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전한 임신중지를 성교육에 담아내기
나영 curiousnyny@gmail.com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대표
👉오늘의 교육에서 전체 보기 : https://bit.ly/42suX5X
“큰 병이 아니고서야 우리는 병원에 가야 할 때 집에서, 일터에서 가까운 곳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5년 동안 제가 만났던 임신중지 당사자들은 제주에서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 강원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옵니다. 가짜 약과 브로커와 상업적 광고가 난무한 상황에서 조금 더 안전한 환경에서 임신중지를 하고자 짐을 싸고 올라옵니다.
이렇게 어렵게 만난 우리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고 불안합니다. 배우자와 파트너로부터의 협박 속에, 얼마나 아프든 내일 다시 일터로, 학교로, 가정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불안 속에,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채 죄책감과 자기 비난을 안고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막막함 속에 있습니다. 의료진으로서,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와닿지 않을 위로를 하며 누군가 병원으로 해코지를 하러 오지는 않을지, 혹은 병원 내에서의 백래시가 있지 않을지 늘 걱정합니다. 5년이 훨씬 지났지만, 나아진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당사자였던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불과 몇 달 전, 혹은 몇 주 전까지도 자신이 처하게 될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을 예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채 삶을 담보로 한 결정 앞에서 당사자는 섬처럼 고립된 채 무력해집니다. 또는 위험을 감수하며 무모해집니다. 원래 그런 사람, 그럴 것처럼 생긴 사람은 없습니다.
법과 정책이 부재한 사이, 여전히 많은 병원에서는 「모자보건법」상의 인공임신중절 허용 사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허용 사유’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아니라, 차별 그 자체입니다. 누군가는 임신을 유지하지 않아도 되고, 어떤 태아는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전혀 암묵적이지 않은 구체적인 차별입니다.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는 더 이상 국가가 처벌하거나 허용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전히 개인의 건강권, 인권의 문제로 전제되어야 합니다.”
위의 내용은 2025년 5월 22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 선거 사무실 앞에서 진행되었던 기자 회견에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으로 발언한 의사 오정원의 발언 중 일부를 옮긴 것이다. 이날 발언에서 오정원은 다양한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의 과정을 함께한 대학병원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자신은 출산을 돕는 산과의사이지만 동시에 “태아는 임신한 여성과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이며, 어떤 생명도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질 수 없다”는 국제산부인과연맹의 원칙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임신중지와 관련된 활동을 하다보면 ‘생명’에 대한 질문에 끊임없이 부딪히게 된다. 과학으로든 철학으로든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모든 유기체는 활동하는 작은 세포 하나하나를 생명의 기본 단위로 하여 구성되고 이 세포 단위에서부터 크고 작은 생명의 단위가 끊임없이 살고 죽는 과정에서 하나의 유기체와 생태계, 사회가 지속된다. 즉, 크고 작은 생명의 단위가 살고 죽으며 유기적으로 활동을 유지하는 과정이 그 자체로 생명 활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계속되는 생과 사의 과정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어떤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일 수 있다. 모든 생명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 활동을 유지하고 재생산을 할 수 있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임신은 자궁을 지닌 한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임신을 유지하고 출산을 하고 양육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회적 관계와 자원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는 기본적으로 임신을 한 당사자와 성관계를 한 상대방의 파트너십 또는 혼인 여부, 관계의 성격과 상태, 건강 상태, 사회적 지위, 사회 경제적 상황, 가족과의 관계, 그리고 법과 제도, 보건의료, 사회복지 상황 등이 복잡하게 영향을 미친다. 이 중에 무언가 하나라도 어려움이 있다면 임신의 유지가 출산까지 이어지지 못 하거나, 출산을 해도 양육이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은 그대로 출산 후의 자녀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임신중지는 오직 여성과 태아, 둘 사이의 문제로만 다뤄져 왔다. 이 복잡한 관계와 자원, 사회적 영향은 마치 공백인 양 삭제되고 단지 여성 개인의 결정과 태아의 생명이라는 아주 단순한 관계만이 비난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
지금은 법적 효력을 상실한 「형법」 제27장의 ‘낙태의 죄’ 조항도 오직 여성과 이를 조력한 의료인만을 처벌했다. 심지어 「모자보건법」 제14조에서는 여성이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하기 위해서는 임신의 가장 직접적인 또 다른 당사자인 남성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남성은 이 결정에 대해 어떠한 법적인 책임도 지지 않으므로, 사실상 동의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합법 여부를 결정하는 허락의 주체인 셈이다. 남성의 이런 법적 위치는 여성들을 남성들의 요구에 취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의료인 또한 처벌의 대상이므로 의료 기관에서는 어떻게든 처벌을 피할 명분을 마련해 두기 위해 여성들에게 남성의 동의를 명시적으로 확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편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의료인들은 보다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기술과 지식, 국제 가이드 등을 제대로 배우거나 훈련받지 못해 임신중지에 관한 의료 행위 역시 더 침습적이고 접근성이 높으며 위험도가 좀 더 높은 수준에 머물게 된다. 일례로 한국의 많은 산부인과에서는 아직도 임신 12주경까지 간단하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진공흡입술 대신 자궁벽을 긁어내는 소파술을 사용하며, 이미 1988년부터 안전하게 사용되기 시작해서 지금은 세계보건기구의 필수핵심의약품이 된 유산유도제(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를 정부가 승인하지 않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ref]
미페프리스톤은 프로게스테론 호르몬의 작용을 억제하여 자궁 내막이 분리되도록 유도하는 약물이고, 미소프로스톨은 위장 질환을 위해 사용되는 약물이지만 임신 상태인 경우 자궁 수축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임신중지를 위한 유산 유도에 미소프로스톨만 단독으로 사용할 때는 84~96%의 성공률을 보이지만 임신 9주 이내에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함께 사용할 경우 95~99%의 성공률로 안전하게 유산이 이루어진다, 세계보건기구는 각국이 구비해야 할 필수핵심의약품 목록에서 유산유도를 위한 약물로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의 복합 사용을 권고한다.
