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 - 왜 여성들은 산부인과가 불편한가?


* 이 글은 2021년 3월 출판된 디어드러 쿠퍼 오언스의 책 『치유와 억압의 집, 여성병원의 탄생 - 왜 여성들은 산부인과가 불편한가? 』(이영래 옮김, 윤정원 감수, 갈라파고스 출판사)의 추천사를 옮긴 것입니다. 해당 글은 본 책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추천의 글]

윤정원


2018년 4월, 뉴스 피드에서 뉴욕 센트럴파크의 동상 철거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검색 알고리 즘을 꽤 철저하게 관리하는 터라 피드에서 이 영상을 보게 된 일이 의아했다. 내막을 알고 보니 제임스 매리언 심스의 동상 철거식을 찍은 영상이었다. 심스는 산과 방광-질 누공 수술법, 수술 기구들을 개발한 미국 산부인과학의 아버지이고 추앙받는 의사였고, 그의 유산은 내가 현재 사용하는 기구에 붙은 심스질경이란 이름에 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가들의 고증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가 흑인 노예 여성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거들이 밝혀지면서 그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시작되었다. 1년여를 걸쳐, 미국의 흑인 여성 활동가, 재생산건강 활동가 들이 퍼포먼스와 공론화를 하면서, 결국 센트럴파크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 산부인과학의 아버지’ 동상이 철거된 것이었다.


영상 속 뉴스에서는 국부에 붉은 물감이 묻은 환의를 입은 흑인여성 활동가들의 시위, 크레인에 매달려 마치 계단을 내려오듯 제단 위에서 바닥위로 내려오는 동상, 이 과정 내내 “매리언 심스는 우리의 영웅이 아니다!Marion Sims, not our hero!”를 외치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교차 해서 보여 줬다.


이 책은 인종학과 성차별적 고정관념, 미국 산부인과학의 기원이 서로를 어떻게 강화하고 교차하며 발전해 왔는지를 생생한 사례들과 방대한 고증을 통해 우리 눈앞에 그려 냈다. 가끔은 읽는 게 어려울 정도로 참혹했던 강간과 성 노동, 강요된 출산, 생체실험에도 불구하고 저자가더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폭력과 착취가 꺾을 수 없었던 이 여성들의 모성과 생명력, 연대와 전통이었다. 그들의 초신체superbody는 연약한 동시에 파괴할 수 없고, 질병에 취약한 동시에 인류의 질병을 낫게 하는 청사진이 되었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면서도, 지능과 판단련이 중요한 간호 노동을 하고, 그러면서도 간호사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렇게 작가는 노예제와 인종학, 산부인과학이 상정한 ‘흑인성’이 가지는 자가당착을 자연스럽게 풀어 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150년이 지나 노예제도가 없어지고 임상실험 윤리도 확립된 현대의 우리가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의사-환자관계에 대한 통찰일 것이다. 의사-환자관계는 고정적이지 않다. 이를 크게 세 모델로 설명하는데,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환자처럼 능동적-수동적 관계(권위-복종 관계라고도 하며, 부모-신 생아 모형과 비유한다)일 때도 있고, 암 수술을 앞둔 환자처럼 지도-협조의 관계(부모-자녀)일 때도 있고, 만성 질환의 관리나 건강검진처럼 상호참여적인 관계(성인-성 인)일 때도 있다. 과거에는 전자의 모델이 전형이었다면 현대에는 후자를 지향한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어떤 모델이 절대적으로 옳다, 또는 좋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 사안에 따라 모델은 바뀌기도 하고, 환자와 의사가 생각하는 건강이라는 목표가 다른 경우 어떤 모델이라도 불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의사가 보기에 마땅히 필요한 치료인데, 가족을 돌보 느라, 아니면 일 때문에 일정을 내기 어려워 수술이나 처치를 연기하는 환자는 비이성적으로 여겨진다. 2센티미터 근종으로 초음파를 보러 가면 건강염려증 환자 취급을 당하고, 10센티미터 근종으로 초음파를 보면 미련하고 자기 애가 없는 환자 취급을 당한다. 의료인의 경우 치료의 장단점을 설명하고 선택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답을 제시하고 그러지 않으면 생기게 될 최악의 시나리 오를 설파한다.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의료 경험 리뷰에서 흔히 듣는 이런 이야기들은 권위주의 지도자-이상적 환자 모델을 고수하는 데에서 발생한 불협화음이다. 반면 여러 선택지를 설명했을 때 ‘선생님이 결정해 주셔야죠’라며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고, 권위와 명성을 기준으로 의사를 선택해서 더 만족을 얻는 환자들의 경우 상호참여적 관계가 어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백인 노예주 남성 의사-흑인 노예 여성이라는 능동-수동적 관계가 전통적인 의사-환자 관계의 원형이 된 기원을 보여 줌으로서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생각할 지점을 준다.


‘낙태’는 여성의 몸에 나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산부 인과 의사들의 목소리, 임신을 하면 자궁내막증이 좋아지기 때문에 어서 결혼을 해서 임신을 하라는 조언, 암의 재발을 ‘실패’로 생각해 신약과 임상실험과 비급여 항암제를 써서 끝까지 ‘싸우자’는 입장, 이런 사고들의 기저에 치료 라는 대의가 수단을 정당화해 온 것은 아닌지, 여성을 ‘위한다’는 선의에 압도당해 여성의 삶이 아니라 질병만 보게 것이 아닌지. 이제는 의료인도 여성도 함께, 그리고 다시 질문해야 할 때이다.


