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낙태죄 폐지 운동이 바꿔나가고 있는 새로운 세계: 합법화를 넘어 비범죄화로, 결정권을 넘어 재생산정의 운동으로

나영

2020년은 낙태죄 폐지 운동의 역사에서 기록적인 한 해로 남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낙태죄 폐지 운동이 벌어졌고, 태국, 아르헨티나, 한국에서 속속 승리의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멕시코시티와 와하까 주에서만 합법적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멕시코에서는 치아파스와 미초아칸 주에서도 임신중지 합법화를 이뤄내기 위한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이미 오래 전에 합법화가 이루어진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처벌과 제약의 완전한 폐지를 위한 투쟁과 변화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21년에는 2020년에 이뤄낸 승리를 바탕으로 더 많은 곳에서 또 다른 변화가 이어질 것입니다. 당장 2021년 1월부터 아르헨티나의 승리에 힘입어 칠레에서도 임신중지 합법화를 위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낙태죄 폐지를 위한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어 왔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변화들은 역사적으로 특히 중요한 국면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2020년 한 해 동안 각국에서 이어진 변화의 의미와 앞으로의 방향을 짚어봅니다.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이뤄낸 한국

가장 먼저, 우리의 승리를 짚어야겠지요. 2020년 12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임신중지를 한 사람과 당사자의 요청을 받고 임신중지를 조력한 의료인은 그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낙태죄’는 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가족계획 정책으로 사실상 사문화 된 법으로 인식되었지만, 그럼에도 임신중지가 형법상 처벌이 가능한 ‘죄’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지난 67년 동안 수많은 여성들의 건강과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성들은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관계 속에서 도리어 보복성 고발을 당했고, 자신의 상황과 의사는 존중받지 못한 채 남성의 동의 여부를 확인받아야 했습니다. 반면 모자보건법은 우생학적 사유의 임신중지를 허용하여 장애나 질병이 있는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해 왔지요. 임신중지를 하기 위한 과정 뿐 아니라 임신중지 후 후유증이 있을 때에도 제 때에 병원을 찾아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임신중지가 어떤 식으로든 형법상의 죄로서 남아있는 한 국가에 의한 사회적, 성적 통제는 계속되고 국가는 불평등과 차별을 적극적으로 바꿔나가는 대신 처벌과 허용의 기준을 나누어 책임을 전가하기만 할 것입니다.

지난 40여 년간 처벌 조항이 유지된 채로 임신주수나 사유 등에 따른 ‘합법화’를 경험해 온 각국은 이미 이러한 문제들을 뼈저리게 경험해 왔기에 이제는 완전한 비범죄화로 가기 위한 운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120여 개국의 활동가들이 모였던 2018년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를 위한 국제 캠페인 International Campaign for Women’s Rights to Safe Abortion 포럼에서도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는 핵심 주제로 논의되었습니다. 처벌 조항이 유지되지 않는 비범죄화의 사례를 만드는 것은 다른 나라의 임신중지 비범죄화 운동에도 힘을 더할 수 있는 중요한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Women Help Women이 한국의 '낙태죄' 폐지를 축하하며 보낸 메세지 이미지

우리는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를 외치며 ‘낙태죄’의 완전한 폐지를 위해 싸웠고, 2019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이끌어 냈으며, 지난 해 10월 정부가 처벌 조항을 그대로 유지하는 졸속적인 개정입법안을 발표한 이후에도 타협 없이 정부와 국회에 형법 처벌 조항 폐지를 요구했습니다. 코로나로 집회를 자주 열 수는 없었지만 정부 부처, 정당, 의원실, 국가인권위 등 곳곳을 찾아다니며 처벌 조항을 유지하는 정부안이 통과되지 않도록 설득했고, 각계의 선언을 이어갔으며, 권리 보장 법안이 발의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국제 연대와 국제기구의 권고도 이끌어 냈습니다. 청와대와 국회 청원부터 수많은 의견서, 기자회견, 집회, 퍼포먼스에 모인 모두의 힘이 만들어낸 승리입니다. ‘낙태죄’의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의제화 되었던 2010년 이후부터 수많은 이들이 용기 있게 경험을 말하고, 낙태죄에 대한 이 사회의 관점과 담론을 바꿔냈으며, 성과 재생산 권리를 세상에 드러냈고, 미프진이 뭔지도 모르던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무엇보다, 저출산 타령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던 정부와 정치인들보다 훨씬 앞서서,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결정권’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낙태죄’의 문제가 이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 성적 통제에 맞서는 사회정의의 문제임을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며 나아간 것이 한국 낙태죄 폐지 운동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전히 유산유도제의 도입이나 건강보험 적용, 보건의료 전달 체계와 인프라 마련, 상담과 지원 체계 마련 등 많은 과제가 남아 있지만 우리는 처벌에 대한 제약 없이 앞으로의 과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2021년에는 다음 단계의 변화를 위해 더 당당하게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국적인 대중운동의 힘으로 합법화를 이루어낸 아르헨티나