(list.essentialmeds.org/medicines/242) 2025년 5월 현재 미페프리스톤은 전 세계 100개국에서 허용되어 안전하게 사용되고 있다.
(연도별 미페프리스톤 도입 국가 목록 : gynuity.org/assets/resources/mife_by_country_and_year_en.pdf) 한국에서는 2021년부터 미페프리스톤의 승인 신청이 이루어졌으나 아직까지 승인이 되지 않았으며, 미소프로스톨은 위장 질환을 위한 용도로만 승인되어 있어 산부인과에서는 오래전부터 의사의 재량권하에서 오프라벨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현재 여러 의료 기관에서 대체 약물로 메토트렉세이트를 사용하고 있다. 흔히 MTX로 불리는 이 약은 백혈병 치료에 많이 쓰이며 산부인과에서는 자궁 외 임신에 주로 사용되는 주사제이다. 현재 온라인에서 병원에서 한 임신중지 후기나 관련 정보를 찾으면 ‘주사’, ‘MTX’ 관련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MTX는 기본적으로 항암제이기 때문에 독성에 유의해야 하고, 혈액 수치를 떨어트리거나 탈모를 유발하는 등의 부작용이 있어서 임신중지를 위한 유산유도제로 권장되지 않는다. 하루빨리 보다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미페프리스톤이 승인되어서 더 이상 이 약을 임신중지 용도로 사용할 이유가 없게 되어야 한다.[/ref]
문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실제 임신의 유지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요인은 법적 처벌의 존재보다도 성관계 파트너와의 관계나 폭력 여부, 사회와 가족에서의 지위, 사회경제적 상황 등 복합적이고 실질적인 현실의 문제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처벌을 통해 임신중지를 없애거나 줄일 수 있는 법적 효과는 거의 없는 반면 처벌법으로 인한 제도와 시스템, 교육·훈련의 부재가 여성과 아동, 보건의료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더 심각하고 구체적이다. 이에 세계보건기구와 세계산부인과학회는 2022년에 각각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 즉 어떠한 제약도 없이 임신중지를 완전히 처벌 대상에서 삭제하고 건강권의 문제로 다룰 것을 권고하는 새로운 국제 가이드와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ref]
세계보건기구 2022 임신중지 가이드(srhr.org/abortioncare/#translation); 세계산부인과학회 성명, 〈세계산부인과학회는 안전한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요구한다〉, 2022년 2월.
(www.figo.org/sites/default/files/2022-04/FIGO-Statement-FIGO-Calls-Total-DecriminalisationSafe-Abortion-EN.pdf)[/ref]
다행히 한국에서는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낙태죄’의 위헌성이 확인되었고, 이후 헌법재판소의 주문에 따른 개정 입법 시한을 넘겨 2021년부터 ‘낙태죄’는 법적 효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즉 지금은 임신중지의 사유나 시기 등에 관계없이 여성과 의료인 모두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처벌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70여 년에 가까운 지난 시간 동안 ‘낙태죄’가 미친 실질적인 영향은 큰 장벽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간의 잘못된 관행과 비공식적 의료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는 비범죄화 직후 정부가 임신중지를 보건의료 영역에서 공식화하고 모든 보건의료 체계와 보건의료 기관, 보건의료인이 필요한 서비스와 권리 보장 체계를 갖추도록 했어야 함에도 이를 전혀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가 모두 권리 보장을 위한 법과 정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 어떻게든 다시 처벌과 제약이 가능한 조건만을 만들려 하다 보니 무엇도 진전되지 않은 채로 지난 6년 여의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병원과 정보의 양은 이전보다 늘어났지만, 임신 기간이나 거주 지역 등 자신의 상황에 맞는 안전한 병원을 찾는 일은 아직도 온전히 개인의 역량과 정보 자원에 달려 있다. 또한 대부분의 의료기관에서 남성 파트너의 동행과 동의를 요구하고, 병원비를 현금으로만 받는 관행이 유지되고 있다. 건강보험은 이미 법적 효력이 없는 ‘낙태죄’ 조항과 연결된 「모자보건법」 14조에 근거하여 극히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어, 병원마다 자의로 정한 비급여 수가와 항목도 제각각이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 아직도 많은 여성들이 임신중지 사실을 빌미로 협박하는 남성들에게 시달리거나, 겨우 찾은 병원이 무리한 병원비를 요구하고 신뢰가 가지 않아도 마땅한 대안이 없어 병원 측의 요구에도 취약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은 청소년에게 더욱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한다. 성관계의 상대방이나 보호자의 동행을 요구하는 병원, 감당하기 어려운 병원비, 학교나 가족에 의한 처벌의 두려움 등으로 인해 고민하는 사이 임신 기간은 늘어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병원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대 남성의 요구와 폭력에 취약해지기도 하고, 무리하게 돈을 빌리거나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이런 어려움으로 인해 스스로 약을 구해 해결해 보려고도 하지만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약은 성분과 정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또 다른 어려움에 놓인다. 결국 비범죄화가 되었어도 청소년이 놓인 불평등한 현실의 장벽과 간극은 오히려 더 크게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청소년을 위한 포괄적 임신중지 지원 환경 만들기
한 사람의 임신중지에는 다양한 상황과 맥락이 개입한다. 하기에 그 누구의 임신중지도 단순히 ‘선택’이라는 단편적이고 협소한 개념으로는 절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지난해 10월 셰어는 한 해 동안 진행된 ‘무엇이든 물어보셰어’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임신중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임신중지를 경험한 두 사람의 패널이 함께했다. 한 명은 이 글의 서두에 인용한 산부인과 전문의 오정원, 다른 한 명은 지난 해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 잔의 자유》라는 책을 낸 김도미이다. 두 사람 모두 병을 치료해야 하는 상황에서 임신중지를 경험했다. 도미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 지 3년이 지난 2022년 골절 치료를 하던 중에 혈액암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혈액암에 관한 정확한 진단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우선 임신중지에 관한 정보를 찾아봐야 했던 도미는 보건복지부의 산하 기관인 인구보건복지협회에서 운영하는 ‘러브플랜’이라는 사이트를 찾았지만 이 곳에서는 실질적인 정보보다는 후유증에 관한 내용이 더 많아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유산유도제를 구하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산부인과를 통해 미소프로스톨을 처방받게 되었다. 하지만 복용 후 출혈이 시작되어야 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증상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도미는 다시 시술이 가능한 다른 병원에 가서 임신중지를 완료하기 위한 시술을 받아야 했다. 