산부인과학 교과서에는 한 줄로 요약되어 있지만 의학 사와 의료윤리학 책에는 수십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피임약 개발의 역사[ref]초기 피임약 개발 기간에는 고용량 호르몬제들이 실험적으로 사용되었고, 이로 인해 유방암이나 정맥혈전증으로 인한 사망도 많았 다. 대규모 임상실험 결과가 있어야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고 시판을 할 수 있었기에, 개발자 존 록John Rock과 그레고리 핑커스 Gregory Pincus는 1956년 푸에르토리코에서 대규모 임상시험을 시행했 다. 미국령이며,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된 지역이었고, 인구 조절이 필요한 정부와 적은 금액의 보상금에도 실험에 참여할 가난한 여성들까지, 푸에르토리코는 최적의 실험 장소였다. 참여자들은 임상시 험이 아니라 피임약인줄만 알고 실험에 참여했다. 이 실험으로 발생한 수 건의 사망 사례들은 인과성 조사조차 되지 않았고, 오심과 구토 같은 증상은 가벼운 부작용이라고 무시되었다. 현재는 임상시험윤리가 훨씬 더 강화되었고, 피임약 용량도 최소량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푸에르토리코 실험은 피임약 개발의 역사에서 여전히 오점으로 남아 있다,[/ref] , 터스키기 매독 실험[ref]미국 공중보건국Public Health Service에서 1932년부터 시작해 40여년 간 행해진 미국 역사 최악의 임상실험이다. 미국 앨라바마주 터스키 기에 거주하는 400여 명의 가난하고 대부분 문맹인 흑인들을 대상으 로, 초기에는 완치법이 없었던 매독 발병율에 대한 연구 및 보존적인 치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매독에 효과적인 페니실린이 1947년 표준적인 치료법으로 상용화된 후에도 연구자들은 매독의 자연 진행 경과를 관찰하기 위해 피험자들을 속이면서 치료제를 제공해 주지 않았다. 피임을 해야 한다고 알려 주거나 선천성 매독을 방지할 치료 역시 제공하지 않았다. 1966년에서야 내부고발로 언론에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연구는 중단되었고, 인간참여연구에 대한 윤리기준이 제정되었다. 1997년에서야 빌 클린턴 대통령이 국가 차원 에서 공식적으로 사죄하였다.[/ref] , 탈리도마이드 사건[ref]1957년 독일의 한 제약 회사에서 임산부의 입덧 방지제로 출시한 탈리도마이드는 동물실험에서 아무 부작용이 없었기에, 인간 임상실험을 건너뛰고 시장에 출시되었다. 하지만 1960년에서 1961년사이에 이약을 복용한 여성들이 사지가 소실되거나 짧은 기형아를 출산하면서, 이 약이 인간에서는 혈관 생성을 억제한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 위험 성이 드러나 1962년 판매가 중지되었다. 그 사이 유럽을 포함해 세계 전역 48개국에서 1만 2000명이 넘는 피해자가 태어났다.[/ref] 들을 보면 여성의, 유색인의, 이등 시민의 몸이 말그대로 배틀그라운드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이 책이 단지 ‘그럼 그렇지, 의료인들이 오만하고 권위적인 게이런 뿌리였구나’로 읽히는 데 그치길 원치 않는다. 탈권 위주의와 반과학운동을 혼동하는 ‘안아키’나 백신 반대 운동, 피임약 음모론으로 빠지지 않길 정말이지 부탁한다.


우리는 선조 여성들의 피와 눈물이 스민 과학 발전의 산물을 어떻게 민주적이고 여성주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지를 더 고민해야 한다. 의료인과 의사의 정보의 비대칭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 여성들의 의료 경험을 모아 내는 민우회의 작업들[ref]여성 중증질환 경험수기집 『아플 수 있잖아』(https://www. womenlink.or.kr/publications/22900), 산부인과 의료경험 사례집 『혹시, 산부인과 가 봤어?』(http://womenlink.or.kr/minwoo_actions/19379).[/ref] , ‘현명한 선택choosing wisely’ 운동[ref]2012년 미국 의료계에서 시작되어 유럽지역까지 확산된 운동이다. 불필요한 검사와 처치를 줄여 과잉진단, 의료비 증가를 막기 위해 의사들이 학회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스스로 적정진료를 하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각 학회들에서 ‘소아 단순 감기에는 항생제를 투여하지 않는다’, ‘양성질환으로 자궁절제술 시 난소를 무조건 같이 제거하지 않는다’, ‘65세 이하 여성에서는 정례적으로 골다공증 검사를 하지 않는다’ 같은 원칙들을 수 개씩 제출해, 환자들과 의료인이 검색할 수있도록 하였다. 한국에서는 대한암학회에서 ‘암 치료의 올바른 선택’ 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캠페인을 시작했다(Choosing wisely international 홈페이지 https://www.choosingwisely.org/, 암 치료의 올바른 선택 홈페 이지 https://www.cancer.or.kr/mail/newsletter/2020_06/).[/ref] 에도 관심을 갖자. 더 많은 역사를 발굴해 내 읽는 것만큼, 우리의 현재의 경험들도 더 많이 드러나야 한다.


오늘부터 이 질경을 ‘심스가 흑인 여성 노예들을 착취 하여 개발한 질경’이라고 이름을 바꿔 부를 수는 없겠지 만, 그리고 이 질경을 보이콧해서 안 쓸 수도 없겠지만, 적어도 이 여성들의 역사가 발굴되어 다시 읽혀서 기구를 사용할 때마다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하는지 잊지 않는다는 것, 그런 마음으로 내가 맺고 있는 의사-환자 관계를 되돌 아보는 것, 이것이 진정한 남북전쟁 이전 시기, 남부 흑인 농장병원의 유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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