으로 강구해야 하며, 관계 교육과 성 인식에 대한 교육을 중심으로 한 포괄적 성교육을 교육 기관 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자신의 성적 욕망이나 욕구를 표현하는 것과 이를 강요하는 폭력을 구분하지 않고, 성별에 따라 그 행위의 위계를 차별적으로 평가하는 인식과 관행을 공공기관과 수사·사법기관부터 바꿔나가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범죄 대응책에 대한 요구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평등한 성적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방향을 강구하며 계속해서 요구해 나갈 것이다. 피해자가 겪은 부당한 폭력에 분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이를 우리의 책임으로 가지고 나갈 것이다.
2022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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