도미의 이 이야기는 여전히 임신중지가 비공식적인 의료 행위처럼 취급되는 문제가 매 단계마다 어떤 어려움을 야기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식 상담 기관과 온라인 상담사이트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와 병원 연계 안내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그 다음의 과정 또한 이처럼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은 유산유도제가 필요했을 때 미소프로스톨만 복용하기보다는 세계보건기구에서 권고하는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함께 복용하는 방식으로 병원의 처방을 받아 복용할 수 있었다면 약의 복용만으로 임신중지를 완료하고 추가로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한편 도미는 이후 혈액암 치료를 위해 카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다니게 되면서, 혹시 병원이나 의료진이 지닌 임신중지에 대한 편견과 낙인이 자신의 다른 치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임신중지를 했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계류유산을 겪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도미의 이야기를 들은 오정원은, 환자의 건강 기록과 과거의 진료에 대한 정보는 의사가 건강 상태를 보고 치료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편견과 낙인으로 인해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칫 또 다른 건강상의 어려움을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포괄적 임신중지 케어의 개념 틀’ 그림. 〈세계보건기구 2022 임신중지 가이드〉 중에서.(srhr.org/abortioncare/#translation)
그래서 세계보건기구의 〈2022 임신중지 가이드〉는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와 함께 ‘포괄적 임신중지 케어’를 중요한 방향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포괄적’이라는 말은 임신중지 전부터 임신중지 후까지의 모든 단계를 아우르면서 매 단계마다 무엇을, 누가,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인지의 범주 또한 가능한 모든 방법과 장소, 실행 주체를 아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임신중지 전의 상담과 정보 제공, 임신중지 후 건강 상태의 확인, 피임에 관한 상담과 정보 제공이 이 범주의 처음과 끝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를 다른 장벽 없이, 인권을 존중하는 법·정책의 지원과 지지적인 보건의료 시스템을 통해 보장하고 이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 나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포괄적 임신중지의 가이드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약을 이용한 방법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1차 의료 기관과 상급 의료 기관뿐만 아니라 집, 약국, 커뮤니티 지원 센터까지 가능한 장소를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유산유도제가 도입된 많은 나라에서는 임신 초기 10주경까지 시술보다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고, 특히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경유하면서는 원격 처방도 크게 확대되었다. 약을 이용한 방법은 시술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처방받아 구입한 약을 직접 가능한 시간에 복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이나 거리, 여러 사회 경제적 여건상 병원에 자주 방문하거나 머물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접근성을 크게 높여 준다.
그렇다면 청소년에게 이러한 포괄적 임신중지 케어가 가능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청소년이 임신 상태를 인지하고 임신을 유지할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때부터 어떠한 차별이나 낙인, 처벌의 위험 없이 의사 결정을 위한 과정과 임신중지의 과정을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 일반논평 제4호(2003)[ref]CRC General Comment No. 4 : Adolescent Health and Development in the Context of the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Adopted at the Thirty-third Session of the Committee on the Rights of the Child, 2003년 7월 1일.(CRC/GC/2003/4 (General Comments)) [/ref]는 청소년이 자신의 권리와 특별히 필요로 하는 것들을 반영하는 보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고, 모든 국가는 청소년이 의사 결정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청소년의 건강과 발달을 증진하기 위해 건강 문제에 대한 조언 및 상담을 포함하여 청소년의 사생활 보호, 비밀 유지 권리를 엄격히 존중해야 하며, 의료 서비스 제공자는 청소년에 관한 의료 정보를 비밀로 유지할 의무가 있고, 부모 또는 다른 사람의 입회 없이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는 부분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미국소아과학회 또한 “청소년은 임신중지에 대한 광범위하고 공평한 접근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 “다른 의료 형태와 마찬가지로 임신중지에 대한 결정은 환자 스스로가 의료 서비스 제공자와 상의하여 외부의 간섭 없이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ref]American Academy of Pediatrics, ‘The Importance of Acess to Abortion’ 중 ‘Youth deserve broad, equitable acess to abortion’ 부분 참고.(www.aap.org/en/patient-care/adolescent-sexual-health/equitable-access-to-sexual-and-reproductive-health-care-for-all-youth/the-importance-of-access-to-abortion) [/ref]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의료 기관이 임신중지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부모의 동의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청소년이 의료 기관을 전전하다 임신 초기에 시기를 놓치거나, 반대로 본인은 임신을 유지하고 싶어도 임신중지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의사결정의 과정에 대한 역량을 가질 수 있으려면 충분하고 객관적인 상담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상담과 정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 현재 자신의 상황과 성관계 상대방의 상황, 두 사람의 관계와 상황이 앞으로 미칠 영향, 가족이나 학교, 경제적 상태 등에 대한 판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이드
- 임신을 중지할 때와 유지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원과 관련 기관에 대한 정보
- 임신 기간별 임신중지의 방법과 각 방법에 따라 고려해야 할 상황, 장단점의 비교
- 임신중지 관련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가까운 의료 기관에 대한 정보
- 임신중지 전후, 임신중지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것들
- 임신중지 후 피임 방법에 대한 정보
물론 이러한 내용은 청소년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하지만 특히 청소년의 경우 온라인을 통한 접근성을 높이고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쉬운 언어의 정보 자료를 제공하는 등 의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ref]
셰어에서 만든 임신중지 관련 정보 제공을 위한 반응형 웹사이트
‘고민하고 있는 당신에게, 곁에 함께’(www.byyourside-share.org)에서 임신중지 이전에 고민해야 할 것들, 임신중지에 관한 권리, 상황에 따른 지원 기관에 대한 정보, 임신중지 방법 등을 자세히 안내하고 있으니 참고.