한국에서 ‘낙태죄’가 소멸되는 마지막 날을 카운트다운하고 있던 12월 30일, 아르헨티나에서는 초록색 스카프를 든 이들의 환희와 눈물이 광장을 가득 덮었습니다. 2018년 하원 의회를 통과했지만 상원 의회에서 좌절되었던 임신중지 합법화 법안이 드디어 찬성 38표 대 반대 29표의 결과로 상원의회를 통과했던 것입니다. 아르헨티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고향인 나라이고, 카톨릭의 영향력이 정치와 일상을 좌우할 정도로 강력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뤄낸 승리라는 점에서 앞으로 칠레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합법화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승리는 무엇보다 2005년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대중운동의 조직으로 이끌어낸 승리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005년 5월 28일 여성 건강을 위한 국제 행동의 날에 전국 300여개 조직이 모여 결성한 ‘합법적이고 안전한, 무상의 임신중지 권리를 위한 전국 캠페인 La Campaña Nacional por el Derecho al Aborto Legal Seguro y Gratuito’은 해를 거듭하며 규모가 커져 현재는 500여 개의 단체가 참여하고 있으며, 전국 단위로 방대한 운동을 조직했습니다. 여성단체 뿐 아니라 노동조합, 농민 조직, 연구자, 교육자, 의료인, 성소수자 단체 등 다양한 사회운동 조직이 참여하였고, 이후 여성살해 feminicidio에 반대하는 운동인 Ni Una Menos (한 명이라도 더 잃을 수 없다) 운동의 흐름과 맞물리면서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을 여성에 대한 폭력의 종식을 위한 운동이자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으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 결과 2018년에는 의회 앞에 100만명의 군중이 모였고 비록 상원의회에서의 통과는 이루지 못했지만 2019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임신중지 합법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됨으로써 다시 한 번 의회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아르헨티나에서는 임신 14주까지는 여성의 요청에 의한 임신중지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4주 이후에는 여전히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이나 생명이 위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법이며 의료인의 거부권이 인정되어 임신중지에 대한 실질적인 접근성을 크게 제약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처벌법은 임신중지를 한 여성의 경우 1년에서 4년의 징역형, 임신중지를 조력한 의료인의 경우 최대 15년형에 자격정지까지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여전히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한편으로는 처벌 위험을 무릅쓰고 이전부터 공개적으로 임신중지 시술을 하거나 유산유도제를 제공하는 의료인과 단체들도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해서 돌파해나갈 것입니다.

“부자는 낙태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죽는다.”

아르헨티나의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에서 부르던 노래의 가사입니다. 한국에서 우리의 투쟁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르헨티나에서도 임신중지의 문제는 결국 이 사회의 불평등과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행동해 왔습니다. 셰어는 앞으로 아르헨티나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함께 연대해 나가면서 재생산정의 운동을 확장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투쟁은 계속된다.

2020년에는 태국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2020년 2월 태국의 헌법재판소는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이거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 외에는 임신중지를 한 여성에게 징역 3년 형 또는 6,000바트의 벌금형을 처하고, 의료인에게는 징역 5년형에 처하도록 하는 처벌 조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지난 해 11월에는 태국 내각이 임신 12주까지를 합법화하는 법안을 제출했고 야당인 전진당(Move Forward Party พรรคก้าวไกล)은 임신 24주까지를 합법화하는 개정안을 제출했으나 올해 1월 25일 의회에서 내각의 개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임신 12주 이후에는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여성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상의 심각한 위험, 태아의 장애를 이유로 한 임신중지 외에는 불법이며, 6개월의 징역형이나 벌금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태국의 경우 저소득층과 10대 임신율이 매우 높은 상황에서 12주 이내에 병원을 찾아가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아 이번 개정안에 반대하여 계속해서 싸우기 위해 연대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도 법 개정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2001년에 임신 12주까지 합법적인 임신중지가 가능하게 되었지만 최근 발표된 보고서는 여전히 주수 제한으로 인해 해외로 임신중지를 하러 가는 여성의 수가 5,000여명에 달한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10월 프랑스 의회에서는 합법적 임신중지 기간을 임신 14주까지로 확대하는 개정안을 논의했지만 여전히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ref] 프랑스의 경우 다른 나라와 달리 마지막 월경일이 아닌 수정일로부터 12주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월경일을 기준으로 하면 현재 임신 14주까지를 합법적 임신중지로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현재 개정 논의는 수정일로부터 14주, 마지막 월경일로부터 16주를 기준으로 변경하는 방안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ref]

독일에서는 “나치 시대의 법을 폐지하라”며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현재 독일 형법 218조는 여전히 임신중지를 한 여성에게 벌금 또는 최대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이거나 의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경우, 임신 12주 이내에 상담을 받고 3일의 숙려 기간을 거친 경우가 아니면 모두 불법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작년 3월까지 219조a 조항에 따라 임신중지를 시행하는 의사와 병원이 자신의 병원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을 수 있어서 이 조항으로 처벌을 받게 된 의사의 긴 싸움 끝에 겨우 이 조항만 일부 개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임신중지 시술을 한다’는 사실 외에는 이 병원에서 어떤 방법으로 임신중지를 하는지, 무엇이 안전한지 어떤 정보도 알릴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법을 완전히 폐지할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요구하면서 싸우는 동안 한편에서는 주수나 사유 등의 제한을 두고 합법화 된 다른 나라의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결국엔 완전한 비범죄화는 어렵지 않겠냐’는 회의적인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세계는 합법화를 넘어 비범죄화로, 결정권을 넘어 재생산정의에 대한 요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1988년 이후 비범죄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캐나다를 비롯해서, 호주의 퀸즐랜드 주, 뉴질랜드에서 처벌 없는 비범죄화를 이루어냈고[ref]호주 퀸즐랜드 주의 경우 2018년에, 뉴질랜드는 2020년 3월에 형법상의 낙태죄를 폐지하였고, 퀸즐랜드는 임신 22주까지, 뉴질랜드는 임신 20주까지 본인 요청에 의해 임신중지를 할 수 있습니다. 각각 임신 22주와 20주 이후에는 의사 두 명이 상의하여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ref], 이제 한국에서 우리가 또 한 번의 진전을 이루어냈습니다. 프랑스, 독일, 태국, 아르헨티나에서도 투쟁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올해는 칠레의 의회가 합법화를 위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셰어는 2021년에 더 많은 나라의 비범죄화와 재생산정의를 위해 국제연대를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더 많은 힘들이 모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여러분이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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