다른 나라의 정부가 만든 사이트 중에서는 뉴질랜드 보건부의 임신중지 정보 안내 사이트가 이런 모든 내용과 접근성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www.decide.org.nz)[/ref]
또한 임신중지의 전 과정에서 경제적 상황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성관계 상대방이나 가족 등 제3자에 의한 폭력의 위험 등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경제적 지원과 안전한 장소의 제공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안전한 임신중지, 성교육이 꼭 다뤄야 하는 이유
셰어는 지난 해부터 임신중지가 필요한 청소년과 이주민/난민에게 의료비를 지원하고 필요한 지원 기반을 연계하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청소년의 경우 지난 해까지는 만 19세까지를 대상으로 했지만 올해부터 만 24세까지 대상 연령을 확대했다. 최근 한 청소년 내담자는 유산유도제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셰어에 대한 정보를 찾아 직접 셰어의 카카오톡 채널로 연락을 했다. 가정폭력과 현재 파트너와의 관계, 경제 상황 등 자신의 상황과 앞으로 고려해야 할 상황에 대해서 이미 많은 부분을 고민하고 판단한 상태였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건 ‘미성숙’을 전제로 한 일방적 개입이 아니라 필요한 역량과 자원을 일상에서 함께 키워 나가는 여건, 이를 든든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지지 기반, 그리고 편견이나 낙인,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언제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이다. 학교가, 교사가 이런 존재가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임신중지에 대한 정보와 교육, 지지 기반이 되는 자원을 만드는 일은 임신중지의 시기를 지연시키지 않고, 임신중지 전후의 상황과 건강을 살필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한 사람의 건강과 삶을 유지해 나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단지 누군가가 임신중지를 고민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만이 아니라 언제든 지원과 정보가 필요할 때 떠올릴 수 있도록 기본적인 교육 환경에서부터 이러한 지지적이고 안전하게 느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좀 더 심화된 토론을 이어 갈 수 있다면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의 역사를 보며 국가의 인구 관리 정책에 대한 주제를 다루거나, 왜 장애인 등 누군가의 임신은 중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누군가의 임신중지는 더 극심한 처벌과 낙인의 대상이 되는지, 이와 관련된 차별과 부정의의 맥락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자. 이를 통해 임신중지를 둘러싼 여러 논점을 개인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전체 사회와 역사의 구조적 맥락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셰어의 ‘무엇이든 물어보셰어’ 시간에 죄책감에 대해서 나눴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프로그램을 위해 참가 신청자로부터 미리 받은 질문과 사연에는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가 여럿 있었다. 오정원은 산부인과 의사로서 병원에서 만난 환자 중에는 죄책감으로 인해 일부러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거나, 이후에 유산 등 다른 힘든 상황이 생겼을 때 벌 받는 것이라고 여기는 환자들도 있다고 전했다. 도미도 당시의 시간이 너무 지옥 같고 모두가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면 어떤 사건이든 이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내 인생의 한 부분을 어떤 장에 어떤 모습으로 배치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남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죄책감에 시달리기보다 하나의 중요한 페이지로 남기고 그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데에는 이것을 개인의 고립된 경험으로만 남겨 두지 않는 지지적인 관계와 조력이 정말 중요했다고 강조했다. 흔히 임신중지를 하게 되는 상황은 ‘원치 않는 임신’의 상황으로서만 이야기되지만 사실 임신을 유지해야 하는 10개월의 긴 시간 동안에는 건강과 삶의 환경에서 다양한 변수가 발생하기 때문에 간절히 원했던 임신의 경우에도, 충분히 준비하고 계획했던 임신에서도 임신을 중지하게 되는 일은 발생한다. 상대방에게 임신 사실을 이야기한 이후 함께 미래를 계획했음에도 임신 중기 즈음이 되면 상대방이 무책임하게 떠나거나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임신중지에 대한 죄책감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트라우마와 후회, 원망, 자기혐오 등 복잡한 감정이 연결되어 있다. 이를 잘 해석하고 풀어나가며 삶의 다음 장을 이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 청소년의 곁에 있는 교사로서 그 역할을 꼭 고민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안전한 임신중지를 성교육에 담아내기
나영 curiousnyny@gmail.com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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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병이 아니고서야 우리는 병원에 가야 할 때 집에서, 일터에서 가까운 곳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5년 동안 제가 만났던 임신중지 당사자들은 제주에서 전라도에서 경상도에서 강원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옵니다. 가짜 약과 브로커와 상업적 광고가 난무한 상황에서 조금 더 안전한 환경에서 임신중지를 하고자 짐을 싸고 올라옵니다.
이렇게 어렵게 만난 우리는 여전히 안전하지 않고 불안합니다. 배우자와 파트너로부터의 협박 속에, 얼마나 아프든 내일 다시 일터로, 학교로, 가정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불안 속에,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채 죄책감과 자기 비난을 안고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막막함 속에 있습니다. 의료진으로서,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와닿지 않을 위로를 하며 누군가 병원으로 해코지를 하러 오지는 않을지, 혹은 병원 내에서의 백래시가 있지 않을지 늘 걱정합니다. 5년이 훨씬 지났지만, 나아진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당사자였던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불과 몇 달 전, 혹은 몇 주 전까지도 자신이 처하게 될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을 예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채 삶을 담보로 한 결정 앞에서 당사자는 섬처럼 고립된 채 무력해집니다. 또는 위험을 감수하며 무모해집니다. 원래 그런 사람, 그럴 것처럼 생긴 사람은 없습니다.
법과 정책이 부재한 사이, 여전히 많은 병원에서는 「모자보건법」상의 인공임신중절 허용 사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허용 사유’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아니라, 차별 그 자체입니다. 누군가는 임신을 유지하지 않아도 되고, 어떤 태아는 태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전혀 암묵적이지 않은 구체적인 차별입니다.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는 더 이상 국가가 처벌하거나 허용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전히 개인의 건강권, 인권의 문제로 전제되어야 합니다.”
위의 내용은 2025년 5월 22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 선거 사무실 앞에서 진행되었던 기자 회견에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으로 발언한 의사 오정원의 발언 중 일부를 옮긴 것이다. 이날 발언에서 오정원은 다양한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의 과정을 함께한 대학병원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자신은 출산을 돕는 산과의사이지만 동시에 “태아는 임신한 여성과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이며, 어떤 생명도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질 수 없다”는 국제산부인과연맹의 원칙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힘주어 강조했다.
임신중지와 관련된 활동을 하다보면 ‘생명’에 대한 질문에 끊임없이 부딪히게 된다. 과학으로든 철학으로든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모든 유기체는 활동하는 작은 세포 하나하나를 생명의 기본 단위로 하여 구성되고 이 세포 단위에서부터 크고 작은 생명의 단위가 끊임없이 살고 죽는 과정에서 하나의 유기체와 생태계, 사회가 지속된다. 즉, 크고 작은 생명의 단위가 살고 죽으며 유기적으로 활동을 유지하는 과정이 그 자체로 생명 활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계속되는 생과 사의 과정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어떤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일 수 있다. 모든 생명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 활동을 유지하고 재생산을 할 수 있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임신은 자궁을 지닌 한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임신을 유지하고 출산을 하고 양육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회적 관계와 자원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는 기본적으로 임신을 한 당사자와 성관계를 한 상대방의 파트너십 또는 혼인 여부, 관계의 성격과 상태, 건강 상태, 사회적 지위, 사회 경제적 상황, 가족과의 관계, 그리고 법과 제도, 보건의료, 사회복지 상황 등이 복잡하게 영향을 미친다. 이 중에 무언가 하나라도 어려움이 있다면 임신의 유지가 출산까지 이어지지 못 하거나, 출산을 해도 양육이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은 그대로 출산 후의 자녀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임신중지는 오직 여성과 태아, 둘 사이의 문제로만 다뤄져 왔다. 이 복잡한 관계와 자원, 사회적 영향은 마치 공백인 양 삭제되고 단지 여성 개인의 결정과 태아의 생명이라는 아주 단순한 관계만이 비난과 처벌의 대상이 된다.
지금은 법적 효력을 상실한 「형법」 제27장의 ‘낙태의 죄’ 조항도 오직 여성과 이를 조력한 의료인만을 처벌했다. 심지어 「모자보건법」 제14조에서는 여성이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하기 위해서는 임신의 가장 직접적인 또 다른 당사자인 남성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남성은 이 결정에 대해 어떠한 법적인 책임도 지지 않으므로, 사실상 동의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합법 여부를 결정하는 허락의 주체인 셈이다. 남성의 이런 법적 위치는 여성들을 남성들의 요구에 취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의료인 또한 처벌의 대상이므로 의료 기관에서는 어떻게든 처벌을 피할 명분을 마련해 두기 위해 여성들에게 남성의 동의를 명시적으로 확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편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의료인들은 보다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기술과 지식, 국제 가이드 등을 제대로 배우거나 훈련받지 못해 임신중지에 관한 의료 행위 역시 더 침습적이고 접근성이 높으며 위험도가 좀 더 높은 수준에 머물게 된다. 일례로 한국의 많은 산부인과에서는 아직도 임신 12주경까지 간단하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진공흡입술 대신 자궁벽을 긁어내는 소파술을 사용하며, 이미 1988년부터 안전하게 사용되기 시작해서 지금은 세계보건기구의 필수핵심의약품이 된 유산유도제(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를 정부가 승인하지 않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ref]
미페프리스톤은 프로게스테론 호르몬의 작용을 억제하여 자궁 내막이 분리되도록 유도하는 약물이고, 미소프로스톨은 위장 질환을 위해 사용되는 약물이지만 임신 상태인 경우 자궁 수축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임신중지를 위한 유산 유도에 미소프로스톨만 단독으로 사용할 때는 84~96%의 성공률을 보이지만 임신 9주 이내에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함께 사용할 경우 95~99%의 성공률로 안전하게 유산이 이루어진다, 세계보건기구는 각국이 구비해야 할 필수핵심의약품 목록에서 유산유도를 위한 약물로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의 복합 사용을 권고한다.
(list.essentialmeds.org/medicines/242) 2025년 5월 현재 미페프리스톤은 전 세계 100개국에서 허용되어 안전하게 사용되고 있다.
(연도별 미페프리스톤 도입 국가 목록 : gynuity.org/assets/resources/mife_by_country_and_year_en.pdf) 한국에서는 2021년부터 미페프리스톤의 승인 신청이 이루어졌으나 아직까지 승인이 되지 않았으며, 미소프로스톨은 위장 질환을 위한 용도로만 승인되어 있어 산부인과에서는 오래전부터 의사의 재량권하에서 오프라벨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현재 여러 의료 기관에서 대체 약물로 메토트렉세이트를 사용하고 있다. 흔히 MTX로 불리는 이 약은 백혈병 치료에 많이 쓰이며 산부인과에서는 자궁 외 임신에 주로 사용되는 주사제이다. 현재 온라인에서 병원에서 한 임신중지 후기나 관련 정보를 찾으면 ‘주사’, ‘MTX’ 관련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MTX는 기본적으로 항암제이기 때문에 독성에 유의해야 하고, 혈액 수치를 떨어트리거나 탈모를 유발하는 등의 부작용이 있어서 임신중지를 위한 유산유도제로 권장되지 않는다. 하루빨리 보다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미페프리스톤이 승인되어서 더 이상 이 약을 임신중지 용도로 사용할 이유가 없게 되어야 한다.[/ref]
문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실제 임신의 유지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요인은 법적 처벌의 존재보다도 성관계 파트너와의 관계나 폭력 여부, 사회와 가족에서의 지위, 사회경제적 상황 등 복합적이고 실질적인 현실의 문제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처벌을 통해 임신중지를 없애거나 줄일 수 있는 법적 효과는 거의 없는 반면 처벌법으로 인한 제도와 시스템, 교육·훈련의 부재가 여성과 아동, 보건의료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더 심각하고 구체적이다. 이에 세계보건기구와 세계산부인과학회는 2022년에 각각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 즉 어떠한 제약도 없이 임신중지를 완전히 처벌 대상에서 삭제하고 건강권의 문제로 다룰 것을 권고하는 새로운 국제 가이드와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ref]
세계보건기구 2022 임신중지 가이드(srhr.org/abortioncare/#translation); 세계산부인과학회 성명, 〈세계산부인과학회는 안전한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요구한다〉, 2022년 2월.
(www.figo.org/sites/default/files/2022-04/FIGO-Statement-FIGO-Calls-Total-DecriminalisationSafe-Abortion-EN.pdf)[/ref]
다행히 한국에서는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낙태죄’의 위헌성이 확인되었고, 이후 헌법재판소의 주문에 따른 개정 입법 시한을 넘겨 2021년부터 ‘낙태죄’는 법적 효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즉 지금은 임신중지의 사유나 시기 등에 관계없이 여성과 의료인 모두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처벌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70여 년에 가까운 지난 시간 동안 ‘낙태죄’가 미친 실질적인 영향은 큰 장벽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간의 잘못된 관행과 비공식적 의료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는 비범죄화 직후 정부가 임신중지를 보건의료 영역에서 공식화하고 모든 보건의료 체계와 보건의료 기관, 보건의료인이 필요한 서비스와 권리 보장 체계를 갖추도록 했어야 함에도 이를 전혀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가 모두 권리 보장을 위한 법과 정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 어떻게든 다시 처벌과 제약이 가능한 조건만을 만들려 하다 보니 무엇도 진전되지 않은 채로 지난 6년 여의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병원과 정보의 양은 이전보다 늘어났지만, 임신 기간이나 거주 지역 등 자신의 상황에 맞는 안전한 병원을 찾는 일은 아직도 온전히 개인의 역량과 정보 자원에 달려 있다. 또한 대부분의 의료기관에서 남성 파트너의 동행과 동의를 요구하고, 병원비를 현금으로만 받는 관행이 유지되고 있다. 건강보험은 이미 법적 효력이 없는 ‘낙태죄’ 조항과 연결된 「모자보건법」 14조에 근거하여 극히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어, 병원마다 자의로 정한 비급여 수가와 항목도 제각각이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 아직도 많은 여성들이 임신중지 사실을 빌미로 협박하는 남성들에게 시달리거나, 겨우 찾은 병원이 무리한 병원비를 요구하고 신뢰가 가지 않아도 마땅한 대안이 없어 병원 측의 요구에도 취약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은 청소년에게 더욱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한다. 성관계의 상대방이나 보호자의 동행을 요구하는 병원, 감당하기 어려운 병원비, 학교나 가족에 의한 처벌의 두려움 등으로 인해 고민하는 사이 임신 기간은 늘어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병원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대 남성의 요구와 폭력에 취약해지기도 하고, 무리하게 돈을 빌리거나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이런 어려움으로 인해 스스로 약을 구해 해결해 보려고도 하지만 온라인에서 판매되는 약은 성분과 정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또 다른 어려움에 놓인다. 결국 비범죄화가 되었어도 청소년이 놓인 불평등한 현실의 장벽과 간극은 오히려 더 크게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청소년을 위한 포괄적 임신중지 지원 환경 만들기
한 사람의 임신중지에는 다양한 상황과 맥락이 개입한다. 하기에 그 누구의 임신중지도 단순히 ‘선택’이라는 단편적이고 협소한 개념으로는 절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지난해 10월 셰어는 한 해 동안 진행된 ‘무엇이든 물어보셰어’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임신중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임신중지를 경험한 두 사람의 패널이 함께했다. 한 명은 이 글의 서두에 인용한 산부인과 전문의 오정원, 다른 한 명은 지난 해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 잔의 자유》라는 책을 낸 김도미이다. 두 사람 모두 병을 치료해야 하는 상황에서 임신중지를 경험했다. 도미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 지 3년이 지난 2022년 골절 치료를 하던 중에 혈액암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혈액암에 관한 정확한 진단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우선 임신중지에 관한 정보를 찾아봐야 했던 도미는 보건복지부의 산하 기관인 인구보건복지협회에서 운영하는 ‘러브플랜’이라는 사이트를 찾았지만 이 곳에서는 실질적인 정보보다는 후유증에 관한 내용이 더 많아 신뢰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유산유도제를 구하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산부인과를 통해 미소프로스톨을 처방받게 되었다. 하지만 복용 후 출혈이 시작되어야 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증상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도미는 다시 시술이 가능한 다른 병원에 가서 임신중지를 완료하기 위한 시술을 받아야 했다. 도미의 이 이야기는 여전히 임신중지가 비공식적인 의료 행위처럼 취급되는 문제가 매 단계마다 어떤 어려움을 야기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식 상담 기관과 온라인 상담사이트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와 병원 연계 안내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그 다음의 과정 또한 이처럼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은 유산유도제가 필요했을 때 미소프로스톨만 복용하기보다는 세계보건기구에서 권고하는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함께 복용하는 방식으로 병원의 처방을 받아 복용할 수 있었다면 약의 복용만으로 임신중지를 완료하고 추가로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한편 도미는 이후 혈액암 치료를 위해 카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다니게 되면서, 혹시 병원이나 의료진이 지닌 임신중지에 대한 편견과 낙인이 자신의 다른 치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임신중지를 했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계류유산을 겪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도미의 이야기를 들은 오정원은, 환자의 건강 기록과 과거의 진료에 대한 정보는 의사가 건강 상태를 보고 치료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편견과 낙인으로 인해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자칫 또 다른 건강상의 어려움을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포괄적 임신중지 케어의 개념 틀’ 그림. 〈세계보건기구 2022 임신중지 가이드〉 중에서.(srhr.org/abortioncare/#translation)
그래서 세계보건기구의 〈2022 임신중지 가이드〉는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와 함께 ‘포괄적 임신중지 케어’를 중요한 방향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포괄적’이라는 말은 임신중지 전부터 임신중지 후까지의 모든 단계를 아우르면서 매 단계마다 무엇을, 누가,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인지의 범주 또한 가능한 모든 방법과 장소, 실행 주체를 아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임신중지 전의 상담과 정보 제공, 임신중지 후 건강 상태의 확인, 피임에 관한 상담과 정보 제공이 이 범주의 처음과 끝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를 다른 장벽 없이, 인권을 존중하는 법·정책의 지원과 지지적인 보건의료 시스템을 통해 보장하고 이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 나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포괄적 임신중지의 가이드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약을 이용한 방법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1차 의료 기관과 상급 의료 기관뿐만 아니라 집, 약국, 커뮤니티 지원 센터까지 가능한 장소를 확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유산유도제가 도입된 많은 나라에서는 임신 초기 10주경까지 시술보다 약을 이용한 임신중지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고, 특히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경유하면서는 원격 처방도 크게 확대되었다. 약을 이용한 방법은 시술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지만, 처방받아 구입한 약을 직접 가능한 시간에 복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이나 거리, 여러 사회 경제적 여건상 병원에 자주 방문하거나 머물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접근성을 크게 높여 준다.
그렇다면 청소년에게 이러한 포괄적 임신중지 케어가 가능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청소년이 임신 상태를 인지하고 임신을 유지할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때부터 어떠한 차별이나 낙인, 처벌의 위험 없이 의사 결정을 위한 과정과 임신중지의 과정을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 일반논평 제4호(2003)[ref]CRC General Comment No. 4 : Adolescent Health and Development in the Context of the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Adopted at the Thirty-third Session of the Committee on the Rights of the Child, 2003년 7월 1일.(CRC/GC/2003/4 (General Comments)) [/ref]는 청소년이 자신의 권리와 특별히 필요로 하는 것들을 반영하는 보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하고, 모든 국가는 청소년이 의사 결정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과정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청소년의 건강과 발달을 증진하기 위해 건강 문제에 대한 조언 및 상담을 포함하여 청소년의 사생활 보호, 비밀 유지 권리를 엄격히 존중해야 하며, 의료 서비스 제공자는 청소년에 관한 의료 정보를 비밀로 유지할 의무가 있고, 부모 또는 다른 사람의 입회 없이 사생활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는 부분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미국소아과학회 또한 “청소년은 임신중지에 대한 광범위하고 공평한 접근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 “다른 의료 형태와 마찬가지로 임신중지에 대한 결정은 환자 스스로가 의료 서비스 제공자와 상의하여 외부의 간섭 없이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ref]American Academy of Pediatrics, ‘The Importance of Acess to Abortion’ 중 ‘Youth deserve broad, equitable acess to abortion’ 부분 참고.(www.aap.org/en/patient-care/adolescent-sexual-health/equitable-access-to-sexual-and-reproductive-health-care-for-all-youth/the-importance-of-access-to-abortion) [/ref]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의료 기관이 임신중지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부모의 동의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청소년이 의료 기관을 전전하다 임신 초기에 시기를 놓치거나, 반대로 본인은 임신을 유지하고 싶어도 임신중지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의사결정의 과정에 대한 역량을 가질 수 있으려면 충분하고 객관적인 상담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상담과 정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 현재 자신의 상황과 성관계 상대방의 상황, 두 사람의 관계와 상황이 앞으로 미칠 영향, 가족이나 학교, 경제적 상태 등에 대한 판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이드
- 임신을 중지할 때와 유지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원과 관련 기관에 대한 정보
- 임신 기간별 임신중지의 방법과 각 방법에 따라 고려해야 할 상황, 장단점의 비교
- 임신중지 관련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가까운 의료 기관에 대한 정보
- 임신중지 전후, 임신중지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것들
- 임신중지 후 피임 방법에 대한 정보
물론 이러한 내용은 청소년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하지만 특히 청소년의 경우 온라인을 통한 접근성을 높이고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쉬운 언어의 정보 자료를 제공하는 등 의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ref]
셰어에서 만든 임신중지 관련 정보 제공을 위한 반응형 웹사이트
‘고민하고 있는 당신에게, 곁에 함께’(www.byyourside-share.org)에서 임신중지 이전에 고민해야 할 것들, 임신중지에 관한 권리, 상황에 따른 지원 기관에 대한 정보, 임신중지 방법 등을 자세히 안내하고 있으니 참고.
다른 나라의 정부가 만든 사이트 중에서는 뉴질랜드 보건부의 임신중지 정보 안내 사이트가 이런 모든 내용과 접근성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www.decide.org.nz)[/ref]
또한 임신중지의 전 과정에서 경제적 상황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성관계 상대방이나 가족 등 제3자에 의한 폭력의 위험 등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경제적 지원과 안전한 장소의 제공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안전한 임신중지, 성교육이 꼭 다뤄야 하는 이유
셰어는 지난 해부터 임신중지가 필요한 청소년과 이주민/난민에게 의료비를 지원하고 필요한 지원 기반을 연계하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청소년의 경우 지난 해까지는 만 19세까지를 대상으로 했지만 올해부터 만 24세까지 대상 연령을 확대했다. 최근 한 청소년 내담자는 유산유도제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셰어에 대한 정보를 찾아 직접 셰어의 카카오톡 채널로 연락을 했다. 가정폭력과 현재 파트너와의 관계, 경제 상황 등 자신의 상황과 앞으로 고려해야 할 상황에 대해서 이미 많은 부분을 고민하고 판단한 상태였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건 ‘미성숙’을 전제로 한 일방적 개입이 아니라 필요한 역량과 자원을 일상에서 함께 키워 나가는 여건, 이를 든든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지지 기반, 그리고 편견이나 낙인,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언제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이다. 학교가, 교사가 이런 존재가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임신중지에 대한 정보와 교육, 지지 기반이 되는 자원을 만드는 일은 임신중지의 시기를 지연시키지 않고, 임신중지 전후의 상황과 건강을 살필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한 사람의 건강과 삶을 유지해 나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단지 누군가가 임신중지를 고민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만이 아니라 언제든 지원과 정보가 필요할 때 떠올릴 수 있도록 기본적인 교육 환경에서부터 이러한 지지적이고 안전하게 느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좀 더 심화된 토론을 이어 갈 수 있다면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의 역사를 보며 국가의 인구 관리 정책에 대한 주제를 다루거나, 왜 장애인 등 누군가의 임신은 중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누군가의 임신중지는 더 극심한 처벌과 낙인의 대상이 되는지, 이와 관련된 차별과 부정의의 맥락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자. 이를 통해 임신중지를 둘러싼 여러 논점을 개인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전체 사회와 역사의 구조적 맥락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셰어의 ‘무엇이든 물어보셰어’ 시간에 죄책감에 대해서 나눴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프로그램을 위해 참가 신청자로부터 미리 받은 질문과 사연에는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가 여럿 있었다. 오정원은 산부인과 의사로서 병원에서 만난 환자 중에는 죄책감으로 인해 일부러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거나, 이후에 유산 등 다른 힘든 상황이 생겼을 때 벌 받는 것이라고 여기는 환자들도 있다고 전했다. 도미도 당시의 시간이 너무 지옥 같고 모두가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면 어떤 사건이든 이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내 인생의 한 부분을 어떤 장에 어떤 모습으로 배치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남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죄책감에 시달리기보다 하나의 중요한 페이지로 남기고 그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데에는 이것을 개인의 고립된 경험으로만 남겨 두지 않는 지지적인 관계와 조력이 정말 중요했다고 강조했다. 흔히 임신중지를 하게 되는 상황은 ‘원치 않는 임신’의 상황으로서만 이야기되지만 사실 임신을 유지해야 하는 10개월의 긴 시간 동안에는 건강과 삶의 환경에서 다양한 변수가 발생하기 때문에 간절히 원했던 임신의 경우에도, 충분히 준비하고 계획했던 임신에서도 임신을 중지하게 되는 일은 발생한다. 상대방에게 임신 사실을 이야기한 이후 함께 미래를 계획했음에도 임신 중기 즈음이 되면 상대방이 무책임하게 떠나거나 연락이 두절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임신중지에 대한 죄책감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트라우마와 후회, 원망, 자기혐오 등 복잡한 감정이 연결되어 있다. 이를 잘 해석하고 풀어나가며 삶의 다음 장을 이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 청소년의 곁에 있는 교사로서 그 역할을 꼭 고민할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